황우석 사태의 문제와 대안을 짚어본다

   
▲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밝혀진 진실이 오히려 거짓이기를 소망하는 것 같다. ⓒ뉴스앤조이 신철민
“어떤 일에 대해서 원칙을 논하는 것이 구체적 사실에 대해 책임지려는 것보다 훨씬 쉽다.” 양심의 사람으로 알려진 독일의 신학자 본 훼퍼의 말이다. 이 말은 결코 원칙이 덜 중요하다거나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혹은 더 쉬우니 ‘원칙’만을 논하라는 말도 물론 아니다. 그는 ‘책임’과 ‘행동’을 강조하고 싶었을 게다.

최근 금세기 최고의 과학자로 추앙되던 황우석 서울대 석좌교수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세계 최초로 환자 맞춤형 줄기세포를 만들어 내었다고 믿었고, 그로 인한 천문학적인 부가가치를 쏟아낼 것으로 기대했던 모든 것들이 허망하게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그의 연구가 안고 있는 윤리적 문제는 잠시 접어두더라도 거짓과 거짓이 쌓여 만들어냈던 거대한 신기루에 온 국민이, 나아가 세계가 속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따름이다.

그래서인지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밝혀진 진실이 오히려 거짓이기를 소망하는 것 같다. 검증되지 않은 ‘음모론’이 힘을 얻는 것도 다 그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황우석’과 ‘민족적 자존심’을 동일시해왔던 우리 국민들에게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른다. 황우석 신드롬이 정부와 언론, 과학계의 오랜 관행과 조직적 자작극이었음을 감안할 때, 분열된 민심은 쉬이 납득될 만도 하다. 문제는 적어도 진실이 밝혀진 지금, 각계 책임 있는 자들의 대응이 아쉬울 뿐이다.

안타깝게도 그 대표격인 황 교수는 마지막까지 남은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거짓을 은폐하려 한다. 휘하의 연구원들을 대동하고 기자회견까지 감행하며, 종교까지도 이용하려 든다. 진실을 외면한 채 황 교수를 민족적 영웅 만들기에 앞장섰던 언론은 아직까지도 관성을 버리지 못하고 그의 언론플레이를 대서특필하며 뉴스의 절반을 그에게 할애한다. 선정적 카운트다운식의 보도 수준을 못 벗어난 것이다. 국민들의 혈세를 아무 검증 없이 학연·지연의 고리로 낭비해버린 정부도, 또 적극적으로 지지에 나섰던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다. 대국민 사과 한 마디 없다. 황 교수의 권력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줄서기에 바빴던 각 당의 인사들은 어떤가? 서로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할 뿐이다.

언론은 아직도 관성을 버리지 못했는가

황우석 사태는 원칙이 무너진 사회, 그 원칙이 책임 있게 살아 움직이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우선은 그 예로 ‘줄기세포’라는 불확실한 ‘특수’에 기댄 ‘장밋빛 환상’을 살펴보자. 황우석 교수의 배아복제 줄기세포 연구는 우리나라 역사상 경험이 없는 신(新)의료산업화 정책의 일환이다. 정부는 이 신정책의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해 세계 최초, 최고, 난치병 특효 등의 검증되지 않은 정보들을 동원하고, 한국이 시장을 주도하여 곧 수십에서 수백조의 가치를 창출할 것이라며 대중들에게 일정한 환상을 심어주었다.

이에 대한 비판을 배제하면서 묻지마 투자와 재정지원을 확대하여 후속 연구를 진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전체 산업 중 의료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불과 2.72%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중에서도 세포치료 산업의 비중은 일부에 불과하고, 줄기세포는 그 하나일 뿐이다. 줄기세포도 또 성체와 배아줄기세포로 나뉘고, 황 교수의 체세포복제줄기세포는 배아줄기세포에서도 한 분야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소위 황우석 특수가 얼마나 부풀려 졌던 것인가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줄기세포연구, 특허 및 의료산업화, 민주노동당 토론회, 2005. 12. 12.)

두 번째로, 황우석 사태가 남긴 또 다른 상처는 가부장적 권위주의가 아직 가시지 않은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인권이 또 다시 무참히 짓밟혀졌다는 것이다. 불법적으로 난자를 매매한 여성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순수한’ 마음으로 난자 기증 행렬에 동참한 여성들에게도 동일한 상처를 남겼다.

유럽에서는 1회 2~3개 이상은 뽑지 못하도록 규정한 난자를 한 번에 10~20개씩 채취를 했으며, 그것도 부작용에 대한 어떤 공지도 없었다. 난자 채취의 부작용 확률을 역대 최고인 20%대로 늘린 원인을 이 외에 어디서 또 찾아볼 수 있을까? 여기서 여성들은 그나마 최소한의 권리마저 박탈당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난자 기증을 주도했던 ‘난자기증재단’의 태도를 보자. 황우석 교수의 사기(詐欺)에 대해 가장 분노해야할 이 단체는 아직도 그의 재개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난자기증 재단의 대표격인 이 모 이사장은 KBS의 한 심야토론에 참석하여 제발 난자 채취의 부작용에 대해 더 이상 얘기하지 말아달라고까지 한다. 이성이 마비된 여성들로 비하되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다.

백번 양보해 그들의 순수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순수성이 이용당했는데도 그 많은 줄기세포 연구진들을 제쳐두고 논문 사기 행위가 드러난 자에게 또 연구 기회를 줘야한다는 그들의 주장을 어찌 이해해야 할까? 오히려 난자 채취 과정에서 여성의 인권이 유린되지 않도록, 절차적 투명성과 안정성을 주장하고 그 순수성이 보호되도록 요청해야 하는 것이 순수 기증자들의 모임인 난자기증재단의 역할이 아닐까?

황우석 사태의 모순은 이 외에 난치병 환자에 기댄 언론플레이에서도 극적으로 드러난다. 5000여 종이 넘는 희귀난치성 질환 중 80%는 유전성 질환으로 복제배아 줄기세포의 방식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나머지 20%에 해당하는 후천성 질환자들은 대부분 안전사고 혹은 교통사고에 의한 것으로 예방이 가능한 부분이다. 즉 난치병 환자를 전면에 내세운 언론 플레이는 황 교수의 연구를 위한 포장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사실 난치병 환자들이 누구인가? 우리 주변의 장애인들 아닌가? 우리나라가 장애인 인권의 사각지대라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 황 교수의 병실에 진달래를 깔아주던 손길이 장애인의 생존권을 향해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열려있는가? 난치병 치료를 위해 연구해달라고 한 개인에게 막대한 경비를 쏟아 붓는 이 나라는 공공 의료서비스 수준이 안타깝게도 OECD국가 중 최하위 수준이다. 집안에 난치성 질환자 한 명이 태어나면 일반적인 가정은 의료비로 빚더미에 앉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대안은 명백하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부풀려진 ‘특수’에 올인하는 정책은 곤란하다. 특히 의료 문제는 국민의 건강권과 직결되어 있고, 건강권은 곧 생명권과 닿아 있다. 여기서 다 논할 수는 없으나 정부의 이런 무리한 정책 추진의 내면에는 의료를 국민의 기본권으로 보기보다 산업논리로 해석하려는 의도가 있다. 또 의료에 있어서까지 신자유주의 정책이 뿌리내린 결과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이렇게 모든 게 산업논리와 경제논리로 해석되는 가운데, 연구의 핵심인 배아, 즉 자기결정권이 없는, 그럼에도 인간의 모든 유전정보를 완벽하게 담고 있는 어린 배아는 ‘단지 세포덩어리’ 취급을 받을 뿐이다. “인간이 감사할 수 없는 것은 과거를 망각하기 때문”이라던 본 훼퍼의 말마따나 나의 현 존재를 감사할 수 없는 인간은 과거 자신이 배아로부터 출발했음을 잊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수정된 배아가 모두 엄마의 자궁에 잘 착상해 정상적인 아이로 태어나는 건 아니다. 중간에 자연 유산이 되는 경우도 있고, 태어나긴 했는데 난치병을 안고 태어나는 경우도 있다. 또 잘 살다가 뜻하지 않은 재해로 일찍 목숨을 거둘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들의 존재가 귀하지 않은 건 아니다. 생명의 존엄성은 그 인간이 가진 조건에 의해 규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바로 ‘인간’이기 때문에 존엄한 것이며, 어떤 조건을 타고 났던 누군가에겐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인간의 ‘의도적 개입’이다. 생명의 존엄함은 누군가 임의로 줬다 뺏을 수 없기에, 생명을 다루는 일은 신중해야 하고 그것을 살리는 데에만 전념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생명을 살린다는 이유로 다른 생명을 파괴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또 임의로 생명의 기준을 정해서도 안 되는 이유이다. 더구나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는 생명의 초기 단계인 인간 배아를 누가 임의로 생성하고 파괴할 권한을 가졌는가?

이쯤 되면 대안은 너무도 명백하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줄기세포 특수가 인류의 건강증진과 생명권의 확대에 기여할 가능성은 예상 외로 그리 크지 않다. 물론 상대적으로 윤리문제가 적은 성체줄기세포 연구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나 배아를 파괴하는 연구는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황우석 사태가 초래한 혼란과 충격은 크지만 우리에게 ‘전화위복’의 기회는 남아있다. 황 교수를 비롯해서 정부 관계자와 정치권, 언론 등 관련 당사자 및 집단의 구체적인 책임의 자세가 그 첫 번째요, 난자 공여와 관련된 제도적 투명성을 마련하는 것이 그 두 번째고, 배아를 법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 그 세 번째다. 또 국민들의 건강 증진을 위한 보다 합리적인 대안 및 의료 평등을 이룰 수 있는 획기적인 정책이 필요하다.

그리고 미처 논하지는 못했지만, 연구실 내에서의 비민주적 위계질서 극복과 연구원들의 복지 개선도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이번 일이 진행되면서 숱하게 오르내리던 ‘국갗와 ‘민족’에 대한 환상, 이 또한 극복의 대상이다. 황우석 신화의 탄생이 우리 사회의 찌든 관행인 학연․지연과 무관하지 않음을 감안할 때, 잘못된 국가주의는 확대된 패거리 문화의 일부라는 걸 인식해야 한다. 전화위복의 기회는 이렇듯 구체적 사실에 대해 책임지려할 때 주어질 것이라 믿는다.

김희경 /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정책부장

구독안내

이 기사는 유료회원만 볼 수 있습니다.

후원구독, 온라인구독 회원은 로그인을 해주시고 인증 절차를 거치면 유료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후원구독(월 1만 원 이상), 온라인구독(1년 5만 원) 회원이 아니시면 이번 기회에 〈복음과상황〉을 후원, 구독 해보세요.

저작권자 © 복음과상황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