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호 커버스토리]

답안지를 베끼던 아이
몇 년 전 겨울, 대형 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있을 때의 일이다. 한쪽 구석에 한 아이가 문제집을 두 권 들고 바쁘게 뭔가를 적고 있었다. 옆에 가서 보니 한 문제집의 정답을 다른 문제집에 베끼고 있었다.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뭘 하는지 물었다.

“이게 학원 숙제인데 엄마가 정답지를 가져가서 여기 문제집에서 정답을 베끼는 중이에요.”
“문제를 네가 풀어야 그래도 알게 될 텐데…. 베끼기만 하면 베끼는 시간이 너무 아깝지 않니?”
“이거 다 알아요. 그런데 풀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요. 다 풀 수가 없어요.”


적당히 풀이 과정도 섞어가며 베끼는 중 1~2쯤 되어 보이는 소년의 표정은 그래도 밝았다. 나와 이야기하는 게 즐거웠는지 학교 이름도 이야기하고 방학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도 술술 풀어놓았다. 그리고는 학원 시간이 다 되었다며 가방을 쌌다.

그 밝은 표정에 그래도 안심을 하며 엄마를 그렇게 미워하진 않는 듯하여 “엄마랑 학원이나 문제집에 대해 잘 상의해 보렴~” 하고 아이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아이는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문제집 풀이에 정답을 베끼는 것에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듯 보였다. 어쩌면 애써 죄책감을 외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엄마는 아이가 이렇게 서점에서 정답지를 찾아 문제집을 채우는 것을 알고 있을까? 날마다 분량을 해내는 아이를 기특해하고 있을까? 잘 해내는 아이에게 선물을 사줄지도 모르고,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 왜 성적이 안 오르나 이상해하며 학원을 바꿀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더 많은 문제집을 풀라고 할지도…. 아이는 지금도 너무 많아서 풀 수가 없다고 했는데, 엄마는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아이를 사랑하는 엄마의 마음도 그 아이의 표정만큼이나 순수하고 해맑았을 것이다. 아이를 상처 입히려는 것은 아니었을 테지. 아이도 엄마를 속이는 짓이 좋아서 하는 것은 아닐 테고.
그 아이가 유독 도덕성이 결여되어 그런 일을 한 것일까.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대한민국 부모》란 책에는, 아이를 사랑한 죄밖에 없는 부모와 그 사랑에 미칠 것 같은 아이들이 나온다. 한 강의에서 저자는 본래 이 책은 아이들의 고통에 대해 쓰려고 기획한 것이 아니었다고 했다. 오히려 부모로 사는 어른들에게 도대체 왜 이렇게 사느냐 묻고 싶어 쓴 책이라고 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고 한 일들이 아이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아이들과 결별하게 만드는 부모들의 사랑에 대해 저자는 “마음을 희생하지 않는 부모들”이라고 불렀다. 사회적 지위나 재산에 집착하는 사람, 타인의 사소한 일부분을 가지고 그 사람 자체를 판단해버리는 사람들인 속물이 되어버린 어머니. 아이와 나눌 것이라곤 돈 벌어주고 숙제와 시험공부 신경 쓰는 것과 자신의 공허와 불안뿐인 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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