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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를 짓밟는 도시, 소돔과 고모라

기사승인 [304호] 2016.05.23  14: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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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7호 커버스토리]

소돔과 고모라는 죄악의 상징이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에 대해 많은 이들은 동성애를 이야기한다. ‘남색’(男色)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소도미’(sodomy)도 이 점을 반영한다. 그러다보니 동성애를 반대하는 성경의 근거를 이야기할 때 소돔과 고모라가 인용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러나 우리가 지닌 전통적인 이해들이 대부분 통념을 반영할 뿐, 본문 자체에서 비롯되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고,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에 대한 이해 역시 그러하다고 여겨진다. 구약 곳곳에 나타나는 소돔과 고모라 언급의 기초는 창세기에 설명된 사건일 것이다. 이 글은 창세기를 기반으로, 구약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무엇으로 설명하고 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창세기에 나타난 소돔과 고모라
창세기 17장은 하나님이 아브람과 사래의 이름을 아브라함과 사라로 바꾸시며 하나님의 언약 표시로 할례를 명령하시는 장엄한 언약 체결 장면을 다룬다. “여러 민족의 아버지”를 뜻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거듭해서 땅과 자손의 약속을 확인시켜 주신다. 그리고 그 언약의 표시로 할례를 명하신다. 이때 그의 나이 99세였다. 그런데 그 약속대로 자식을 얻는 이야기는 21장에 가서야 다루어진다. 17장에 있는 자손에 대한 약속과 언약 체결 그리고 21장의 마침내 자손을 얻는 이야기 사이에 놓여 있는 것이 18~20장이다. 18장에서 시작되는 소돔과 고모라 사건의 출발은 아브라함이 사는 지역에 등장한 세 사람의 나그네였다. 그리고 소돔 사건이 일어난 후 20장은 아브라함이 그랄이라는 곳으로 옮겨가게 되었다는 내용을 전한다. 그래도 익숙하던 헤브론 지역에서 또 다른 낯선 땅에 아브라함이 나그네로 머물게 되면서 일어나는 일을 20장이 다룬다.

17장의 언약 체결과 그 약속의 성취로 이삭의 출생을 다루는 21장 사이에 놓인 18~20장은 ‘나그네’를 중심 소재로 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언약 체결에 이어 18~20장이 주어지고 마침내 자손을 얻게 되는 내용이 21장에 있다는 점에서, 현재의 배열은 언약 백성의 합당한 삶의 모습과 나그네 접대를 연결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장들에 등장하는 이들은 나그네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아브라함이 머물던 곳에 나그네가 나타났다.(창 18:1~2) 나그네를 발견하자 아브라함은 곧바로 그들에게 달려나가서 영접하였다. 아브라함의 극진한 대접에서 그가 이 나그네들을 하나님 혹은 천사 같은 특별한 존재로 인식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할 수 있지만, 발을 씻게 하고 음식을 대접한다는 점에서 아브라함은 전혀 천사로 인식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참고. 토빗 5:4; 히 13:1~3). 그들을 천사나 하나님의 사자라고 여겼다기보다는 오히려 ‘나그네는 하나님의 사자’라는 인식이 아브라함의 행동 이면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나그네들 앞에서 엎드렸다. 이 역시 천사에 대한 행동이라기보다 모든 나그네에 대한 그의 극진함과 정성을 보여주는 행동이다. ‘괜찮으시다면 그냥 가지 마시고 그들을 대접할 기회를 달라’는 그의 간곡한 부탁을 들은 나그네들은 이를 허락하고, 떡을 가져오겠다던 아브라함은 송아지까지 잡아서 식사를 대접한다. 그들이 식사하는 동안 아브라함은 그들 곁에 모셔 섰다고 하였다.

참으로 누가 주인인지 누가 나그네인지 헷갈릴 정도로 아브라함의 환대는 극진하였다. 그가 나그네에게 청하는 말은 환대의 근본일 것이다.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 귀한 일이지만, 아브라함은 오히려 나그네들이 자신에게 대접할 기회를 준 것이 귀한 일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것이 환대일 것이다. 남의 자리에 어색하게 와서 앉아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그곳에 나의 자리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대접하였다. 아브라함은 이들이 누구인지 묻지 않는다. 누군가에 대한 대접은 그 사람이 누구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요즘 어디를 가든 개인 신상에 대해 묻지 않는 것이 기본이며 주민등록번호를 함부로 요구하지 않는 것이 대세라지만, 환대는 상대가 누구인지와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온 나그네들은 마치 그곳이 자신들의 원래 자리이기라도 한 것처럼 환대를 받았다(“성원권”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 64~72쪽을 보라).

이렇게 나그네를 환대하는 모습은 소돔에 살고 있던 롯에게도 볼 수 있다. 롯 역시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나그네가 오는 것을 보고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였다.(창 19:1) 아브라함이 했던 행동과 롯이 하는 행동이 동일하다. 롯 역시 나그네들을 향해 “내 주여”라고 부르며 자신의 집에 머물 것을 간청하고 그들이 거절하자 더더욱 간절히 청하여 마침내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한다. 식탁을 베풀고 손님을 대접하는 롯을 보면서 여기에서도 누가 주인이고 누가 나그네인지 겉으로는 알기 어려울 정도다. 롯이 자신의 딸까지라도 이 나그네들을 위해 내어놓겠다는 점은 오늘날 우리가 결코 납득하기 어려운 행위이지만, 나그네들의 자리가 그만큼 그곳에서 단단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아브라함과 롯의 공통점은 나그네에 대한 환대다. 나그네 환대는 사소한 여러 가르침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신명기 10:12에서 모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마음 다해 그를 섬길 것을 명령한다. 하나님을 일러 “신 가운데 신, 주 가운데 주, 크고 능하시고 두려우신 하나님”이라 언급한 모세는 그 하나님께서 외모와 뇌물을 보거나 받지 않으신다 선언한다.(신 10:17) 그렇기에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신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신 10:17~19)

하나님의 높고 뛰어나심이 외모, 뇌물에 좌우되지 않기와 결부되고, 고아, 과부, 나그네를 사랑하심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이 구절의 논리 전개는 매우 특이하다. 우리네 교회에서 빈번히 불리는 ‘경배와 찬양’들은 온통 ‘하나님의 높고 뛰어나심’이 주제이기에 절로 손을 들고 노래하게 하되, 그 어느 곡도 외모와 뇌물에 대한 거부 그리고 고아, 과부, 나그네로 대표되는 그 시대의 가난하고 힘겨운 이웃의 삶으로는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높으심만을 부르고 또 부르는 것은 우리네 참담하고 끔찍하며 지옥 같은 현실로부터 하나님을 분리시키는 경향이 있다. 어쩌면 우리네 교회는 하나님께서 그런 문제에 개입하지 말고 높은 곳에 그저 머물러 계시기를 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신 가운데 신, 주 가운데 주이신 크고 능하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시작한 신명기 구절의 결론은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는 명령이다.(신 10:19) 하나님이 나그네인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으니, 나그네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본받는 삶의 본질일 것이다. 나그네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환대하는 것이며, 나그네에 대한 환대는 아브라함과 롯에게서 잘 드러난다. 하나님 백성의 거룩한 삶에 대해 명령하고 있는 레위기 19장도 이스라엘과 함께 살아가는 나그네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같이 사랑하라” 명령한다.(레 19:33~34) 레위기 본문을 비롯해 신명기와 구약의 본문들은 이렇게 이스라엘 가운데 머물고 있는 나그네의 신앙과 그들의 다른 상황에 대해 묻지 않으며 언급하지 않는다. 그들은 ‘너희의 땅에 거류하여 함께 있는 자’로 설명될 뿐이다.(레 19:33) 그 땅에 함께 살고 있는 이들이기에 이스라엘은 그들을 동포처럼 자기처럼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나그네를 사랑하는 근거로, 레위기 역시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레 19:34) 설명한다. 다음과 같은 히브리서 구절 역시 같은 것을 이야기한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 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너희도 함께 갇힌 것같이 너희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히 13:1~3)

형제 사랑은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 갇힌 자와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는 것으로 요약되며, 그 점에서 히브리서 본문은 레위기와 신명기 본문을 생생하게 잇고 있다.

창세기 20장은 아브라함이 그랄 땅으로 가서 머무르던 시절을 다룬다. 그 땅의 왕이 아브라함의 아내를 데려갔다. 물론 자기 아내를 누이라 속인 아브라함에게도 문제가 있겠지만, 아브라함은 그렇게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 말한 까닭에 대해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라고 답한다.(창 20:11)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지역은 다른 이의 아내라 하여도 나그네의 것을 마음대로 강탈하는 세상으로 아브라함이 느끼고 있음을 그의 대답이 보여준다. 이러한 지역은 나그네가 온전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없는 지역일 것이며 자신과 자신의 가정을 만일을 대비하여 속여야 하는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는 별개로, 그랄 지역은 나그네가 살아가기 어려운 곳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그들 가운데 있는 나그네를 어떻게 대하는가로 판단된다.

소돔과 고모라 사건은 이렇듯 아브라함과 롯, 그랄 땅 사람들이 어떻게 나그네를 대하는지를 보여주는 단락 안에 놓여 있다. 소돔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나그네 대응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소돔 지역에 낯선 나그네가 들어오자 당장 소돔 사람들은 몰려와서 그 나그네를 요구한다. 19:5에서 개역 성경이 “상관하리라”로 번역한 히브리말은 4:1에서 ‘동침하다’로 번역된 히브리말 동사 ‘알다’이다.
서로를 안다는 것이 참 좋은 의미이겠으되, 소돔 사람들이 하는 ‘우리가 그들을 알아야겠다’는 말은 무시무시한 폭력이다. 19:4은 “소돔 사람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 왔다고 전한다. 이것은 소돔의 어떤 특정한 이들의 문제가 아니라 소돔성 전체의 문제였다. 소돔 사람들은 자기들이 사는 영역에 흘러들어온 낯선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남녀의 서로를 앎이 있는가 하면, 이렇듯 다수의 힘을 가진 이들에 의해 소수의 나그네를 폭력적으로 짓밟는 앎도 있다. 아브라함과 롯은 자신들에게 다가온 나그네의 신원과 정체를 묻지 않고 극진히 대접하되, 소돔 사람들은 우리가 ‘알아야겠다’며 이들을 짓밟으려고 한다. 이러한 ‘앎’은 상대를 자신들의 틀로 맞추고 바꾸려는 행동의 표현일 것이다. 그들 가운데 들어온 낯선 이들은 이미 그 땅에 존재하던 이들의 사고방식과 틀에 맞아야 존재가 가능해져 버렸다. 그리고 이렇게 짓밟을 수 있는 것은 나그네들이 자신들에 비해 소수이기 때문일 것이다.

‘색출’하려는 자, 소돔인
하나님은 높은 곳에 계시기에 사람들의 외모에 좌우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도 사람들의 겉으로의 정체는 큰 의미가 없는 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방의 정체를 묻고 그래서 그의 위치와 상태를 파악하고 그에 맞게 상대한다지만, 대개 우리는 그러한 ‘앎’을 통해 상대의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나름대로 파악할 따름이며 그 나름의 이해를 가지고 상대방을 차별적으로 대하기 쉽다. 심지어 상대방의 성적 지향까지도 ‘알아야겠다’ 말하며 그들을 ‘색출’하려는 이들이 기독교인들 가운데 많으니,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소돔 사람의 모습이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낯선 이를 ‘알아야겠다’는 말은 참으로 폭력적이다.

이 점은 오늘의 현실과 맞닿는다.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제정된 테러방지법은 국가가 의심스럽다 싶은 사람의 모든 정보를 수집하는 것을 합법화시켰다. 국가를 대표하여 국가정보원은 이 땅을 살아가는 국민들의 정보를 ‘알고자’ 한다. 개인의 삶이 공공의 영역에 미치는 영향이 훨씬 적은 데 비해,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은 국가 전체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이 정부는 2년 전 세월호가 침몰하던 그 날에 대통령의 행적이 일곱 시간이나 오리무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생활”을 내세우며 끝까지 밝히기를 거부하되, 개개인 국민의 정보를 무차별적으로 ‘알고자’ 한다.

죄가 없으면 그만이라지만, 모든 정보를 ‘알게 된’ 이들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이를 다룰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앎’은 결국 국민의 삶을 통제하고 짓밟고 조종하며 권력에 거스르지 못하게 노예처럼 만드는 것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이 ‘알아야겠다’는, 지극히 폭력적이며 사사롭고 임의적이다. 테러방지법이라는 미명으로 제정된 법은 실제로는 소돔의 폭력적인 앎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므로 소돔 사람들의 죄악은 동성애이지 않다. 그들의 죄악은 자신들과 다른 이들, 자신들과 어울리지 않으며 자신들을 보호할 힘이 없는 이들에 대한 짓밟음과 유린이다. 자신들과 다른 이들, 자신들이 주가 되어 살아가는 세상에 들어온 소수의 낯선 이들에 대한 폭력적인 앎의 결과가 동성애이다. 상대방의 의사와 무관하게 다수의 힘에 의해 소수의 사람에게 저질러지는 성폭력이 소돔의 죄악의 본질이다. 하나님께서 소돔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확인하기 위해 그의 사자들을 보낸 까닭은 소돔에서 들려온 “부르짖음” 때문이었다.(창 18:20~21) 이 “부르짖음”은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에 의해 그동안 짓밟히고 희생당한 이들의 부르짖음일 것이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고통하는 히브리 노예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으며(출 3:7), 억울한 일을 당한 고아와 과부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출 22:22), 부당하게 희생당하여 피 흘리는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시 9:12) 그러므로 소돔의 죄의 본질은 동성애이지 않되, 부당한 폭력이며, 하나님께서는 그 폭력에 희생당한 이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소돔을 심판하신다.

그러므로 소돔에서 동성애를 금지하고 살벌하게 처벌한다 해도 반드시 이 도시는 또 다른 방식의 폭력을 나그네들에게 자행할 것이다. 소돔 사람의 죄악의 본질은 우리와 다른 이들을 용납하지 않고 내 방식으로 알려고 하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소돔에 교회가 존재한다면 동성애 금지를 위해 싸울 것이 아니라 나그네에 대한 전적인 환대, 우리 가운데 함께 살아가는 힘겨운 이들에 대한 전적인 환대를 위해 싸워야 할 것이다. 교회는 동성애와 싸우는 곳이 아니라 나그네를 대접하기에 힘쓰는 곳이다.

구약에서 동성애가 참담한 범죄의 일환으로 등장하는 또 다른 본문은 사사기 19장이다(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필자의 《소예언서 1: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158~160쪽을 참고하라). 레위인이 그 첩과 더불어 베냐민 지파 기브아에 머물렀을 때에 그들을 환대한 노인이 있는가 하면, 그 집에 들이닥쳐 남자를 내어놓으라 소리 지른다. 그들 역시 ‘그들을 알아야겠다’ 말한다(삿 19:22). 사실 이들은 동성애자이지도 않았다. 여인을 내어놓았더니 그 여자를 밤새 능욕하여 죽기까지 이르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브아 사람들의 본질 역시 동성애가 아니라, 나그네와 약자에 대한 폭력적인 앎과 짓밟음, 유린이다. 나아가 이스라엘 전체가 나서서 이 일을 바로잡고자 하여 이 일 저지른 이들을 내어 놓으라고 요구하였을 때 베냐민 지파가 이를 거부했다는 데에서(삿 20:12~14), 기브아는 옳고 그름을 떠나서 자기 사람이면 끝까지 챙기고 보는 지극한 집단이기주의와 자신 지파 아닌 사람에 대한 철저한 배타를 상징한다. 기브아 사람들의 패역한 짓은 사실상 이렇듯 집단이기주의와 패거리주의를 지닌 베냐민 지파의 필연적인 결과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가 상징이 되었듯이, 기브아의 범죄 역시 일종의 상징 언어가 되었고(호 9:9; 10:9), “기브아 시대”는 약자에 대한 폭력과 집단이기주의를 상징한다.

이러한 행실의 반대말은 무엇인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창세기 19장은 18~20장의 맥락 안에 놓여 있다. 소돔을 심판하러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하게 하려고 너를 택하였다’ 이르시는 것(창 18:19)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중보한다. 소돔 성에 의인이 열 명이 있는데 그 열 명이 애꿎게 죽임당할까 중보하며, 그 열 명이 있다면 소돔 전체를 살려달라고 중보한다. 이러한 중보는 억울한 죽음, 억울한 눈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기도라는 점에서 올바른 재판, 정의로운 사회라는 덕목과 연관된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소돔과 고모라의 상징은 ‘동성애’가 아니라 ‘나그네와 약자, 소수에 대한 짓밟기와 폭력’이며, 소돔의 죄악의 반대말은 ‘이성애’가 아니라 ‘나그네에 대한 환대로 대표되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이다.

소돔에 대한 창세기 외의 언급들
소돔과 고모라는 구약의 다른 본문들에도 여러 차례 언급된다. 그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음이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고, 이 두 가지 소재가 구약 전체에 언급된 소돔, 고모라 언급의 핵심이다.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는 죄악의 상징이며(창 13:13; 사 1:10; 3:9; 렘 23:14), 그로 인해 하나님의 두렵고도 완전한 심판으로 인해 생명이 살 수 없도록 멸망당한 곳을 상징한다(신 29:23; 32:32; 사 13:19; 렘 49:18; 50:40; 암 4:11; 습 2:9)(Loader: 60~61). 덧붙여서, 소돔과 고모라가 겪게 된 황폐함은 이 도시들이 원래 지니고 있던 풍요로움 때문에 더욱 두드러진다.(창 13:10; 겔 16:49) 창세기 14장에서 소개되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가 연루된 전쟁 역시 이 지역의 풍요로움이 발단이 되었을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가 패배하자,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약탈당하였다는 언급(창 14:11)과, 아브라함에게 도움을 받은 소돔왕이 그 빼앗겼던 물품들을 아브라함에게 주려고 하는 것도(창 14:21) 그러한 소돔의 풍요로움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이 본문들 가운데 에스겔과 이사야는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에스겔
에스겔서는 소돔의 죄악에 대해 명확하게 언급한다.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겔 16:49~50)

이 구절이 어떤 사건을 가리키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그들의 악을 보고 하나님이 곧 그들을 없이 하였다는 점에서 창세기에 언급된 사건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에스겔에 따르면 소돔의 죄악은 동성애가 아니다. 그들의 태평함과 풍족함 가운데 그들 가운데 있는 가난하고 궁핍한 이들을 돌아보지 않은 것, 도리어 교만하고 거만하게 가난한 이들을 향해 가증한 일을 행하였던 것, 그것이 소돔의 죄악이다. 풍족하고 평안하던 소돔 주민들에게 떠돌이 나그네들이 설 자리는 전혀 없었다. 나그네를 환대하지 않은 것이 소돔의 멸망 원인이며,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을 경외치 않는 이들의 근본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사야
이사야 1:10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에 힘쓰며 모인 유다를 향해 “소돔의 관원 … 고모라의 백성”이라 부른다. 이 구절이 더욱 특별한 것은 바로 앞에 있는 1:9에서 여호와께서 조금 남겨둠으로 인해 겨우 소돔, 고모라 신세가 되는 것을 면했다는 고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1:10은 1:9의 안도의 한숨과는 달리, 유다야말로 소돔이고 고모라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선언한다. 소돔과 고모라라는 호칭과 더불어 이사야가 제기하는 것은 그들 가운데 가득한 제사와 절기, 안식일 준수와 동시에 존재하는 악한 행실이다.(사 1:11~17) 제사에 대한 격렬한 고발에 이어 이사야가 요구한 것이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사 1:17)였다는 점에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창세기의 이해와 같은 맥락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사야서에서도 문제는 사회적 불의이다. 가난한 자를 착취하고 고아와 과부가 설 자리가 없어지게 만드는 세상, 그곳이 소돔, 고모라이다.

넘쳐나는 제사와 절기 준수에 힘쓰는 공동체, 그렇게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공동체를 향해 소돔이고 고모라라고 고발한 것은 가히 충격적이라 할 수 있다. 주후 1세기 즈음에 쓰인 것으로 여겨지는 〈이사야 승천기〉(Ascension of Isaiah)에서, 이사야가 사형에 해당한다고 고발되는 죄상은 ‘예루살렘과 유다에 대해 황폐케 될 것이라’고 거짓 예언한 점, 그리고 ‘예루살렘을 소돔이라 부르고 유다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을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선언하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사야 승천기〉가 쓰인 시기에 이사야의 말이 얼마나 과격한 말로 여겨졌는지를 보여주면서(Loader: 59), 동시에 이사야의 표현이 당시에 예루살렘에 모인 제사공동체인 청중들에게도 얼마나 충격적이었으며, 그들을 분노케 하였을지를 짐작하게 한다.

성전이 무너지리라 예레미야가 선포하였더니 백성들의 반응이 예레미야를 죽이자 하였고(렘 26:1~8), 이 예레미야 역시 예루살렘 사람을 가리켜 소돔과 고모라라고 불렀다는 점(렘 23:14)도 이와 연관해 충분히 납득된다. 그리고 성전과 안식일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 바리새인과 대제사장들에게는 신성모독으로 들렸고, 그들이 결국 주님을 죽여버렸다는 점도 일맥상통한다. 이러한 외침이 오늘 우리네 교회에 전해진다 해도 매우 충격적일 것이다. 우리네 교회는 교회가 소돔이고 고모라라는 점을 결코 인정하지 못할 것이며, 그렇게 외치는 사람이 도리어 반드시 교회에서 추방되고 말 것이다.

나그네를 짓밟는 도시 소돔과 고모라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약자를 짓밟고 소수의 무리를 탄압하며 상대를 자신들의 잣대를 가지고 폭력적으로, ‘알아야겠다’ 여기는 것, 그것이야말로 소돔의 실상이고, 하나님께서는 그 소돔을 완전히 뒤엎어 버리셨다. 그러므로 교회가 싸워야 할 대상은 결코 동성애이지 않다. 약자를 짓밟고 조롱하고 비웃으며 자신들의 방식으로 알아야겠다고 유린하는 세상이야말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실체이다. 

■ 참고문헌
김근주, 《소예언서 1: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성서유니온선교회), 2015.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문학과지성사), 2015.
J.A. Loader, 《A Tale of Two Cities》(Contributions to Biblical Exegesis & Theology, Peeters), 1990.


 

김근주
학부에서는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신학교에 가게 되었고, 결코 상상해 본 적 없는 목사가 되었다. 예언자들이 외치는 심판뿐 아니라 회복의 메시지야말로 예수께서 이 땅에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알짬임을 깨닫고, 이를 연구하고 준행하고 가르치며 살기를 소망한다. 소망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는 연구나 준행, 가르침 모두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이다. 서울대, 장로회신학대학원,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소예언서 1: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특강 예레미야》 《이사야가 본 환상》 《느헤미야 팟캐스트 1: 세습 목사, 힐링이 필요해?》(공저) 등을 썼다.

김근주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교수 goscon@gosc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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