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종말 / 미로슬라브 볼프 지음 / 홍종락 옮김 / IVP 펴냄 / 16,000원

기억에 대한 주제가 꺼려지는 지금 우리사회에 툭 던져진 책이 하나 있다. 전 세계 신학자들이 주목하는 우리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평화의 신학자인 미로슬라브가 썼다. 그는 폭력의 시대 앞에서 과거의 상처에 대한 ‘올바른’ 기억법을 꺼내 들었다.

“ ‘기억을 놓아 보냄’은 피해자들이 혼자서 하는 일방적 행위가 아니다. 용서조차 일방적 행위가 아니다. 용서는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주는 쪽에서 건네고 받는 쪽에서 받아들여야만 하는 선물이다. 용서를 받아들여야만 용서받을 수 있다. 그리고 기억을 놓아 보냄-악행에 대한 무기억-은 용서보다 상호적인 성격이 더 강하다. 기억을 놓아 보냄은 피해자가 구속받고 가해자가 변화된 후에, 그들의 관계가 화해를 통해 재정의된 후에야 설 자리가 생긴다.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악행을 기억해야 할 의무는 유효하다. 기억은 정의에 봉사하고, 기억과 정의는 화해해 봉사하기 때문이다.”(280쪽)

저자는 잊을 수 없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마중물 삼아 성경과 교회사, 고전과 대중문학, 심리학, 철학을 아우르는 깊이 있는 인문학적 지혜와 신학적 사색을 펼쳐 놓는다. 불의한 일을 기억하는 행위를 하는 피해자 또한 가해자로 돌변할 수 있는 지점도 건드린다. 지금 한국사회의 상황에서 상당히 논쟁적 주장일 수 있는 이 점은 어쨌든 그의 고통과 상처의 경험에 기반하기에, 몰인정하지는 않다.

물론 그가 제안하는 용서 또는 화해는, 일일이 다 기억할 수도 차마 잊을 수도 없는 일들이 너무도 많은 이 시대에서 곧 이루어질 수도, 누가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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