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호 커버스토리]

오랜 기억의 출발점
정확하게 기억이 나진 않지만, 학교 공부에 점점 흥미를 잃어가던 시점과 자꾸만 외부 아카데미에 기웃거리게 된 시점이 얼추 겹친다. 대학원이라고는 하지만 70명도 넘는 학생들이 좁은 강의실에 구겨지듯 들어가 수업을 듣고, 질문 하나 제대로 못 하면서, 권위적인 교수에게 일방적인 교육을 받는 것 자체가 너무나 싫었다. 현실로부터 터져 나오는 신학적 고민과 물음들은 모두 거세당하고, 미리 정해진 정답의 테두리 속에서만 이야기를 전개하는 토론과 가르침에 숨이 턱턱 막혔다. 교단의 목회자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의 태생적 한계를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급변하는 한국사회의 필요와 목소리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커리큘럼이나 시스템은 교수나 학생을 서로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치 친구 손에 이끌려 교회에 가듯, 허름한 상가 2층에서 모이는 신학 공부 모임에 참석했다. 엄청난 스펙을 자랑하며 탁월한 학문적 역량을 자랑하는 강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비슷한 신앙 배경과 전통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것도 아니었으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쭈뼛거리며 공부하는 모임 속에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곳에서 속에서부터 곪아 터진 나만의 목소리를 끄집어낼 수 있었고, 비슷한 고민을 하는 신앙의 동지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에  위로를 경험할 수 있었다.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면서 좁디좁은 신학의 외연이 넓어지고, 사유의 깊이가 깊어짐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아카데미와의 만남이 시작됐고, 10년 동안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나만의 ‘아카데미 커리어’를 쌓았다. 

수강생에서 아카데미 스태프가 된 건, 기독지성운동의 효시라 할 수 있는 ‘기독교학문연구회’(기학연) 간사가 시작이었다. 10년 전만 해도 기독교세계관운동이 여전히 인기 있는 담론이었고, 관련된 책들도 지속적으로 쏟아지던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박총 선생이 <복음과상황>에 기독교세계관 논쟁을 촉발시켰고, 이후에 젊은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다양한 논쟁이 봇물 터지듯 시작됐다. 꼭 이 사건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때부터 기학연은 점차 후속세대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새로운 담론을 생산할 수 있는 역량을 상실했던 것 같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기독 청년들은 새로운 플랫폼의 출현을 기대했고, 자연과학을 공부하는 이들의 모임은 눈에 띄게 축소됐다. 비슷한 시기에 현대기독교아카데미, 기독청년아카데미, 청어람아카데미가 생기면서 새로운 아카데미운동이 시작됐고, 각각 자신의 장점을 살려 나름대로 감각적이고 현대적인 담론들을 만들어냈다.

이후 다양한 아카데미운동이 이곳저곳에서 생겨났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대중들과 소통하며 기독지성운동을 이끌어 왔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으니, 이쯤에서 그동안 기독 아카데미의 지형도가 어떻게 변했고, 어떤 필요에 직면했는지 진단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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