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호 레드레터 크리스천] 출소자·중독자·장애우와 함께한 30년 오두막살이, 오두막공동체 이재영 대표

   
▲ ⓒ복음과상황 오지은

오두막공동체는 출소자, 중독자, 장애인 등이 함께 어울려 산다. 노동은 가장 느린 이의 속도에 맞추고, 돈의 사용은 최소화하며 산다. 그래서 50여 평 단층 건물 한 채 짓는 데 무려 7년이 걸렸다. “열심히”라는 말도 하지 않는다. ‘열심’으로 이뤄야 할 목표보다 구성원들의 ‘행복’을 더 중히 여겨서다. 효율성을 따지다 보면 옆 사람이 보이지 않기에 “천천히” “여유 있게” “비효율적으로” 한발 한발 더디게 내딛는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높이’를 고집하는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고 반대의 길을 걷는다. 나란히 손잡고 느리게 걷는다.

사람들은 이재영 오두막공동체 대표에게 “그렇게 살아서 먹고살 수 있느냐” 거듭 질문한다. 그때마다 ‘잘 먹고 잘사는’ 모습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삶으로 답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 삶을 더 가까이에서 확인하고자 오두막공동체가 있는 경남 합천 쌍백면을 찾았다. 인터뷰는 지난해 9월과 올해 6월 10일 두 차례에 걸쳐 진행했다.

― 출소자, 알코올중독자 등 사회가 감당치 못했던 이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산 지 30년이 넘었다. 복상에도 그 이야기가 연재되었지만 참으로 굴곡진 길이었는데….
원래 공동체를 하자고 모아 놓으면 인격의 충돌이 일어난다. 서로 다른 인격들이 모여서 부딪히니까 여러 가지 사건들이 터지고, 깊은 곳에 숨어 있던 감정들이 솟아난다. 내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내 안에 있는 병증들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내 안에 ‘저 사람’과 어울릴 수 없는 인격적 감정적 병들이 있는 것을 느끼게 되고, 그것을 깨달으면 함께 살아가는 법도 배우게 된다. 이것이 성화, 영화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교회 열심히 다닌다고 성화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에서 한데 부대끼면서 서로 충돌하며 영화되는 것이다. 훌륭한 목사 열 명이 모여서 공동체 만들면, 시정잡배 열 명이 모여 공동체 하는 것과 다른 모습일까? 나는 같을 거라고 본다. 인격이나 지성과 무관하게 다 똑같은 병증을 갖고 있다.

― 사회적 약자들은 정신적·육체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공격하거나 혐오하는 일들이 늘고 있다.
약자들이 개별로 있으면 경쟁해야 하니까 그렇게 된다. 도시에서 개별화된 약자가 가난하게 되면 뼈도 못 추린다. 그러나 한곳에 모여 살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가난이나 약함은 일치의 힘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교회공동체로 함께해야 가난해질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는 거다. 다시 말해, 가난해질 용기가 없다는 것은 곧 내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다(요 15:5)는 뜻이다.

― 가난이나 약함이 일치의 힘이라니, 실제 공동체를 일구어 살면서 체험한 것인가?
물론이다. 하나님을 의지해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때 힘이 생긴다. 가난 없이 믿음을 얘기하는 거 자체가 불가능하다. 유대인들은 제일 중요한 말을 맨 먼저 하지 않나?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지금부터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의 모든 말의 총론은 이것이다’ 하며 선포하신 말씀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들의 것이요” 아닌가. 가난이 주는 유익이 실제로 많다. 물론, 혼자 가난하면 힘들다. 다 같이 가난해야 한다. 서로 평등케 하는 가난이 되어야 한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최소한의 조건으로 많은 이들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서로 나누는 가난이 되어야 한다. 어쩔 수 없는 가난이 아니라 스스로 가난에 처하는 삶, 결국 그것은 소유에 얽매이지 않는 삶인데 공동체를 이루며 살 때 가능해진다.

   
▲ ⓒ복음과상황 오지은

― 그간 공동체를 일구어오면서 돈의 부족함을 여실히 느끼셨을 텐데.
가난은 생명이 있다. 가난할 때 돈으로 해결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문제들을 돈 없이 해결한다. 공동체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모으면 힘이 생긴다. 십시일반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이런 모습 속에서 인간관계는 더 증진된다. 여기 (오두막공동체 내) 들꽃카페만 봐도 그렇다. 테이블, 의자, 천막 등 돈 주고 사온 게 하나도 없다. 직접 만들거나 누가 준 거다. 사람들은 노후보장, 비상사태를 대비한다고 돈을 모으면서 인간관계를 계속 단절한다. 자기가 가진 돈을 지키기 위해서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만 만나며 관계를 제한한다. 가난한 사람 만나면 부담스러우니까 피한다.

― 돈이 중요한 역할도 많이 하지 않나.
돈은 ‘뻐꾸기 알’과 같다. 뻐꾸기는 자기 둥지가 아닌 다른 새의 둥지에 몰래 알을 낳는다. 가장 먼저 깨어난 뻐꾸기 새끼는 아직 깨어나지 않은 다른 알들을 하나씩 둥지 밖으로 밀어낸다. 공동체 안에서 돈이 그렇다. 자기 외에 다른 생명들을 하나둘 파괴한다. 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지 않았나.

― 많은 교회가 돈 때문에 홍역을 앓는 이유도 그래서일까?   
교회도 하나의 인격체다. 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그 말씀은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고, 오늘로 치면 교회를 향해 하는 말씀이다. 그렇기에 교회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말씀이다. 그런데 교회는 선포자고 지키는 몫은 신자 개인에게 미루어버렸다. 오히려 교회가 그 말씀을 더 잘 지켜야 한다. 어떻게 보면 신자들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 교회만 지키면 된다. 이 말이 모순으로 들리겠지만, 지킬 수 없는 사람을 같이 품고 가는 게 교회니까, 교회만 지키면 된다는 뜻이다. 신자 개인은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감당할 수 없다. 교회가 그 가르침을 감당하며 개인들을 끌어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교회가 개인의 노후보장을 해주면 신자들은 얼마든지 무소유로 살 수 있다. 공동체는 그러한 책임이 있다. 각 개인이 하나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몸을 만들어주는 게 교회의 몫이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들은 어떤가? 오히려 돈의 논리에 끌려다닌다. 세인(世人)들보다 더. 

― 돈과 멀어질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기적 관계는 더욱 강화될 것 같다.
그렇다. 오두막예배당(“화해와 일치의 집”)을 지을 때도 돈을 거의 들이지 않았다. 우리 공동체 식구들끼리 지은 집이다. 사회적으로 ‘골칫거리’로 여겨지는 사람들, 장애인, 출소자, 중독자들이 이 집을 직접 지은 거다.

― 완공까지 7년이 걸렸다고 들었는데, 왜 그렇게 오래 걸렸나? 
우리 중 가장 느린 사람의 속도에 맞췄다. 가장 느린 사람의 속도가 곧 전체 공동체의 속도이다. 그러다 보니 7년이 걸렸다. (산 중턱에 집터를 다지는 데 5년, 공사에 2년이 걸려 2012년에 완공했다. -편집자) 공동체는 효율성을 따지면 안 된다. 효율성 따지는 순간, 병든다. 효율성의 노예가 되면 독재가 만들어지고 독재에 순응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무엇이든 빨리빨리 해야 하는 노예가 되고 만다. 조금 노력해서 더 많이 먹자는 도둑놈 심보를 ‘경제 원칙’ ‘효율성’이라는 말로 포장하는 세상에서, 오히려 가장 인간적이고 자연친화적인 것은 비효율적이다. 공동체를 통해서 우리 삶을 회복하려고 할 때, 속도와 눈높이가 관건이다. 가장 느린 자, 가장 낮은 자의 기준에 맞춰야 한다. 우리 예배당 벽을 보면 울퉁불퉁하다. 보통 벽 두께가 60센티미터인데 겨우 이삼십 센티미터밖에 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고쳐 짓지 않고 그렇게 흙을 바를 수밖에 없는 형제를 그대로 받아주듯, 그대로 살려서 지었다.

   
▲ 이재영 대표가 직접 포클레인을 조작해 목장 터를 만들도 있다 ⓒ복음과상황 이범진

― 집 지은 이야기를 더 자세히 듣고 싶다.
보시다시피 50평짜리 황토너와집이다. 재료는 흙과 돌, 전부 산에서 나는 것으로 했다. 나무는 산에서 가져와서 다듬었고, 서까래도 산에서 베어다가 만들었다. 창문 두 짝은 누가 선물해준 것이고, 다른 것은 강원도 태백 어느 교회당에서 가져온 것이다. 창틀을 가져오질 못해서 여닫을 수는 없다.(웃음) 저 바깥 처마밑 나무는 경남 창녕의 변전소 공장의 대형 발전기 포장하는 나무다. 기둥이며 널판이며 좋은 것들로 얻었다. 이 집이 50평이다. 평당 4백만 원 정도 잡아야 한다. 노동집약적인 집이라 업자들에게 맡겼다면 이 집을 짓는 데 2억 원은 들어갔을 거다. 그런데 그 10분의 1로 이 집을 지었다. 하나님이 특별히 돌봐주셨는지 흙집 치고는 균열도 거의 없고,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다. (2015년 공동체 자산을 공유화하기 위해 사단법인을 세웠는데, 당시 감정한 이 집의 가치는 약 1억 5천만 원이었다. -편집자)

― 공동체를 통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가.
우울증, 정동장애, 강박증, 저능, 알코올중독, 성중독 등의 문제를 가진 이들이 함께 어울려 살고 있다. 살인을 저지른 사람도 있다. 출소자, 중독자가 30% 정도 되었는데, 대부분 결혼하면서 회복됐다. 해마다 한 쌍씩 결혼해서 현재 세 쌍이 결혼했다. 한 부부는 알코올중독자끼리 만났다. 아니나 다를까 결혼 후 같이 술 퍼마셔서 1년 동안 고생했는데, 그 후로는 또 아주 좋아졌다. 지금은 공동체에서 아주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변화가 어떻게 가능해졌냐면, 같이 살며 영적인 부분을 서로 돌봐주고 그렇게 자존감을 올려줄 수 있는 상담 등을 통해서다. 아주 예쁘게 잘살고 있다. 기적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가족이 되어주어서 수시로 서로에게 ‘애프터서비스’ 들어간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발적으로 이뤄진다.

공동체가 다양성이 확보되면 자정능력이 생긴다. 성숙하는 성장력을 담보하게 된다. 유기성이 생기고 관계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교회는 교리나 관념으로 교인들을 획일화하니까 자정능력도 성장력도 생겨날 수 없다. 획일화되어 있으면서도 일치와 연합은 또 못한다. 신앙의 실체가 없는 것이다. 관념을 붙들고 신앙이니 믿음이니 하는데, 예수님께서 진리를 말씀하실 때,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고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알려주겠다”고 하셨다. 여기서 ‘실상’이라는 말은 ‘진리’라는 말과 같은 단어, 알레떼이아(αληθεια)이다. 오늘날 우리는 진리라는 말을 관념적으로만 알고 있다. 공동체를 통해서 우리가 시도하고 있는 것은 믿음의 실체화다.

― ‘믿음의 실체화’를 좀 더 풀어서 얘기한다면?
믿음은 항상 실체화되어야 한다. 히브리서에서는 ‘실상’을 ‘휘포스타시스’(υποστασις)라는 단어로 쓴다. ‘아래에 서 있다’라는 뜻이다. 예수님 아래에 서 있는 것이 곧 실상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곧 실상, 진리, 알레떼이아이다. 한국말로는 ‘실상’이지만, 예수님 아래에 서 있다는 말은 곧 말씀 아래 서 있다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소원의 실상이 아니다. 말씀을 실제로 살아낼 수 있는 그 실상이 곧 믿음이다. 믿음이 있다는 말은 말씀 곧이곧대로 살아낼 수 있음을 뜻한다. (물론, 문자주의자들이 정죄와 판단의 도구로 말씀을 이용하는 것과는 구별해야 한다.) 

― 예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레드레터 크리스천’의 삶이 호락호락하진 않은 것 같다. 어떻게 선의에 고소로 답하고, 생명을 위협했던 이들까지도 포용할 수 있나?
성경에 빨간 글씨로 쓰인 부분,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은 모호한 게 하나도 없다. 여러 상황에 직면했을 때, 빨간 글씨로 응대하며 살면 된다. 그 말씀이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으니 힘들다.(웃음)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는데,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원래 성격이 매우 급하고 독재적이다. 나의 선한 의지를 몰라주고, 오히려 훼방 놓는 사람들을 두들겨 패기도 하고 ‘맞짱’도 뜨고 그랬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재 그 자체로 타인을 받아들이기까지는 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했다. 앞서 말했듯 우리의 목표는 서로 같아지는 것이다.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낮은 데 두면서 같아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왜 그가 내게 이렇게 하도록 허용하셨지, 왜 이런 상황을 두셨지, 생각해보면 그가 나의 선생님이 된다. 그 모든 상황이 ‘너는 이 상황에서 어찌 복음적 답변을 할 것이냐?’는 질문인 거다. 그놈이 못된 놈이니 원수를 갚겠다? 그렇게 되면 내가 이 하나님의 실패를 증명하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이 나를 천국으로 안내하는 이정표였다. 내가 오늘 하는 말들도 전부 그들이 가르쳐준 것이다.

― 공동체 안에서는 한국사회 문제들이 더 심각하게 보일 것 같다. 특별히 ‘부익부빈익빈’ ‘약육강식’의 질서가 더 고착화되고 있다.
누구를 위해서 일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대한민국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세계 상위 30%에 속하게 된다. 그리고 대학 졸업 후 대기업에 취업하면 상위 10% 안에 들어가는 거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그런 혜택을 받으면서 하는 게 무엇인가? 모두 대기업에 취업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대기업 직원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소수의 몇 사람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의 고혈을 짜내는 일을 하지 않나.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다. 사람들을 유혹하거나 협박해서 돈을 짜내 주인들에게 바치는 역할이다. 무엇 때문에 그런 악한 역할을 하나? 미국의 문명비평가이자 농부 시인인 웬델 베리(Wendell Berry)는 경제구조가 이미 죄악에 물들었기에 “우리는 소비하는 것만으로도 죄의 공범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거기에는 기독교인들도 있을 터인데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 가난한 자들을 돌보라는 예수님의 부탁과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위 1%를 위해서 노예가 된다.

―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앞으로 ‘도시 난민’들의 시대가 열릴 것으로 보인다. 돈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도시에서 문제가 생기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도시 난민들을 맞아들일 수 있는, 이를테면 노아의 방주와 같은 공동체들이 전국 곳곳에 있어야 한다.

   
▲ 《오두막》표지 안쪽에 그려진 오두막공동체 ⓒ정영란

― ‘도시 난민’이라는 말이 무척 생소하다.
도시에 난민이 발생할 여지가 매우 많다. 이미 경쟁에서 밀려나 도시생활 자체가 불가능해진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지 않나. 여러 불안 요소들이 있다. 사회구조의 문제와 환경적인 재앙도 무시할 수 없지만, 내가 볼 때 사물인터넷도 우려스럽다. 스마트폰으로 모든 것을 다 통제할 수 있다. 도시 아파트들은 시한폭탄과도 같다. 도시가스로 휘감겨 있다. 사물 인터넷은 보안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편리해진 만큼 위험해진 거다.

― 그럼에도 사람들은 기술의 진보에 따르는 위협들을 잘 관리할 거라고 철석같이 믿는다.
문제는 우리의 영성과 정신력이 점점 쇠퇴한다는 점이다. 현실과 비현실을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증가하고 있고, 오늘날 상업에 이용되는 디스플레이 기술도 현실과 비현실을 혼합시켜 놓지 않나. 헷갈리는 세상에 살게 되었다. 상업은 그런 기술을 이용해서 소비욕구를 일으키고, 결국엔 혼란에 빠진다. 도시 환경은 점점 더 우리의 안전을 담보하지 못한다. 싱크홀이 최근에 많이 발견되고 있다. 북한은 어떤가?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북한의 무력은 우리가 일치와 화해를 추구하지 않고 계속 잘못을 저질렀을 때 우리를 징벌하기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몽둥이일 수도 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도시 난민’들이 일시적으로 또는 장기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환경이다.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농촌에 많은 땅을 확보해서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마을을 만들어야 한다. 도시 난민은 이미 존재한다.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자활 능력이 없는 난민들 있지 않나? 이런 사람들을 더 적극적으로 안전지대로 옮겨줄 필요가 있다. 안전한 장소에서는 술 좀 마셔도 괜찮다. 그러나 위험한 요소가 많은 도시에서 술을 마시도록 내버려두면 폭력, 살인 등의 사건으로 이어진다. 이런 약자들을 품어줄 공동체가 많아져야 한다.  

― 그런 공동체를 억지로 만든다고 만들어지는 게 아니지 않나.
공동체는 만드는 게 아니라 ‘심기는’ 것이다.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자라나는’ 것이다. 누군가 공동체에 관해 조언을 구하러 오면, 서두르지도 말고 망설이지도 말라는 말을 해준다. 의도적으로 자꾸 뭔가를 만들지 말라는 의미이면서, 망설이지 말라는 것은 그때그때 당면한 상황에서 충실하게 복음적 답변을 하면서 실행하라는 뜻이다. 인위적으로 해서 되지 않고, 성령의 이끌림이 있어야 한다. 어떤 이상적인 집단을 따라 하는 것은 허깨비, 우상이다. 참고사항이 있을 뿐이지 저마다의 고유한 몸(공동체)을 만들어 가야 한다.

공동체를 만드는 게 하나의 일(목적)이 되면 사람이 눈에 안 보인다. 사람이 눈에 안 보일 정도로 일하면 안 된다. 주변 사람에 관심을 기울이며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뭔가를 너무 열심히 하면 안 된다. 주위를 충분히 돌아볼 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 꽃이 피고 지는지, 별이 뜨고 지는지 만물과 교감하면서, 옆에 있는 이가 기쁜지 슬픈지 느껴가면서 살라는 말이다. 공동체 안에서 이렇게 살다가 보면, 충만한 삶이 된다. 한 몸으로 자라가는 것이다. 홀로 황홀함에 빠지는 게 신비가 아니라, 이런 게 진짜 신비다. 

― “너무 열심히 하지 말라”는 말, 매우 낯설다.
우리 공동체 식구들에게도 자주 하는 말이다. 너무 열심히 하지 말라고. 작은 일이어도 소중하게 여기며 충실하게 임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리가 일하는 이유는 행복을 위한 것이다. 행복하지도 않은데 ‘열심히’만 하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서로 좋은 관계를 만들기 위해, 행복에 이르기 위해 일하는 것이다. 열심을 부리며 일의 속도를 내는 이들이 말하길, 혼자 하는 게 차라리 낫겠다고 한다. 안 된다. 천천히 가야 여유가 생기고 주위를 둘러볼 수 있게 되고, 그래야 일의 내용이 충실해지고 서로 돕는 관계가 맺어진다. 일을 하는 가운데 지극히 작은 이들도 도와야 할 계기들이 발견되니 같이 성숙하게 되는 거다. 일이야 늦어도 상관없다. 우리는 행복하면 되고, 같이 성숙해가는 거다. 일의 성과 여부보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성숙하는 게 더 중요하다. 성장하기 위해서 같이 사는 거다.

― 많은 장점이 있지만 공동체를 이루고 살면 개인의 자유가 제한될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다.
함께 사는 공간은 사적이면서도 공적이어야 한다. 공동 생활공간과 사적 생활공간이 조화롭게 되어야 한다. 그래서, 마치 시설이나 합숙소처럼 한 건물에 모여 사는 집을 만들지 않고 아무리 허름해도 개인 방, 개인 텔레비전까지 마련해주고 있다. 최소한 부부싸움을 해도 금방 소문이 나지 않을 정도의 거리는 확보되어야 한다. 우리 공동체처럼 2킬로미터 정도의 길을 두고 사이사이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는 형태가 좋다고 생각한다.

▲ 오두막 (이재영 지음, IVP 펴냄)

― 공동체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해주는 실질적인 조언이 있나?
먼저 살 곳을 정해야 하는데, 쓸모없는 땅을 사야 한다. 개발 가능성이 도저히 없어 무공해지역으로 계속 유지될 땅이 가격도 저렴하다. 그런 땅이어야 영적으로 좋은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젊은이들이 땅값 오르기 전에 땅을 많이 확보했으면 좋겠다. 시골 땅값도 이제 금세 오른다. 땅투기꾼들이 더 투자할 곳이 없으면 그 자본들이 어디로 흐르겠나. 이 땅 저 땅 사들이기 시작할 거다. 그 전에 우리가 넓은 면적을 확보해야 한다. 촌각을 다투는 일이다. 지금 도시 전세보증금이 약 5천만 원이라고 하면, 평당 5천 원짜리 땅 1만 평을 구입할 수 있다. 이건 투기가 아니다. 보호다. 사실 땅값보다 땅 위에 있는 것이 훨씬 가치가 있다. 나무, 산나물, 짐승, 돌 등 많다. 우리 공동체가 자리잡은 산만 해도, 송이버섯도 나고, 아름드리 소나무도 있다. 산은 보고(寶庫)다. 생존의 문제가 발생할 때 산은 생명을 공급해준다. 그래서 반드시 산을 사야 한다. 산 옆에 논밭이 있으면 더 좋다. 많은 돈이 필요 없다. 집을 미리 지을 필요 없다. 폐가를 빌려 대충 고쳐 살면 된다. 우리처럼 산을 사고, 거기에 길을 내고 중간중간 사람들이 집을 지어 살고, 의식주를 직접 해결하는 패턴의 삶을 만들어가야 한다. 안 그러면 소비에만 의존하게 되어 자본주의의 큰 파도에 휩쓸릴 수밖에 없다.

― 공동체의 ‘게토화’와 ‘폐쇄성’을 우려하기도 한다. 
공동체는 섬이 되면 안 된다. 섬은 또 하나의 분파주의가 된다. 함께 마을을 만든다고 생각해야 한다. 지금 옆 마을에서는 우리 마을을 부러워한다. 단순한 논리다. 급할 때 우리 식구들이 마을 사람들의 농사를 돕기 때문이다. 요즘 농촌에서 돈 주고도 일할 사람을 못 구하는데, 우리 식구들이 돈 한 푼 받지 않고 일손을 돕는다. 이를테면 갑작스레 비가 와 쌓아둔 양파를 거두어야 할 때, 노인들은 하기 힘들고, 우리 식구들이 출동해서 피해를 최소화한다. 처음 이 마을에 왔을 때는 건물 안에 ‘오두막예배당’이라는 간판을 붙인 것으로 시비를 걸었던 사람들이 지금은 함께 예배를 드린다. 이 지역에 와서 8년 동안 예수의 ‘예’ 자도 안 꺼냈는데 10명이 세례를 받았다. 이런 게 선교 아닌가?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치러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 말씀을 듣다 보니,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생각이 든다.
‘내 몸을 기억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너, 나, 우리가 한 몸이라는 뜻이다. 교회 생활과 공동체는 사실 다른 게 아닌데, 오늘날 교회가 전혀 한 몸으로서 기능하지 못하고, 천국 가는 시험의 족집게 강사 정도로 전락해버렸다. 교회가 교회 되게 하는 것이 공동체 생활이다. 그리스도의 몸 밖에는 구원이 없다. 몸 밖의 ‘개인 구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곧 타인과의 ‘관계있음’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해답이 이미 공개된 시험을 치르는 것과 같다. 저마다의 상황에 부딪혔을 때 예수님께서 가르쳐준 (성경의) ‘빨간 글씨’로 응답하면 된다. 주어진 답대로 살면 된다. 그렇게만 하면 생각지도 못했던 의외의 일이 벌어진다. 예수님은 그것을 ‘감춰진 보물’ ‘보이지 않는 보물’이라고 한다. 우리는 보물 지도를 보며 보물을 찾아가듯, 삶의 대소사에 복음적 답변을 해나가며 보물을 찾는 것이다. 그런데 보물은 눈으로 보이지 않고, 미리 정해놓고 찾을 수도 없다. 그런 보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허상이다. 보물은 제 밭도 아니고, 남의 밭에 있다. 남의 밭을 경작해야 그 속에서 보물을 찾을 수 있다. 보물은 남의 마음 밭에서 발견된다. 그러니 관계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내 앞에 나타나는 사람들이 다 예수님(보물)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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