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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에 나타난 우주와 세상 창조에 대한 이해 2

기사승인 [309호] 2016.07.27  16: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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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9호 거꾸로 읽는 성경]

   
 

3. 창세기와 우주 창조

2) 구약과 창조 신앙, 하나님 나라
창조 신앙은 우리의 근본적인 신앙 고백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온 세상을 지으셨다. 이러한 신앙 고백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글에서는 실제로 구약 성경과 이후의 역사에서 창조 신앙이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으로 대답을 모색해 보려고 한다.

고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말 그대로 세상을 지으셨음을 굳게 확신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창조를 통해 그들과 그들이 살아가는 고난 가득 찬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 무엇보다도 구약 성경의 가장 첫머리에 놓인 창세기 1~2장은 힘 있는 열방의 통치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왕적인 존재이며, 노동을 통해 그 통치를 구현하는 존재임을 강력하게 선포한다. 이 본문은 우주와 인간에 대한 고대인의 지식을 매개로 하여 하나님과 그분이 지으신 인간에 대한 영원한 진리를 선포한다.

구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우주 창조에 관한 본문들도 본질적으로 이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구약에서 우주와 천지만물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는 본문의 대체적인 특징은 시(詩) 혹은 시 형식으로 배열된 기도, 축복, 저주, 선포라고 할 수 있다(가령 창 49:25; 신 33:13~16; 수 10:12; 삿 5:4~5; 욥 3:3~9; 9:5~10; 36:26~33; 37:1~13; 38:1~41:34 등).

우주 창조를 언급하는 문학 형태가 시라는 점은 구약에서 우주 창조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위엄을 강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역할을 통해 절망과 체념 속에 살아가는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다가올 궁극적 변화의 날을 소망하고 꿈꾸게 한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다음에서 살펴볼 것은 그 무수한 예들 가운데 몇 가지에 해당한다.

① 시편 8편
시편 8편은 창세기 1장을 시로 풀어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의 창조를 아름답게 노래하는 본문이다. 8편 자체에서는 애매하지만, 8편이 놓인 자리를 고려하면 이 시는 고난 가운데 부른 창조 찬양이라 할 수 있다. 시편 기자는 많은 대적에 둘러 싸여 있으며(3편), 사람들로 인해 욕을 뒤집어쓰고(4편), 신실함이 없는 원수들로부터 건져 주시기를 갈구한다(5편). 자신이 마치 사망 중에 처한 것 같은 곤고함을 느끼며(6편), 사자 같이 물어 찢으려고 분노하는 이들 가운데 놓여 있다(7편).

8편은 이러한 현실을 일러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 같은 자신과, “원수들과 보복자들”로 표현되는 대적들로 대비하면서(8:2), 온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그 손가락으로 하늘과 달과 별을 만들어 하늘의 궁창에 고정하셨다고 표현한다(8:3). 하나님께서 베푸신 모든 우주를 볼 때, 시편 기자는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주신 영광과 존귀가 참으로 큼을 깨닫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환난 가운데 있는 시편 기자에게,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은 위로와 찬양의 근거이다.

② 시편 148편
세상과 우주의 모든 피조물들을 호출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명령하는 이 시편은 고대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하늘의 하늘” “하늘 위에 있는 물들”(148:4) 그리고 땅과 땅 속에 있는 ‘깊은 바다’(“테홈”, 148:7)가 시편 기자가 생각하는 세계다. 야훼께서 명령하시므로 이 모든 세계가 지음 받았고, 그분이 이들을 영원히 세우셨으며 폐하지 못할 명령으로 정하셨다고 선언된다(148:5~6). 이 시편에는 용들과 바다 같은 고대 괴물도 호출되며, 불과 우박 같은 자연 현상뿐 아니라 짐승과 가축, 기는 것 같은 생명체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왕들과 고관들과 총각과 처녀, 노인과 아이까지 여호와 찬양에 호출된다.

이처럼 구약에서 자연 현상이나 우주, 천문이 언급되는 기본적인 맥락은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한 찬양이다. 특히 148편은 146편부터 150편에 이르는 시편집의 마지막에 놓인 할렐루야 찬양 가운데 하나다. 이 마지막 다섯 시편들은 시편집 전체의 결론부에 위치하면서 탄식과 신음으로 가득 찬 현실 속에서 야훼 찬양을 강력하게 선언한다. 그리고 야훼를 찬양하라는 할렐루야 마무리가 가능한 근본적인 까닭은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 즉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다.

시편집의 마지막 다윗 시편인 138~145편의 중심 내용은 다윗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사람의 고난 받는 현실이며, 그에 대한 대답은 144편과 145편에 있는 왕의 통치 그리고 그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다스리심이다.

할렐루야 시편이 시작되는 146편 역시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 도움과 소망으로 삼은 이의 복을 언급하면서(146:5), 마지막 절에 ‘야훼 즉위 시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야훼께서 다스리신다’는 선포가 나온다(시 146:10). 146:6~9은 왕이신 야훼의 통치를 표현하는데 145:18~19의 내용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시 146:6~9)

그러므로 하나님의 왕 되심이야말로 시편의 마지막 부분이 도달한 지점이며, 시편 찬양의 본질이다. 시편의 이러한 흐름은 시편 전체를 왕 되신 하나님께 드리는 성도들의 찬양으로 이해하게 한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대한 묵상과 찬양은 온 땅 가운데서 왕으로 좌정하셔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기대와 고백, 찬양을 본질로 한다. 천지와 바다와 그중의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은 억눌린 사람들을 위한 정의의 심판, 갇힌 자들에게 베푸시는 자유, 의인들과 나그네,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보호하심에 대한 고백과 직접적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시편의 창조 찬양은 지극히 신학적이다. 148:3~6에서 보듯, 고대 이스라엘의 우주 이해에 기반하여 우주와 하늘을 묘사하면서, 하나님의 왕 되심과 통치를 선언하며 찬양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시편집이 최종적으로 형성된 주전 2~1세기 사람들을 향해 우리가 지닌 시편은 온 우주를 바라보고 온 천지를 바라보며 결코 세상의 왕들에게 굴복하고 세상 질서 안에서 체념할 것이 아니라, 왕이신 여호와를 기다리고 사모하며 찬양하라고 선포한다. 148:5절은 야훼께서 명령하시니 온 우주와 천지가 ‘창조되었다’고 증언한다는 점에서 이 시편이 창세기 1장을 염두에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창세기 1장은 고대 이스라엘에게 온 땅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 하나님의 왕 되심에 대한 찬양으로 이해되고 고백되었다.

이를 생각하면, “하늘의 하늘”과 “하늘 위에 있는 물들”에 대해 과학적 증명을 시도하려는 것은 온당치 않다. 이 본문을 보면서 “해와 달”을 향해 찬양을 명령한다 하여, 오늘 우리는 해와 달이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생명체라고 증명을 시도하지 않을 것이며, “불과 우박과 눈과 안개”에 대해서도 그런 시도를 하지 않을 것이다.

7절은 “용들과 바다”를 호출한다. “용”으로 번역된 히브리말은 “탄닌”이고, “바다”는 “테홈”이다. 탄닌은 구약에서 종종 언급되는 태곳적의 괴물이되(욥 7:12; 시 74:13; 사 27:1; 51:9),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로 언급된다(1:21). “테홈”은 땅 아래 있는 바다(창 7:11; 8:2; 49:25; 신 33:13; 욥 38:16; 잠 8:28)를 가리키며, 땅 아래 있는 바다인 테홈 위에 산들이 뿌리를 내린 것으로 표현되기도 한다(시 104:6; 잠 8:27).

무엇보다도 테홈은 창세기 1장에서도 언급되는데(1:2), 이는 “용들과 바다”를 호출(148:7)하는 이 시편이 창세기 1장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본문이 탄닌과 테홈이라 불리는 어떤 태곳적의 존재를 입증하는 본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구약에는 이뿐 아니라 “레비야탄”과 “라합”에 대해서도 언급되지만, 이를 들어 이들 괴물의 존재를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와 심판이 결합되어 있다는 점은 시편 곳곳에서도 발견된다. 시편 가운데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는 선포를 지닌 몇몇 시들이 있고, 이들을 가리켜 ‘야훼 즉위 시편’이라 부른다. 이스라엘의 신앙은 앞에서 언급했던 혼돈의 괴물(얌·레비야탄·탄닌·라합 등)과의 싸움이라는 고대 세계의 신화적 이미지들을 이용하여 온 우주의 왕이신 야훼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통치의 견고함을 노래한다. 그분은 혼돈과 무질서 속으로 역사를 이끌어가려는 위협적인 권세들을 제압하시고 승리 가운데 좌정하신다.

이러한 야훼 즉위 시편들은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왕 되심이라는 주제와 더불어, 그의 나라가 종국에 온 땅에 임하게 될 것을 바라본다. 다시 말해 이러한 시편들은 종말론적인 전망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이러한 시편들에서 심판하시러 오시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나타난다. 창세기 1:21에서는 아예 그 “탄닌”을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로 언급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온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주권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렇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내용일 텐데, 이 시들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모든 나라 가운데에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가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리라 할지로다”(96:10)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96:13)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렀고 의와 공평이 그의 보좌의 기초로다”(97:1~2)

“저가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로다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98:9)

이 시들이 언급하는 내용은 앞에서 살펴본 바, 시편 146:6~9에 나오는 찬양과 매우 흡사하다. 천지와 바다와 온 세상을 불러내 하나님을 노래하는 시들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재판장으로 온 세상에 임하시는 하나님이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는 외침이 없어서 야훼 즉위 시편으로 분류되지 않는 94편에도 이 점은 일관된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세상의 재판장이라 부르고 있으며(94:2), 이 시에서 주의 백성, 주의 소유인 이들은 과부와 나그네, 고아와 동일시된다(94:5~6). 여호와께서 그의 소유요 백성인 이들을 버리지 아니하시니(94:14), 그의 재판은 의로 돌아간다(94:15).
이 점이야말로 이 시들이 노래하는 재판과 통치의 구체적인 내용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구절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통치와 연결하여 이해되지 않으면 그 핵심적인 의미를 잃게 된다.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외치고 밭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 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96:11~12)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소리 내어 즐겁게 노래하며 찬송할지어다 수금으로 여호와를 노래하라 수금과 음성으로 노래할지어다 나팔과 호각 소리로 왕이신 여호와 앞에 즐겁게 소리칠지어다”(98:4~6)

아울러 다음과 같은 찬양 역시 하나님의 통치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임이니이다 (셀라)”(67:3~4)

하나님의 심판은, 모든 불의를 극복하시며 억압받는 자를 신원하시는 왕이신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의 행사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노래하는 야훼 즉위시편들에는 야훼께서 행하실 공평과 정의, 진리에 대한 언급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기도 하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 백성들의 찬양의 내용이다.

성경의 구절들에서 과학적인 힌트를 얻을 수도 있겠고, 주어진 현상을 달리 바라볼 수 있는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다. 성경 구절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지 생각하고 연구하는 것도 그 자체로 완전히 틀린 방법이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라는 점에서, 이 핵심적인 메시지를 위해 구약 기자들이 그들 시대의 가치관(가령, 종과 여자에 대한 언급들)과 우주관을 사용한 것을 두고 마치 그것도 본질적인 진리의 하나인 양 판단한다면 그것은 본문 자체를 도리어 파괴하는 결과가 되고 말 것이다. 창조과학이 구약 본문을 과학적으로 다루기 위한 문자적 접근이었다면, 노예제 찬성과 여성 안수 금지, 독재 권력에 대한 순종 등은 성경 본문이 지닌 사회적 문화적 가치관에 대한 문자적 접근이라 할 수 있다.

이와 연관해 우리는 공동체와 더불어 본문을 다룰 때 본문이 반영하는 시대적 상황과 사고방식, 전제가 되는 틀 같은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다. 누가 보아도 명백히 시대적 상황에 대한 반영이라 여겨질 것이 있는가 하면, 그렇게 판정하기 애매한 것들도 많다.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신구약 성경의 모든 본문에 대해 본문이 전하는 메시지와 그것을 전달하기 위한 ‘매개’(medium)를 구분하기 위해 끊임없이 토론하고 논의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이 그러한 ‘매개’ 부분은 버려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대개의 경우 구약 성경이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매개는 ‘역사’다. 이를 통해 구약의 가르침과 선포가 허공 중에 있는 추상적 진리가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실제 현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나 그러한 매개가 보편타당한 진리일 수는 없을 것이다. 가령 레위기 25장의 희년법은 땅과 노동의 해방을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오늘 21세기 자본주의 체제에서 더 이상 우리의 삶은 토지 자체에 매여 있지는 않다. 그 점에서 희년법은 가난의 대물림 방지와 공동체적인 책임이라는 본질적인 메시지가 오늘 우리 시대의 상황에 적용되어야지, 이것을 문자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물며, “하늘의 하늘”과 “하늘 위에 있는 물들”은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③ 아모스
주전 8세기 이후 예언자들의 외침에서 드물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고백을 아모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점은 아모스 첫머리에 놓인 “지진 전 이 년”(1:1) 언급과 연관된다.

아모스서 곳곳에 지진 현상을 연상케 하는 표현들이 있다. 무엇보다, “땅이 떨지 않겠으며 그 가운데 모든 주민이 애통하지 않겠느냐 온 땅이 강의 넘침 같이 솟아오르며 애굽 강 같이 뛰놀다가 낮아지리라”(8:8)는 언급은 이러한 지진 현상을 가리킬 것이다. 이렇게 땅이 솟아오르니, 상아궁들이 파괴되고 큰 궁들이 무너지며(3:15), 여호와의 명령으로 타격을 받아 큰 집은 갈라지고 작은 집은 터질 것이며(6:11), 곳곳에 시체가 많을 것이고(8:3), 제단 곁의 기둥머리와 문지방이 움직이니 건물이 무너져 많은 사람이 죽게 될 것이다(9:1).

아모스서에는 예언서들에서 잘 볼 수 없는, 온 천지를 뜻대로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여러 차례 나오는데, 이 역시 지진 현상과 연관하여 땅과 바다를 뜻대로 좌우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알리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보라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이는 그의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시니라”(4:13)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을 아침으로 바꾸시고 낮을 어두운 밤으로 바꾸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이를 찾으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시니라”(5:8)

앞서 살펴보았던 8:8과 유사하면서도 확장된 다음 구절은 이 점을 훨씬 더 명확하게 선언하고 있다.

“주 만군의 여호와는 땅을 만져 녹게 하사 거기 거주하는 자가 애통하게 하시며 그 온 땅이 강의 넘침 같이 솟아오르며 애굽 강 같이 낮아지게 하시는 이요 그의 궁전을 하늘에 세우시며 그 궁창의 기초를 땅에 두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이니 그의 이름은 여호와시니라”(9:5~6)

천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당신을 떠나 자신들의 부귀영화에 취해 가난한 자들을 짓밟는 이들이 서 있는 땅을 솟아오르게 하실 것이며 그들의 모든 것이 무너지고 파괴되게 하실 것이다. 아모스서에서 소돔과 고모라가 언급(4:11)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 역시 가난한 자를 짓밟아 그 부르짖음이 하늘에까지 올라가게 만들었고(창 18:20~21; 19:13, 참고. 렘 23:14; 겔 16:49),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뒤집어 버리시듯이(창 19:15), 이스라엘을 뒤집어 버리실 것이다(암 4:11).

소돔과 고모라에 쓰인 ‘뒤엎는다’는 히브리말 동사(“하파크”)가 아모스서에서 다섯 번(4:11; 5:7, 8; 6:12; 8:10) 쓰이기도 했다(소선지서의 경우 호 7:8; 11:8; 욜 2:31; 욘 3:4; 습 3:9; 학 2:22에도 쓰였다). 그러므로 아모스서의 지진은 불의를 행하고 하나님을 떠나 그 모든 영광을 세우고 교만한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낸다. 그들은 세웠고, 하나님은 무너뜨리신다.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자랑하고 교만하였으되, 온 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땅을 만지시니 그 땅이 솟아올라 모든 자랑과 영광을 낮추어 버리신다.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과 확신이 온 땅에 가득한 죄에 대한 심판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아모스에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은, 가난한 자를 짓밟고 불의가 횡행한 현실과 절기와 제사의 풍성함이 공존하는 현실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들은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5:7)이었다. 여기에서 ‘바꾸다’로 번역된 단어가 앞에서 본 ‘(소돔을) 뒤엎다’에 쓰인 단어다(5:7 해설을 참고하라). 이스라엘이 정의를 뒤엎어 버리니, 하나님께서는 지진으로 이스라엘을 뒤엎어 버리실 것이다. 낮을 어두운 밤으로 바꾸시는(5:8) 창조주 하나님은 땅을 만지셔서 모든 것을 무너지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주를 향한 신앙고백은 정의와 공의를 내던져 버린 그 땅의 죄악에 대한 심판과 연결된다. 아모스서는, 천재지변을 겪을 때에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손길을 돌아볼 것을 촉구한다.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 여호와 신앙과 권력이 결탁하여 예배와 종교 의식은 넘쳐나는데 세상 가운데 가난한 자의 고통은 커져만 가고 있지는 않은지, 제사는 풍성한데 정의와 공의는 내던져 버리지 않았는지 돌아보게 한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불의한 세상을 뒤엎어 버리실 것이다.

④ 무로부터의 창조
흔히 하나님의 창조는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라고 고백된다. 그렇지만 구약 성경에는 이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을 언급한 가장 오래된 문서로는 주전 2세기 후반에 쓰여진 마카베오 하서를 들 수 있다.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의 박해로 순교를 목전에 둔 어머니와 일곱 형제의 순교 장면을 다루고 있는 7장에서, 이 어머니는 죽어 가는 아들들을 격려하는데 이 가운데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언급이 있다.

“너희가 어떻게 내 배 속에 생기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준 것은 내가 아니며, 너희 몸의 각 부분을 제자리에 붙여 준 것도 내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생겨날 때 그를 빚어내시고 만물이 생겨날 때 그것을 마련해 내신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자비로이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 너희가 지금 그 분의 법을 위하여 너희 자신을 하찮게 여겼기 때문이다”(가톨릭성경 마카베오하 7:22~23).

마지막으로 막내아들이 남았을 때에도, 이 어머니는 아들에게 순교를 격려한다.

“얘야, 너에게 당부한다. 하늘과 땅을 바라보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살펴보아라.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미 있는 것에서 그것들을 만들지 않으셨음을 깨달아라. 사람들이 생겨난 것도 마찬가지다. 이 박해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형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죽음을 받아들여라. 그래야 내가 그 분의 자비로 네 형들과 함께 너를 다시 맞이하게 될 것이다”(가톨릭성경 마카베오하 7:28~29).

이 부분에서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사용된다. 주목할 것은 이러한 고백이 박해와 순교의 맥락에서 등장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창조와 무로부터의 창조는 핍박과 박해를 직면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크나큰 위로와 격려가 된다는 것이다.

4. 맺음말

창조에 관한 대다수 본문이 시의 형태를 취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창조가 이스라엘의 찬양의 중심 주제였음을 보여준다. 물론 이것이 창조에 대한 본문이 모두 비유이며 상징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온 세계가 삼층 구조로 이루어졌고, 이 모든 세상을 하나님께서 질서 있게 창조하셨음을 글자 그대로 믿었을 것이다. 그것이 구약의 기반이 되는 고대적인 세계관이다.

이스라엘은 그들이 살아온 역사 안에서 쉽지 않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겪을 때마다 이러한 고대적 세계관 안에서 하나님의 우주와 세상 창조를 기념하고 노래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노래하면서 온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깨달았고 세상에 존재하는 그 아무리 광대한 세력이라 할지라도 창조주 하나님의 행하심 앞에 무너지게 될 것임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찬양은 여호와의 주권과 통치에 대한 찬양이며, 참담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견디고 버티며 걸어가는 힘이 되었다.

구약에 나타난 창조 이야기는 구약 백성들이 살아간 역사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그 점에서 역사를 공부하는 것과 창조에 주목하는 것은 실제로 그리 다르지 않다.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그 어떤 강력한 세력도 결코 영원할 수 없음을 배우는 것이다. 구약 예언서들은 철저하게 당시에 실제 일어난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 구약 예언은 허공 중에 선포된 추상적이고 ‘영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실제의 현실 속에 일어나는 강력한 제국과 그로 인해 고통 당하는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예언들은 제국을 영원한 실체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 아무리 보잘것없어 보여도 하나님의 백성은 반드시 회복될 것이며, 그 모든 변화의 원천에는 온 땅을 창조하시고 지탱하시며 주관하시는 야훼 하나님이 계심을 선언한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현재 존재하는 땅의 세력에 좌우되지 않고, 그 세력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상상하고 기대하는 것이다.

구약 예언이 ‘역사적’이라는 것이 실제 일어난 일을 고스란히 묘사하고 설명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구약 예언은 그런 ‘역사책’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과학책’도 아니다. 역사에 기반을 둔 구약의 창조 이야기와 예언은 실제 현실 속에 존재하는 강대국의 패배와 붕괴, 역사 안에 살고 있는 구체적인 사람들의 궁극적인 변화와 회복을 꿈꾸고 기대한다는 점에서 ‘역사적’이다. (끝)   

 

김근주
학부에서는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신학교에 가게 되었과 결코 상상해본 적 없는 목사가 되었다. 예언자들이 외치는 심판뿐 아니라 회복의 메시지야말로 예수께서 이 땅에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알짬임을 깨닫고, 이를 연구하고 준행하고 가르치며 살기를 소망한다. 소망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는 연구나 준행, 가르침 모두에서 '서우적거리는 중'이다. 서울대, 장로회신학대학원,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소예언서 1: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특강 예레미야》 《이사야가 본 환상》 《느헤미야 팟캐스트 1: 세습 목사, 힐링이 필요해?》(공저) 등을 썼다.

김근주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전임교수 goscon@goscon.co.kr

<저작권자 © 복음과상황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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