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호 무브먼트 투게더] 기독 활동가들의 상하이 지아싱 탐방 이야기

   
▲ 상하이의 대표적 관광지 와이탄. 찬란함 속 그림자는 어느 곳에나 있기 마련이다. (사진: 상해 역사기행팀 제공, 이하)

기독 활동가들이 상하이 역사기행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일상으로부터의 탈피와 극복이 필요해 여러 만남과 사건에 나를 내던지고 있던 4월 어느 날이었다. 삶의 경험치를 높여 줄 이벤트가 찾아온 것이다. 낯선 사람, 낯선 경험을 원했기에 누구와 가는지, 가서 뭘 하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오랜 고민 없이 참여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마지막 팀원으로 상해 역사기행팀에 합류하였다.

무작정 참가했는데, 탐방 기획안에 적힌 취지가 날 숙연케 했다. (무려) 대한민국의 뿌리를 찾아 선열들의 정신을 들여다보고, 건국 100주년을 앞두고 평화와 통일에 대한 방향을 그리겠다는 것이었다. 어머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기획안에 있는 글을 그대로 옮기자면 “1910년 한일병합으로 대한제국이 주권을 상실하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1945년 해방과 동시에 분단의 아픔을 겪었던 역사적 사건들을 배경”으로, 팀원 몇몇이 주축이 되어 2015년에 한반도 화해와 평화를 위한 통일기도회를 개최했고, 지난 2017년 6월 3일 두 번째 통일기도회를 진행한 바 있다. 그리고 통일기도회의 후속으로 한빛누리 민족화해사업팀이 주관해 3박 4일간 임시정부의 루트를 찾아 떠나게 된 것이다.

단톡방에 초대되어 다른 팀원들과 어색하고도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함께하는 인원은 사랑누리교회 김정태 목사님, 한빛누리 박영춘 팀장님, 새벽이슬 임왕성 목사님, 청어람 오수경 간사님, IVF 최삼열 간사님, 안성영 간사님, 김민영 간사님 그리고 나까지 8명이었고, 출발 전 두 번의 사전모임을 가졌다. 각자 상해를 가게 된 배경과 기대감을 나누고, 역사기행의 취지와 일정을 공유했다. 그리고 백범 김구 선생의 다큐멘터리 영상과 김산의 책 《아리랑》, 이만열 교수님께서 김구, 윤봉길, 임시정부의 역사에 대해 정리해 만들어주셨다는 가이드북을 사전 자료로 학습했다. 점점 실감이 났다. 떠나는구나, 한번 꼭 가고 싶었던 상해로. 역사 속으로.

   
▲ 푸동 공항에서


둘째 날.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윤봉길 기념관 (루쉰공원)첫째 날. 출발
6월 12일 월요일 오전 10시. 인천공항 출국장에 모였다. 사실 이틀 전 나는, 친구에게 프랑스 자수 강습을 받으며 기행 팀원들에게 줄 네임텍을 만들었다. 기행의 취지에는 ‘기독 활동가들의 연대를 깊이 다진다’는 목적도 있었기에 3박 4일간 동행할 팀원들을 영접하는 마음으로 한 땀 한 땀 자수를 놓았고, 탑승 전에 선물을 나누어드렸다. 다행히 좋아하시며 가방에 달아주시니 뿌듯함과 감사함으로 마음이 활짝. 상해까지는 두 시간, 한국과 시차는 한 시간. 푸동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역사의 시곗바늘을 돌리듯 손목시계를 뒤로 돌려 맞추었다.

승합차를 타고 이동, 해가 질 무렵 와이탄에 도착해 잠깐 산책하며 사진을 남겼다. 와이탄은 현재 상하이의 대표적 관광지로, 황푸강을 따라 유럽풍 웅장한 건축물들이 모여 있어 ‘세계 건축 박물관’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덕분에 낮에나 밤에나 풍경이 아름다운데 유람선과 고층 건물의 전망대를 통해 감상하는 야경은 정말로 근사하다. 한편 멋진 건물들과 야경이 만들어진 데에는, 아편 전쟁 패배 후 개항한 상하이에 19세기 중반부터 외국인들이 건물을 짓고 살기 시작했고 일부 지역에는 중국인의 출입이 금지되기도 했다는 아픈 사연이 있다고 한다. 찬란함 뒤의 그림자는 어느 곳에나 있기 마련인가보다.

저녁 식사 후 한인들이 모여 있는 동네의 숙소로 이동했다. 일상(야근) 탈출에도 적응하고, 설렘과 긴장의 진폭에도 적응하느라 모르는 사이 체력이 떨어졌는지, 씻고 눕자마자 숙면을 취했다.

6월 13일 화요일.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지하철을 타고 ‘대한민국임시정부’로 이동했다. 10호선 롱바이신촌역에서 신천지역까지 20분 정도 걸렸다. 선두 박영춘 팀장님의 걸음을 따라 5분쯤 걸었을까. 작은 상점들을 지나다 들어간 골목의 안쪽, 대한민국임시정부 건물에 다다랐다. 아, 이곳이구나! 붉은 벽돌 사이 임시정부의 현판들을 어루만지다 사뭇 경건해진 마음으로 내부로 향했다. 잠시 홍보영상을 시청하고, 본격적으로 임시정부 유적지를 관람했다. 상하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 이후, 요인(要人)들이 가장 오래 머물며 활동했던 곳이다. 우리가 방문했던 유적지는 임시정부가 1926년 7월부터 1932년 4월까지 사용한 유서 깊은 장소로, 1993년과 2001년 두 차례에 걸쳐 복원·보수했다고 한다. 3층 건물에 김구 선생과 요인들의 집무실, 회의실, 숙소와 부엌, 화장실이 있고, 사진과 자료들이 전시된 공간도 있다.

   
▲ 임시정부 유적지 앞에서

임시정부 청사는 생각보다 작고, 평범했다. 조국에 발을 딛지 못하고 먼 땅에서 자주독립을 염원하며 불편과 외로움을 감내했을 것이다. 김구 선생 중심으로 조직한 비밀결사대인 한인애국단은 그 열악함 속에서도 단원들의 투지와 희생으로 독립운동의 성과를 이루어냈다. 1932년 1월에는 동경에 잠입한 이봉창 단원이 일본 국왕 히로이토에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국왕 살해에 실패하고, 그는 10월 사형에 처해졌다. 또한 1932년 4월에는 윤봉길 단원이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거행된 한 기념식에 잠입하여 단상에 폭탄을 던졌다. 일본군 대장 등을 즉사시키는 거사를 치르기도 했다. 임시정부 전시실에는 이봉창, 윤봉길 두 단원이 한인애국단 입단 후 선서문을 목에 걸고 태극기 앞에서 수류탄을 들고 찍은 사진과 의거 직후 체포되는 사진이 나란히 걸려있다. 활짝 웃고 있던 이봉창 단원과 단연하면서도 담담한 표정의 윤봉길 단원. 사진 속 두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다시 지하철을 타고 루쉰공원(옛 홍커우공원)으로 이동했다. 윤봉길 기념관이 있는 곳이다. 공원 안 키 큰 나무와 연못을 지나 쭉 들어가면 매헌 윤봉길 의사 생애사적 전시관이 나온다. 기념관 앞마당에는 윤봉길 의사의 일생이 기록된 안내판이 있다. 유심히 읽어보며 윤봉길 의사의 인생에 다가섰다. 윤봉길 기념관은 2층으로 된 목조 기와 건물이다. 1층에는 그의 사진과 흉상, 의거 당시 사용한 도시락 폭탄과 물통 폭탄, 김구 선생과 바꿨다던 시계, 순국 당시 묶였던 형틀이 전시되어 있고, 2층에는 관련 영상을 볼 수 있는 모니터와 의자 몇 줄이 있었다. 꽤 단출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만난 윤봉길 의사의 결의와 글과 행동은 무척이나 크고 거대한 것이었다.
 

   
▲ 윤봉길 기념관
   
▲ 윤봉길 기념관 
   
▲ 윤봉길 기념관 내 윤 의사 유품


그는 농촌계몽운동에 한계를 느껴 가족을 남겨두고 칭다오로, 상하이로 떠나왔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영어를 공부하며 자신의 뜻을 펼칠 기회를 기다렸다.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장부가 집을 떠날 뜻을 세웠으면 어찌 다시 살아 돌아오리오. 그가 조국을 떠나며 남긴 말이다. 마침내 김구를 만났다.
 
“어느 날 홍커우 시장에서 채소장사를 하던 윤봉길 군이 조국 독립의 큰 뜻을 품고 나를 찾아왔다. 때마침 나는 중요한 거사를 계획 중에 있었는데, 마땅한 사람을 구하지 못해 고민하고 있었기에 윤군이 찾아온 것이 더없이 반갑고 고마웠다.”

《백범일지》에 기록된 내용이다. 윤봉길은 김구의 계획에 대해 듣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이 폭탄을 던지겠다고 했다. 결국 윤봉길은 의거에 성공했고, 이로 인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침체에서 벗어나고 중국과 항일공동전선을 형성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조국과 독립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스물다섯 살 청년은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당당하게 생을 마감했다. 그의 존엄함과 숭고함에 우리는 절로 엄숙해졌다.

셋째 날. 지아싱, 김구 선생과 요인들의 피난처
6월 14일 수요일. 셋째 날은 승합차를 타고 지아싱으로 이동했다.

   
▲ 지아싱 요인들의 숙소

윤봉길 의거 이후 일본 경찰은 김구를 배후자로 지목해 무려 60만 위안(현재 기준 약 200억 원 추정)의 현상금을 걸었다. 이에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은 도망쳐야 했고, 당시 중국 동맹회 원로이며 상하이 법과대학 총장인 저보성의 도움으로 지아싱에 머물며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지아싱은 저보성의 고향이었고, 김구가 지내던 곳은 호수를 끼고 있는 집이었다. 대부분 뱃사공과 함께 배를 타고 호수에 나가 경계하며 생활했다고 한다. 자연스레 영화 〈암살〉이 떠올랐다. 약산 김원봉(배우 조승우)이 배를 타고 등장했던 장면, 염석진(배우 이정재)이 머물던 목조 건물들과 흡사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1932년 5월부터 약 5년간 지아싱에서 임시정부 활동을 했다. 1935년에는 지아싱 남호(南湖)의 유람선 위에서 특별회의를 개최하여 김구 선생 등을 새 국무위원으로 선임하는 등 제 13기 임시정부 내각을 구성하였다. 이 회의로 혼란과 침체에 빠져있었던 임시정부는 재정비되고,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 지도자의 위치를 확립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김구를 도왔던 저보성 선생에게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대통령 명의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저보성 선생의 장손에게 전달하는 일도 있었다. 김구 선생이 머물렀던 집과, 조금 떨어진 곳의 다른 요인들의 숙소는 소박하고 계단이 좁은 2층 목조 건물이었다. 방에는 삐거덕거리는 작은 침대와 테이블이 전부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호수와 울창한 나무들이 위로가 되었을까.

   
▲ 지아싱 
   
▲ 지아싱 모형

 

‘건국 100주년’을 앞두고
어떤 현장에 간다는 것은 그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숨결과 냄새, 표정을 만나는 일이다. 어떤 사건을 책과 영상을 통해 상상하는 것보다 아픔의 현장, 역사의 현장에 직접 가서 느끼는 것이 피부와 내면에 몇 배는 더 강렬하게 새겨지는 듯하다.

현장에서는 자연스레 나 자신을 역사의 인물에 대입하게 된다. 독립운동가를 조직하고 파송했던 수장 김구, 온몸으로 일제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던 이봉창과 윤봉길, 그리고 많은 단원들. 임시정부 요인들의 피난을 용감하고 친절하게 도왔던 저보성과 주가예(저보성 며느리). 시대(일제)와 대세(친일)에 맞서고, 심지어 목숨을 바치기까지 행동하게 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나라면 그 당시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았을까. 쉬이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닌 듯하다.

▲ 윤봉길 기념관

얼마 전 국정농단-탄핵-대선 정국에서도 국민들 간 나라와 지도자에 대한 바람에 온도 차가 있었듯, 그 당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도 자유와 독립, 국가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모두 일치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저 어서 해방되기만을 바랐던 이들도 있었을 것이고, 계급 타파를 주장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 아나키스트들의 독립운동 등등. 머지않은 때에 시기별/이념별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공부하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귀국 후 애프터 모임에서는, 이번 기행의 타이틀이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루트를 찾아서’를 진정 완성하려면 임시정부가 이동했던 여덟 지역(상하이-항저우-난징-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충칭)을 모두 따라가 봐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건국 100주년을 앞둔 시점, 대한민국의 뿌리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어떤 방식으로든 의미가 있지 않을까.

사진을 정리하면서 이 노래가 맴돌았다. 여행하면 흔히 떠오르는 김동률의 ‘출발’. 2절 가사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언젠가는 나도 알게 되겠지 이 길이 곧 나에게 가르쳐 줄 테니까, 촉촉한 땅바닥, 앞서간 발자국, 처음 보는 하늘, 그래도 낯익은 길.

선열들이 걸어간 길, 그 발자국이 가르쳐주는 대로 당당한 선택을 하며 살기를, 시대를 읽어낼 줄 알고, 바른 물결의 일부가 되어 거짓의 물결에 온몸으로 저항하며 살기를 손 모아 바라본다.


김현아
수출 서류 만드는 일에 회의감을 느끼고, 재밌게 잘할 수 있겠다 싶어 기윤실에 뛰어들었다. 책상 앞 행정도 좋아하고 길바닥 현장도 좋아하는, 배움과 나눔이 필요한 5년 차 활동가.

저작권자 © 복음과상황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