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호 커버스토리]

‘증빙서류’를 달라니!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다. 시아버님 칠순 행사를 혼자 떠맡았다. 다른 형제들이 모두 미국에 있는 탓이기도 했고, 남편은 경쟁이 치열한 분야의 회사를 다니고 있어서 손을 빌릴 형편이 못됐다. 목사 사모이신 친정어머니께 어려서부터 늘 듣던 말이 ‘봉사와 섬김’이라, 자연스레 특별한 생신을 마음 다해 준비하려고 애썼다. 아버님의 사진을 미리 받아서 집안 한 면에는 돌 사진부터 최근 사진까지를 정성껏 디스플레이 하고, 아버님 일생에 있던 소소한 일들이나 가족 행사 장면을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아들과 일일이 코멘트를 작성해서 붙이며 행복해 했다. 당일 날은 시아버님과 시어머님 양가 형제 내외 열 분을 집으로 모셨다. 준비한 음식은 전채부터 디저트까지 정성껏 만든 것들이었다. 나 역시 일하는 사람이었지만 전업은 아니었기에 가능했고, 그때는 모든 것이 기꺼웠다.

‘좋은 며느리’라고 칭찬 받기 위해 늘어놓는 이야기가 아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생신 당일의 행복한 모습을 사진에 가득 담아 그날 참여하지 못한 미국의 형제자매, 그리고 남편에게 보냈더니, 하하…! 어쩜 모두 의논이라도 한 것처럼 동일한 말이 돌아왔다. 영수증을 첨부해서 총지출을 보고하란다. N분의 1로 나누자는 거다. ‘그게 왜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하고 생각하시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모든 것은 임금과 비용의 수치로 환산되어야 하며 정확한 증빙자료가 제출되어야 한다’고 믿는, 뼛속까지 ‘관료제적 인간’(Bureaucratic person)이다.

그런데 난, 너무 화가 났다. 여긴 회사가 아니지 않는가. 가족끼리 뭐하는 거냔 말이다. 그렇게 치면 내 노동 비용은 어찌 책정할 건가? 음식 재료비와 선물 값만 지출 비용이란 말인가? 관료제적 인간들을 갑자기 접하니 내 진심도 돈으로 환산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래서 어찌 결말이 났느냐? “아버님 칠순은 그냥 제가 다 할게요. 나중에 팔순 때는 저 빼고 나머지 형제자매들이 다 준비하세요.” 이렇게 내지르는 걸로 정리했다.

내가 화를 낸 이유는 뻔했다. 가정은 지극히 사적인 친밀성의 공간인데, 여기에 관료제적 잣대를 들이대면 어쩌느냐는 생각에 분기탱천했던 거다. “아휴, 너무 고생했어. 정말 고마워요.” 이 한마디로 족했다. “얼마 되지 않지만 나도 조금이나마 보탤게요.” 이렇게 본인이 가능한 만큼의 기꺼운 금일봉을 건네도 좋았다. 하물며 뭐라고? 영수증을 첨부하라고? 그런데, 최근에 종교인 과세를 놓고 열을 펄펄 내는 몇몇 목사님들 기사를 읽다보니, 내가 어느 지점에서 그동안 날카롭게 선을 긋고 살았는지를 깨달았다.

“가족끼리는 돈 빌려주고 받고 하는 거 아니다. 그냥 줄 수 있는 만큼 도와라.” 친정아버지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다. 그래서 늘 그렇게 살았던 나였다. 더구나 목사님이셨던 아버지의 직업상, 교회 봉사를 하면서 내 돈 들이는 일을 당연시하고 지냈다. 성탄 행사를 준비하면서 주일학교 학생들 간식 사주고 무슨 증빙서류를 꼬박꼬박 내겠나. 회사 출장도 아니고 여름수련회 장소를 미리 방문하는 날 드는 비용도 그냥 개인적으로 쓰던, 그런 삶이 일상이었다. 그게 다 봉사고 섬김이라고 생각되었으니, 그저 기쁘고 기꺼웠다. 더구나 예수께서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그럼 “아버지께서 은밀히 갚으신다고” 하시지 않았던가(마 6: 34 참조). 내가 이만큼 내놓았다고 알리는 것도, 내가 이만큼 봉사했다고 생색내는 것도, 다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디아코니아’는 돈으로 응시될 수도 환산될 수도 없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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