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호 3인 3책]

소금꽃나무
김진숙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 2007년
                                   
대학에 입학하기 전 읽은 책이 하필이면 《전태일 평전》이었다. 책을 안 읽은 사람보다 딱 한 권만 읽은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다고, 그 책을 읽고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어 고무된 나는 1학년 여름방학 때 집에서 멀지 않은 공장 ‘알바생’이 되었다. 여성복을 만드는 작은 공장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일은 완제품이 나오면 쪽가위로 실밥을 뜯어내고, 라벨을 붙이는 것이었다. 지극히 단순했지만, 은근히 고되었다. 아침 9시에 출근하여 쪽가위로 손가락을 찌르기를 반복하며 눈알이 빠져라 실밥을 뜯다가 저녁 7시에 퇴근하여 집에 돌아오면 쓰러져 잠들었다. 매일 나의 무모함을 후회하며 겨우 보름만에 도망치듯 그만두었다. 공부해야 한다는 게 겨우 찾아 낸 변명이었다. 그때의 나는 공장에 위장 취업하여 ‘노동자’들을 깨우치는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에 부풀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나의 알량한 ‘체험’이 치열한 ‘삶’을 사는 그들에게 얼마나 우습게 여겨졌을까. 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때의 나를 생각하면 부끄럽다.

2018년 7월 23일 노회찬 의원이 타계했다. 사무실이 신촌인데 장례식장을 다녀오지 못했다. 갈 기회가 몇 번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만큼 슬프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지만, 조문을 가지 않을 정도로 괜찮은 건 아니었다. 그와 사적 인연이 없었기에 그럴 수도 있지만, 정치인 중에서도 좋아하기로는 손에 꼽았기에 가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미안함과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어쩐 일인지 공장에서 도망치던 그해 여름의 내가 생각났다. 그는 나 혹은 대부분의 사람이 ‘투명인간’ 취급했던 노동자, 사회적 약자들을 ‘인간’으로 대접한 운동가였다. 누군가는 찰나의 체험과 공허한 말뿐인 정치를 할 때, 세상이 조금이라도 진보하는 데 자기 인생을 걸었던 정치인이었다. 그리고 2018년 7월 23일 그 치열한 삶을 멈췄다. 누군가는 노회찬을 빼앗겼다고도 했다. 그만큼 그는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었다. 그가 그렇게 누군가의 곁이 되고,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애쓰는 동안 나는 무얼 했을까? 그저 ‘체험’을 ‘삶’이라 우기며 스스로 만족하며 살았던 건 아닐까?

그가 떠난 후 내 방식대로 애도를 했다. 우선 정의당원이 되었고, 그다음으로는 오랜만에 《소금꽃나무》를 꺼내 읽었다. 《전태일 평전》이 20대를 시작하는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알려줬다면 이 책은 30대를 통과하는 나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한 책이다. 저자 김진숙은 한진중공업의 유일한 여성 용접공이었다. 그러다 2010년, 경영 악화를 이유로 한진중공업이 생산직 노동자 400명을 희망 퇴직시키기로 결정하자 이듬해 1월부터 ‘85호 크레인’에서 무려 309일간 고공 농성을 벌였다. 이 책은 그가 크레인 위의 노동자로 알려지기 전에 (여성) 노동자이자, 노동운동가로서 쓴 에세이다. 이 책은 여러모로 역설적이다. ‘그’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그를 넘어서는 다른 ‘김진숙’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신은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고 밝혔지만, 현장에서 체득한 통찰과 긍정적인 에너지가 가득 담긴 그의 글은 그 어느 ‘책상머리’ 지식인의 글보다 펄떡인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마치 그가 속한 세계를 처음 만난 것처럼 어떻게 그렇게 살았는지 놀라지만, 정작 그는 담담하게 말한다. “난 내 삶을 살았던 것뿐이다. 누구에게든 삶이 있듯 내 삶은 그랬던 것뿐이”라고. 이 역설을 간파하고, 간극을 좁히는 것이 아마도 노회찬이, 김진숙이, 수많은 ‘소금꽃나무’들이 꿈꾸었던 세상 아니었을까?

그런데 이 책의 제목 ‘소금꽃나무’의 정체는 뭘까? 궁금하면 읽어보시라. 다른 건 놓쳐도 ‘소금꽃나무’는 어디에서 피는지, 그 꽃은 어떻게 생겼는지에 관해서만 알게 되어도 충분하다. 힌트를 주자면, 노회찬 의원의 삶이 가장 많이 머물렀을 곳이다. 


오수경
낮에는 청어람ARMC에서 일하고 퇴근 후에는 드라마를 보거나 글을 쓴다.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에 관심이 많고 이웃들의 희노애락에 참견하고 싶은 오지라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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