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호 믿는 '페미'들의 직설]

   
▲ Created by Donna Bamard / CC BY-SA 2.0

가부장제 가족 안에서 자란 나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한 이후, 내가 바라보던 세상은 완전히 뒤집혔고, 나는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획득했다. 그 과정에서 전공이나 취향, 의사소통 습관 등 미시적이고 개인적인 것에서부터 구조와 정책 같은 거시적인 부분까지 새롭게 정의하고,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빠르게 변화했고, 때로는 겹겹이 눌러 붙은 다양한 층위의 욕망을 분리해 내느라 한없이 느리고 답답했다.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괴롭히고, 답답하게 만든 것 중 하나는 바로 ‘가족’이다.

나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모부(母父)가 만들어 놓은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서 살아왔다. 2녀 1남의 ‘큰딸’로 태어나, 모부의 양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 울타리 안에서 교육을 받았고, 입고 마시며 성장했다. 그러니까 나는 자라는 데 필요한 대부분의 것을 가족, 그중에서도 모부로부터 제공받은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전적인 돌봄과 지지와 지원과는 별개로, 가족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충실하게,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 가부장제를 기반으로 형성되어 유지되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지금의 ‘내’가 되었다는 것과 그 가족이 가부장제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 이 두 가지를 통합하여 인정하고 해석하는 일은 어려웠다. 내가 그토록 깨부수고 싶은 가부장제의 그늘 아래서 나는 자랐고, 여전히 그 구조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가족 관계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차별을 마주할 때면 숨이 막히고 화가 났다. 가족은 화목했지만 그 안에는 위계와 질서라고 불리는 차별이 엄연히 있었고, 이를 인정하는 것이 때로는 스스로에 대한 부정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페미니스트가 되면서 ‘당연하다고 여기던 모든 것에 질문을 던지겠다’고 다짐한 나는 우리 가족의 모습을 새롭게 평가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야만 했다. 그리고 ‘내가 집안일을 하는 것이 가부장제를 공고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과 검열은 내려놓고 불편하다고 느끼는 것을 하나씩 바꿔가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결심을 하고서 내가 가족들에게 가장 먼저 한 이야기는 ‘집안일을 평등하게 나누자’가 아니라 ‘자기가 먹은 밥그릇은 각자 싱크대에 가져다 놓자’ ‘가장 마지막에 밥을 다 먹은 사람이 식탁을 정리하자’였다. 처음부터 거창하고 위대한 변화를 가지고 올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걸음마도 못 뗀 이에게 달리기를 시킬 순 없었다. 시작은 가장 기본적인 생활습관을 바꾸는 걸 목표로 했다. 이러한 시도들은 아주 작은 일조차도 모두 ‘여성’에게 떠넘기고, 그 돌봄에 기생하는, 내가 그토록 마주할 자신이 없었던 가족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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