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호 3인 3책]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은수연 지음
이매진 펴냄 / 2012년                   

2018년 8월 3일. 한 신학생이 유서를 남기고 세상과 이별했다. 이름은 이수연(가명). “저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로 시작한 그의 유서 끝에는 어느 목사의 이름과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고등학생이던 그를 “셀 수 없을 만큼” 성폭행한 목사다. 두 아이의 아빠인 그는 ‘연인 관계였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살아서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는 그와는 달리, 그녀는 더 이상 항변할 수 없다. 다만 영원한 침묵이 증거 그 자체다.

이 소식은 소위 ‘교계’뿐 아니라 일반 언론에도 공개되어 빠르게 퍼져 나갔다. 누군가는 분노했고, 어떤 이는 ‘역시 개독교!’라고 익숙한 비난을 뱉었다. 맞는 말이다. 한국교회는 스스로를 ‘개독교’로 만들었다. 그동안 교회는 여성이 성폭력을 당해도 신앙을 구실 삼고 교회를 명분 삼아 피해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어렵게 피해 사실을 말해도 오히려 ‘이단’ ‘꽃뱀’ 취급을 받거나, 교회를 해치는 마녀로 사냥당했다. 설사 성폭력 사실이 입증된다 하더라도 가해자의 평판은 훼손되지 않았다. 교단에는 성범죄를 일으킨 목회자를 면직할 시스템도 없다. 이런 교회에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 한들, 갱생이 가능할 것 같지 않다.

이것이 단지 교회만의 문제일까? 그런 교회를 두고 ‘개독교’라 비난하는 이들은 다른 성폭행 사건에서는 과연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나와는 무관한 일’처럼 쉽게 비난의 버튼을 누르는 이들은 과연 정말 그 일과 상관이 없나? ‘안희정 전 도지사 성폭행’ 사건을 비롯하여 우리는 이 사회가 어떻게 통념과 법의 뒤에 숨어 ‘성폭력의 공모자’가 되어 남성 사회를 결사적으로 지키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목격하고 있다. 용기를 낸 말과 글은 어느새 ‘불륜 서사’로 재구성되어 ‘가짜 미투’로 조롱받거나, ‘피해자다움’을 강요당한다. 죽어야만 ‘진정한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마저도 왜곡되어 세상을 둥둥 떠돈다. 지금은 여성을 위한 종교도, 여성을 위한 사회도 부재한 상태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수연. 우선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싶다. 그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 해당 기사를 읽다가 비록 가명이지만 또 다른 ‘수연’을 생각했다. 목사인 아버지에게 9년에 걸쳐 성폭행을 당한 은수연. 그의 책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에는 그가 겪은 성폭력의 기억과 성폭력 ‘피해자’에서 ‘생존자’로 살게 되는 과정이 담겨 있다. 그가 살아서 담담하게 글을 쓸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그가 가정이라는 지옥을 탈출했을 때 보호자가 되어준 기관,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었던 법과 제도, 그가 그 시간을 벗어나도록 도와주었던 공동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사회’라 부른다. 이 사회가 제대로 작동해야 피해자는 생존자가 될 수 있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피해자로 죽는다.

그 이름을 기억해야 할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여성에게 기독교/사회는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하기 위해서다. 이수연은 세상을 떠나고, 은수연은 생존자가 된 이유는 간단하다. 성폭력 피해자 곁에 사회가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다. 우리는 그 억울한 죽음을 두고 슬퍼하는 것을 넘어서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물론 ‘직접 화법’으로 쓴 은수연의 글은 읽기에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찬찬히 읽다 보면 ‘공감자’를 넘어 ‘당사자’(actor)로 서게 하는 힘이 있다. 책 내용 중 그가 예수님을 믿게 된 순간이 기억에 남는다. 어느 날, 아버지의 교회 십자가가 번개에 맞아 고꾸라지더라는 것이다. “아, 신도 저 새끼를 버렸구나!” 그날부터 그는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한다. ‘십자가가 땅에 처박히던’ 순간, 역설적으로 그에게 구원이 찾아온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구원이지만, 도리어 그것이 또 다른 누군가를 억압하고, 폭력의 굴레에 빠트리고, 죽게 만든다면 그 십자가가 고꾸라져야 한다.  


오수경
낮에는 청어람ARMC에서 일하고 퇴근 후에는 드라마를 보거나 글을 쓴다.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에 관심이 많고 이웃들의 희노애락에 참견하고 싶은 오지라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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