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호 3인 3책] 무법적 정의 / 테드 W. 제닝스 / 도서출판 길 펴냄 / 2018년

나는 지금 이상은의 노래 〈언젠가는〉을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하며 이 글을 쓴다. 아마도 낮에 그의 1995년 음반을 들었던 것이 이 노래를 계속 흥얼거리는 이유일 것이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데, 배경은 그 위에 얹힌 것의 의미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테드 제닝스의 《무법적 정의》를 〈언젠가는〉 가사의 서사 구조에 따라 이해하게 되었다. 나를 비롯한 보통 사람들은 그럴 때 텍스트를 ‘이해’했다고 느낀다. 남의 말로 된 조각이었던 글이 내가 이미 가진 퍼즐에 들어맞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저자의 글이 내 삶으로 들어와서 일부가 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나는 신앙과 삶에 대한 고민이 해소되는 경험을 한다. 그렇게 나의 읽기 방식으로 《무법적 정의》을 읽었다.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젊음’ ‘사랑’ 같은 단어들은 상황에 대한 고유한 정서를 동반한다. 그렇게 되면 과거 시점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추억 위에 덧씌워지고, 과거의 의미는 새롭게 변한다. 테드 제닝스는 이 점을 알기에 바울의 로마서에 등장하는 중요한 개념어들에 다시 이름을 붙인다. ‘주’는 ‘지도자’로, ‘그리스도’는 ‘메시아’로, ‘예수’는 ‘여호수아’로, ‘믿음’은 ‘충실함’으로, ‘은혜’는 관대함으로 대체되고, 로마서가 내뿜는 정서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 된다.

“하지만 이제 뒤돌아보니 우린 젊고 서로 사랑을 했구나.” 핵심 개념들을 다르게 불러본 결과 우리는 바울이 로마서라는 편지에서 의도한 바가 신학적 해설과 종교적 신념의 변증 이상의 차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서신의 다른 면모를 ‘보게’ 된다. 그것은 바로 로마인들이 사회를 구성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과 그에 대한 대안 제시이다. 새로운 단어를 가지고 뒤돌아볼 때에 비로소 그 측면이 보이는 것이다.

“눈물 같은 시간의 강 위에 떠내려가는 건 한 다발의 추억.” ‘종교화된 기독교’는 저자가 나름의 신앙 체계와 제도를 확립한 이후의 기독교를 부르는 이름이다. 개인이 ‘의로움’을 얻는 방식을 제시하는 이 체제에서는 바울의 정치적 면모가 보이지 않았다. 이천 년의 시간의 강 위에 떠내려가 버린 것이다.

“그렇게 이제 뒤돌아보니 젊음도 사랑도 아주 소중했구나.” 뒤돌아보게 되었다는 것은 한 시대가 지났음을 의미한다. 저자는 우리 시대 세계 곳곳에서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쇠락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 쇠락은 위기로만 끝나지 않는데, 종교적 체계가 성립되기 이전의 시대를 되돌아볼 계기를 주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언젠가’라는 시간은 신학자들이 그리스어로 ‘카이로스’라고 부르는 ‘바로 그때’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간은 시계와 달력을 따라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사건들의 마주침을 통해, ‘그때’로서 등장하는데,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쇠퇴하는 지금의 기독교는 종교의 형태를 갖추기 전의 기독교와 유사한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이 ‘언젠가’가 바로 지금이기에 우리는 바울과 로마서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헤어진 모습 이대로.” 헤어졌다 다시 만난 바울은 하나님의 관대함과 그에 충실했던 여호수아라는 이름의 메시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지금도 우리는 법을 촘촘히 하고 예외를 없애는 방식으로 정의를 수립하려 하지만, 그런 방식의 정의는 많은 경우 또 다른 부정의로 이어진다. 제닝스가 만난 바울은 그 좌절 한가운데서 선물로 주어지는 방식 외에는 정의가 수립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이 좌절이 동일하기에 바울은 지금도 의미가 있다. 참으로 이 책은 정의에 대한 목마름을 가진 이들의 책장에 꽂혀 있기 합당하다.
 

여정훈
대학원에서 신약성서를 공부하던 중 공부에 재능 없음을 느끼고 기독교 시민단체에 취직한 후 자신이 일도 못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을 만들었다.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의 공저자 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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