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338호 역사에 길을 묻다 : 공의회의 사회사]

   
▲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교황과 논쟁하는 주교들(그림: 위키피디아)

※이 연재 원고는 기획 의도에 따라 강연문 형식으로 써나가며 각주와 참고문헌은 추후 단행본 출간시 반영됨을 알려드립니다. -편집자

지난 해 연재한 ‘한 인문주의자의 시선’ 후속으로 올 한 해는 ‘공의회의 사회사’를 주제로 함께 공부하고자 합니다. ‘공의회’라는 단어도 익숙하지 않은데, 가톨릭교회 역사와 관련된 용어라는 선입견으로 인해 더 거리낄 수 있습니다. 이해할 만합니다. 그러니 왜 이 주제를 공부해야 하는지, 정말 중요하고 유의미한 공부인지 그 정당성을 찾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1. 사회사로 교회를 읽는다는 것
한국의 대다수 개신교인들에게는 ‘오직 성서’라는 가치가 뇌리에 매우 깊게 새겨져 있습니다. 종교개혁이 성서의 가르침을 벗어나는 가톨릭교회의 전통을 깨뜨린 사건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성서로 돌아가자’ 혹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그래서 대두됩니다.

중세 및 종교개혁사 연구의 권위자인 하이코 오버만(Heiko Augustinus Oberman, 1930–2001)은 교회가 전통에 대해 가지는 관점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였습니다. 그가 명명한 ‘전통 1’은 개신교가 수용하는 ‘오직 성서’만을 권위로 인정하는 관점이며, ‘전통 2’는 가톨릭교회가 담보하는 성서와 전통이라는 두 가지 계시를 모두 인정하는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개신교에서 성서의 권위 외의 다른 전통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오직 성서’라는 명제 앞에 다른 전통은 무시되는 것일까요? 그렇게 오해하기 쉽지만, 성서의 권위와 더불어 가톨릭교회, 동방교회, 프로테스탄트교회가 공히 인정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분리되기 전에 개최되었던 기독교 최초 일곱 공의회의 결정들입니다. 지금 개신교나 가톨릭 모두가 고백하는 삼위일체 신앙을 정립한 니케아 신조는 바로 공의회의 산물입니다. 이른바 개신교에서 수용하는 ‘양성론’ 교리라고 알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고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보면 개신교가 교회 전통은 무시하고 오직 성서의 권위만을 인정한다는 주장은, 조심스럽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그동안 삼위일체론이나 예수의 인성과 신성에 관한 공의회의 결정 사항들은 신학적 교리적 차원에서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동의하는 범주에 들지 않는 것은 이단이나 이교라고 손쉽게 판단하고 규정해 왔지요. 그것은 한 치도 틀리지 않은 옳은 판단이었을까요? 동방정교회라고 통칭되는 러시아 정교회, 루마니아 정교회가 포함되는 그리스 정교와 더불어 가톨릭만이 이 초기 일곱 차례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였습니다. 경교라고 익숙하게 알려진 네스토리우스파나, 시리아 정교회, 콥트 정교회, 에티오피아 정교회, 앗시리아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등 수많은 교파들은 예수의 인성과 신성에 대해 칼케돈 공의회(451)가 결정한 양성론을 받아들이지 않고 분리되었습니다. 비 칼케돈파 혹은 오리엔트 정교회라고 불리는 이 교파들은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7천만 명 이상의 신자들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공인된 후 100년 남짓 지난 시점에서 교회는 다양하게 분화되었습니다.

이쯤에서 한 가지 기본 사항에 대한 정리가 필요합니다. 교회사를 정통과 이단의 관점, 교리 형성과 교리 정밀화의 단계로 접근하는 것은 바람직한 독법이 아닙니다. 이 연재에서 다루는 공의회는 유럽의 사회사를 읽어가는 한 수단입니다. 사회사 관점으로 읽는다는 것은 공의회를 타협할 수 없는 교리의 형성 과정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와 상호작용의 결과로 뿌리내리게 된 전통의 형성 과정으로 읽는다는 의미입니다. 공의회의 결정을 수용한 동방교회와 수용하지 않은 교회들은 제각기 독자적인 신학 위에 전통을 세워 나갔습니다. 그것을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신학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여 기독교를 공인한 것이 313년입니다. 분할 통치되던 제국을 그가 통일하여 마침내 밀라노 칙령의 효력이 로마 제국에 전체에 나타난 시점은 324년입니다. 그 이듬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바로 기독교 최초의 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회(325)가 열렸습니다.

사회사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이나, 최초의 공의회 개최는 아주 많이 다른 시각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그가 기독교를 공인한 것은 커져가는 기독교 세력을 힘입어 제국의 일체성을 고양하고자 하는 전략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공인 이후 황제는 기독교 내부에 다양한 신학 사조와 경향들로 인해 큰 분란을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는 그가 의도했던 제국의 일체성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밀라노 칙령의 효력이 제국 전체에 발생한 후 곧바로 공의회를 소집했다는 것은 콘스탄티누스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그러면 니케아 공의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무엇일까요? 교회사나 신학에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는 이들이라면, 예수의 신성을 부인한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단죄하고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한 것이라고 하겠지요. 그러나 사회사 관점에서 볼 때 더 중요한 점은, 교회의 중요한 사안을 다루기 위한 공의회를 황제가 소집하고 사회를 보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른바 교회 문제에 세속 권력이 개입한 선례를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해 교회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는 황제를 13번째 사도라고 칭했습니다. 황제의 교회 지배를 정당화하는 제국 교회 신학의 기틀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정밀한 교리 확립보다는 교회 내 분란 종식을 원했습니다. 이를 위해 지속적으로 정치적 합의를 종용했는데, 그 결과 황제는 삼위일체 교리를 수용하고 아리우스파를 단죄했지만 니케아 공의회 이후 돌이켜 아리우스파를 지지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죽기 직전 아리우스파 지도자인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쯤에서 알 수 있듯, 공의회를 사회사로 읽는 작업은 일정 부분 탈신화화가 불가피합니다.

2. 제국이 주도한 초기 일곱 공의회
지금까지 공의회는 총21차례 열렸습니다. 이 가운데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모두 받아들인 공의회가 최초 7차례 공의회입니다. 먼저, 이 일곱 공의회는 모두 오늘날 소아시아 지역에서 황제가 소집하여 개최되었습니다. 당연히 그 당시 공통 언어였던 헬라어로 공의회가 진행되고 기록을 남겼습니다.
나머지 14차례의 공의회는 성격을 조금 달리합니다. 8번째 공의회는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입니다. 명칭만 보면 최초 일곱 공의회에 이어지는 연속성을 띠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공의회 역시 황제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소집하였으며 헬라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이 공의회는 동·서방교회가 분열을 야기했기 때문에 동방교회에서는 이 공의회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후 공의회는 모두 동방교회 지역이 아닌 서유럽에서 열렸고, 황제가 아닌 교황이 소집했으며, 헬라어가 아닌 라틴어로 회의를 진행했습니다. 이런 전환을 보면, 일곱 공의회 기간 동안 제도 교회를 둘러싼 교회 권력과 세속 군주 사이의 권력투쟁이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기우는 독법도 문제일 수 있으나, 공의회 소집 및 의제, 결과에 배어 있는 사회 정치적 함의를 읽지 못한다면 우리의 이해는 교리의 문자적 해독 정도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최초 니케아 공의회에서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세 도시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했다는 점을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로마는 이탈리아와 서유럽과 연결된 당시 제국의 수도였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소아시아 지역의 안디옥은 초기 기독교 거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삼각 구도가 깨지게 됩니다. 330년 로마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로마 제국의 새 수도, 즉 새 로마가 된 콘스탄티노플은 로마와 수위권(首位權) 다툼을 벌이게 됩니다. 이것이 다른 지역의 반발을 샀던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콘스탄티노플 이전 후 로마는 자신의 지위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로마가 왜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인지 그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골몰합니다. 이 목적을 위해 로마 교회는 베드로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도권이 계승되었다는 ‘사도 계승 이론’을 고안합니다. 즉 로마 교회가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의 계승자요 사도 중의 사도인 베드로가 세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신생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은 멀리 떨어진 로마보다는 가까이 있는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에서 우선 확고한 우위를 구축하고자 했습니다. 이 과정에도 각종 신비스러운 해석이 개입되고 정치적인 입장들이 고려됩니다. 주요 교회의 설립 사도에 대한 전승을 만드는데, 우선 로마는 베드로가 설립 사도로 인정되었고, 안디옥 역시 베드로가 한 때 머문 지역이라고 해서 베드로가 세운 교회로 인정합니다. 알렉산드리아는 베드로의 제자 마가를 설립자로 봅니다. 예루살렘 교회 역시 베드로가 설립자가 되겠지요. 이렇듯 베드로나 그의 제자들이 각기 입지를 차지합니다. 그렇다면 콘스탄티노플은 어떻게 설립 전승을 만들어 나갔을까요? 콘스탄티노플은 새로운 로마이자 로마의 형제 도시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를 설립자로 주장하고, 이는 오늘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결국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플 교회는 로마 교회 다음의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지 100년 후 서로마 제국은 멸망합니다. 그 멸망의 터 위에 로마 감독인 교황이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서유럽을 형성해 갑니다. 반면,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로마는 비잔틴 문명이라고 불리는 독자적인 기독교 문명을 1천년 동안 더욱 발전시켜 나갑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교황이 서유럽의 이민족들과 함께 기독교 문명을 일구어 가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권위를 확보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초기 기독교 일곱 공의회를 통해 황제 중심의 기독교를 완결했던 동로마 제국은 거기에 어떤 것도 덧붙일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런 이해관계의 충돌 가운데 열린 8번째 공의회인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교회 내 성화상을 둘러싼 논쟁으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분열되는 원인을 제공합니다. 교회 내 성화상 사용에 관한 논쟁은 결국 1054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공식적으로 갈라서는 핵심 요인이 됩니다. 그후 서방 가톨릭 교회는 독자적으로 공의회를 개최하여 교회의 입지를 강화해 나갑니다. 그 결과 새로운 전통이 쌓입니다. 초기 기독교의 7차례 공의회 이후 열린 14차례 공의회는 모두 서방 가톨릭 교회가 독자적인 전통을 마련한 것입니다.

3. 유럽사 속 공의회 역사 : 교회와 사회의 상호작용
공의회 결정 사항의 신학적 함의 및 중요도와는 별개로, 공의회는 당대 교회와 사회가 맞닥뜨린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출발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서방 가톨릭 교회에서 약 1,300년 동안 열네 번의 공의회가 열렸다는 것은 교회가 사회 문제에 대응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 때문에 가톨릭 교회의 사회개혁을 ‘위로부터의 개혁’이라고 부릅니다. 대략 1백 년에 한번 꼴로 열린 이 가톨릭 공의회는 중세부터 근현대까지 서유럽에서 마주한 심각한 현실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대응을 보여줍니다. 이 공의회의 역사는 교회와 사회의 상호작용의 기록 그 자체입니다.

서방 전통의 제도 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기억해야 하는 연도가 3개 있습니다. 바로 313년, 1215년, 1789년입니다. 먼저, 313년은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가 공인된 해입니다. 이를 기점으로 325년 최초의 공의회 개최와 함께 제국에서 기독교 신학이 정립되기 시작합니다. 이 해는 여러모로 복잡한 의미를 지닙니다. 핍박받던 종교가 승리한 시점이라고 볼 수 있는 동시에,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로 자리잡게 되면서 더 이상 낮고 소외된 자를 돌보는 종교가 아니라 지배자의 종교, 승리자의 종교가 된 것입니다. 이 시기가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애국주의 기독교의 레토릭이 생성된 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13년은 이렇듯 기독교의 성격에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중요한 해입니다.

다음으로, 1215년은 어떨까요? 이 해는 역사에서 몇 가지 기념비적인 사건이 일어난 해입니다. 우선 잉글랜드의 존 왕이 마그나카르타(대헌장)를 반포하여 근대 의회민주주의의 토대를 연 해로 주목을 받습니다. 또한 100년 전에 시작된 십자군 원정이 끝을 향해 달려가던 시기입니다. 십자군 원정은 발달된 이슬람 문명과 이슬람이 보존하던 고전 문명들이 의도치 않게 서유럽에 수입되는 기회였습니다. 흔히 오늘날 대학의 뿌리라고 하는 우니베르시타스(universitas)가 태동하고, 그 결과 12세기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변화가 생겼습니다. 이 과정에 가장 큰 기여를 한 단일 요인은 이슬람 문명입니다. 교회사에서 보면, 1215년은 제4차 라테란 공의회가 개최된 해입니다. 이 공의회에서 화체설이나 칠성사 등과 같이 지금껏 이어지는 가톨릭의 중요한 신학 체계가 확립됩니다. 가톨릭 유럽의 확장과 발전의 결과물 중 하나가 교회 지배 정치체제의 완성인 것입니다. 1215년의 제4차 라테란 공의회는 유럽의 끊임없는 확장과 자신감의 표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1789년입니다. 바로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난 해입니다. 기독교 유럽의 대분열은 루터의 종교개혁이 아닙니다. 실제로 유럽이 세속화된 결정적인 전환기는 프랑스대혁명 이후입니다. 계몽주의와 과학주의의 발전 속에 갈피를 잃은 가톨릭 교회는 이러한 변화에 반동적으로 대응하였고, 그 결정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로 나타났습니다. 교회는 현실과의 접점을 상실하고 대중들로부터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양차대전을 거치며 대중의 열망을 외면하고 전체주의에 적극적으로 부역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처럼 벼랑 끝에 선 가톨릭 교회의 혁신의 몸부림이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과 후로 전혀 다른 성격으로 구분될 만한 혁명적인 변화를 이끌어냈습니다.

이밖에도 중세 및 종교개혁 전후로 개최된 공의회들 역시 당면한 사회 현실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자 하는 시도였습니다. 그 결론들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차곡차곡 쌓였습니다. 단일한 권위에 기대기보다 시대에 부합하거나 시대에 반하는 새로운 권위를 만들어 냈습니다. 물론 이러한 시도가 신학적 교리적 오염을 야기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1,300년간 가톨릭 교회의 집합적인 시도는 우리가 따라야 할 전형(때로 지양해야 할 반면교사)의 역할을 합니다.

4. 전통 : 언어·문화로의 전환
이탈리아·스페인·포르투갈 등을 엮는 가톨릭 문화, 그리스 정교회와 동일시되는 그리스 문화, 잉글랜드와 성공회, 독일 및 북유럽 국가와 루터교회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바는 바로 민족과 인종과 종교적 정체성이 묶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독자적인 기독교 전통 형성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민족과 계급입니다. 이는 각각 언어와 그들이 생성하는 문화로 대표됩니다. 그것이 세대 간 전승되는 것을 전통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미국 몬태나 주의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주인공 노먼 맥클레인의 아버지는 스코틀랜드에서 건너온 장로교 목사입니다. 그 집안은 조용하고 고상한 중산 계급의 이미지를 반영합니다. 노먼이 여자친구 제시 집에 처음 인사 갔을 때 온 집안 사람들이 기차역까지 마중 나와 왁자지껄합니다. 어색해하는 노먼에게 제시의 어머니는 “우리는 감리교라서 그러니 장로교인이 이해를 해달라”고 말합니다. 잉글랜드나 미국에서 감리교는 서민들의 종교였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교파 내의 사회적 계급의식과 민족의식은 기독교에 부합하느냐 여부와는 무관하게 역사적으로 형성된 전통입니다. 

개신교의 성서중심주의 전통은 근대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이 근대적 전통의 부작용은 텍스트가 나오게 된 콘텍스트를 무시한 채 텍스트의 경전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텍스트 환원주의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성서를 보는 입장과 창조과학이 주장하는 류의 해석이 맥이 닿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 전통에서는 문자주의적 해석만을 성서에 대한 신성성을 지지하는 것으로 혼돈하기 쉽습니다. 적어도, 한국 기독교의 맥락에서 이런 근대성은 대단한 힘을 발휘했습니다. 다양한 관점의 가능성에 대한 고려는 한국 기독교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는 공포심도 큰 힘을 발휘했습니다.

이러한 문자주의는 강력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지탱할 근거가 취약합니다. 스위스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1857-1913)는 언어라는 기호를 ‘기표’(signifiant, 시니피앙)와 ‘기의’(signifié, 시니피에)로 구분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장미’라고 할 때 그 발화되는 글자는 기표이며, 장미라는 용어를 얘기할 때 떠오르는 정신적인 이미지가 기의입니다. 그런데 장미(jang‐mi)라고 문자로 표현될 때 모두가 동일한 기의를 유추하지 않습니다. 영어권에서는 ‘rose’라고 표현될 때만이 한국어의 ‘장미’가 표현하는 기의를 끌어낼 수 있습니다. 이렇듯 기표와 기의로 구성된 언어는 그 자체가 이미 사회적 관습과 문화적 동의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인간의 경험 세계에서 표현되는 기표가 단 하나의 기의와 동일시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언어를 통해 과거를 있는 그대로 복원한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를 ‘언어로의 전환’(linguistic turn, 기호논리학이나 언어철학을 기반으로 언어 분석을 이용해 철학적 문제를 해명하려는 경향-편집자)이라고 표현합니다. 문자주의적 성서해석이 풀어낼 수 없는 딜레마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서를 포함하여 기표로 표현된 텍스트를 (과거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기표의 나열이라고 한다면, 문자적 해석에 집착하는 것으로는 객관적 지식에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취할 선택은 텍스트가 나온 콘텍스트 읽기로 범주를 확대하는 것입니다. 사회적 콘텍스트 안에서 언어의 의미가 생산되고 조직되기 때문입니다. 언어로의 전환은 곧 문화로의 전환으로 연결됩니다. 언어가 독자적인 문화를 생성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헬라 문화권에서 비롯된 기독교가 중세 서방의 라틴 문화권으로 넘어오면서 형성된 라틴어를 기반으로 한 독특한 신학적 문화를 형성한 것에서 드러납니다. 따라서 문화란 언어가 사회적으로 공유되고 합의되어 세대 간에 이어진 전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어의 변환은 새로운 문화를 생성합니다.

5. 겸손, 낯선 ‘공의회 역사 여행’의 동반자
에둘러 왔지만, 하고 싶은 얘기는 이것입니다. ‘성경 말씀대로 믿는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 발화되는 기표는 우리를 틀 지운 문화와 전통이라는 기의 안에서 이해될 뿐입니다. 그러니 흔히 교회에서 간편하게 사용하는 진리와 비진리, 창조와 진화, 성서를 믿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이라는 이분법은 지적 무지 혹은 오만의 산물입니다. 종교 전통과 진리를 감히 동일시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과도한 해석이라고요? 한 가지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제가 처음 신학교에서 중세교회사를 강의할 때 학생들로부터 가장 진지하게 많이 들었던 질문 중 하나가 “가톨릭에도 구원이 있습니까?”입니다. 그로부터 거의 10년이 지난 지금은 달라졌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목회자와 비목회자 모두에게 가톨릭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는 대단히 민감하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질문한 이유를 물어 보면 가톨릭의 연옥 교리나, 화체설, 면벌부 등이 성서의 가르침과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얼마 전 방한한 바르톨로메우스 총대주교가 대표하는 동방정교회는 어떨까요? 그들은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초기 7차례 공의회의 결정사항만을 받아들입니다. 연옥도, 면벌부도, 화체설도 거부합니다.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사제들도 결혼을 합니다. 그러면 한국 개신교에서 가톨릭보다 동방정교회에 대한 인식이 더 나을까요? 선뜻 그렇다고 답하긴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개신교의 모체가 된 서방 라틴 신학의 언어 문화적 구조에 비해 동방교회의 언어 문화는 우리에게 훨씬 더 낯설고 이질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앞에 나온 질문의 배경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런 질문을 하게 된 개신교의 의식구조에 대한 성찰은 필요합니다. 이 질문의 전제는 ‘개신교의 교리와 신학 내에는 구원이 있다’는 확고부동한 믿음입니다. 그 확신 위에서 다른 신학 전통과 교파들을 재단하는 것입니다. 이 전제에 대해 성찰적 자세를 요구하면 상대주의와 인본주의라는 비판이 서슴없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번의 천 년을 거치며 역사 속에서 다양하게 형성된 기독교 전통을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명확히 규정지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오만입니다. 이는 결코 ‘진리’의 싸움이 아닙니다. 역사를 통해 우리는 내가 맞다는 확인이 아니라, 유구한 전통 가운데 나는 지극히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역사를 통해 교회를 조망하는 일은 신앙의 틀을 깨는 것이 아니라 실존하지 않는 환상을 깨는 작업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부심의 확인이 아니라 겸손의 회복입니다. 이것이 교회와 사회의 상호작용이라는 사회사 관점에서 교회사를 읽어야 할 이유입니다. 적어도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기독교의 설 자리는 무엇인지, 존재 의미는 무엇인지 경청하는 마음으로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겸손한 자리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자는 것입니다. 그런 성찰이 없이는 우리의 미래는 아득할 뿐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진리를 안다고 소리 높여 외치지만, 교회 밖 세상에서 그 외침은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잠잠히 역사에 길을 묻고 배우고자 하는 겸손한 구도의 여정이 절실한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공의회 역사를 살피는 낯선 여정을 떠날 충분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최종원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에서 교회사와 지성사를 강의한다. 인문주의 정신의 존중이 교회 갱신의 핵심이라고 믿고,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교회사 재구성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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