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 3책] 1세기 그리스도인의 하루 이야기

1세기 그리스도인의
하루 이야기

로버트 뱅크스 지음 / 신현기 옮김
IVP 펴냄 / 2018년                                   
                                                    
2019년을 맞이하여 엄마와 새로운 신경전이 발발했으니, 일명 ‘일요일’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엄마 앞에서 일요일을 일요일이라고 말했다가 “일요일이 아니라 ‘주일’이라고 해야지” 라고 지적을 받는 순간 시작됐다. 이후 우리의 대화는 이랬다.

나: 이번 주 일요일에 말이야
엄마: 주일이라고 해야지!
나: (후…) 일.요.일.에~
엄마: 주일!!

이런 식의 지적과 저항(반항?)정신은 나름 치열하게 이뤄진다. 엄마(로 대표되는 다수 기독인들의 주장)에 따르면 멀쩡히 존재하는 요일의 이름을 부를 수 없는(않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홍길동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일요일’을 ‘주일’이라 불러야 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정도이다. 하나는,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과 부활이 엄청 큰 사건이기에 그 일을 기억하며 예수님 부활 전에 지키던 안식일(토요일) 대신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일요일)을 성일로 지키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의 날’ 이라는 의미의 ‘주일’이 되었다. 둘째, ‘구별’을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세상과의 구별, 안 믿는 사람과의 구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세상, 세속문화 등)과 구별되기 위해서이다. 조금 삐딱하게 보자면 ‘티내기’라고도 할 수 있다. 기독교인이라고 티내기, 거룩하다고 티내기, 너랑 다르다고 티내기 등이 여기에 속한다. 셋째는 나름의 임상경험에 의한 판단(내 생각이라는 말)인데 ‘두려움’ 때문이다. 세상과 구별되지 않으면, ‘주일’이라고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고, 복도 받지 못한다는 그 두려움 말이다. (실제로 우리 엄마도 최근 가족에게 생긴 힘든 일 이후에 더욱 ‘주일’로 바꿔 부르기를 강조하신다.)

그런데 그 구별되기가 그저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바꿔 부르기만 하면 되는 걸까? 그게 예수님 기뻐하시는 그리스도인의 핵심일까? 로버트 뱅크스의 《1세기 그리스도인의 하루 이야기》는 전작 《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에서 새로운 종교 공동체(기독교 초대교회)에 초대받아 감응을 받은 주인공 푸불리우스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의 일상 이야기다. 주인공은 이 새로운 ‘도’를 받아들이게 된 이유와 그로 인한 변화를 알리기 위해 사람들에게 자신의 일상을 소개하기로 한다. “나의 새로운 신앙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설명할 최선의 방법은 가족과 일과 사회생활이 뒤섞인 아주 전형적인 하루를 묘사하는 것이다.”(14쪽)

푸불리우스의 ‘전형적인 하루’는 그래서 시종일관 슴슴하다. 하지만 삶 속에 녹아든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변화들을 일상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와 가족들은 ‘사용’해오던 노예들을 사람으로 보았고, 남성보다 열등하게 여겨진 여성의 위치에 대해 고민했으며,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자신의 재물을 직접 나누며 살고 있었다. 동기는 오직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있었다.

단어 하나일지라도 일상의 형식을 열심히, 티나게 바꾸는 일이 의미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타인에게 (좀 강하게) 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예수님께 향하게 하는 건 강요나 이름만 바꿔 부르는 데 있지 않다. 슴슴하지만 그 삶과 행동이 보여주는 사랑, 그 사랑 속에 계신 예수님을 보게 될 때 우리의 마음에서 평범한 일요일은 ‘주일’이 되고 두려움 없이 타인을 품는 ‘구별’을 원하게 된다. 그리고 자유로워진다. 엄마의 잔소리로부터.  

 

심에스더
성을 사랑하고 성 이야기를 즐겨하는 프리랜서 성과 성평등 강사이자 의외로 책 팟캐스트 〈복팟〉 진행자. SNS 중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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