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호 커버스토리] 근현대사 속 ‘기독교’ 연구 20년, 윤정란 박사 인터뷰

   
▲역사학계에는 여성이 드물 뿐더러, 그중에서도 기독교와 여성을 연구하는 학자는 더 희귀하다. 윤정란 박사는 소속은 늘 바뀌었지만 흔들리지 않고 한 길만 걸었다.  ⓒ복음과상황 이범진

윤정란 박사는 2000년도에 〈일제시대 한국기독교 여성운동 연구〉로 박사 학위(숭실대)를 받았다. 논문은 일제강점기 1910년부터 1945년 해방 때까지 기독교 여성들의 운동을 다룬 연구로, 2003년에 《한국 기독교 여성운동의 역사》(국학자료원)로 보완되어 출판됐다. 윤 박사는 근현대사 속 ‘기독교’와 ‘여성’을 키워드로 20년째 연구를 계속 해왔다. ‘일제시대 노동운동’을 연구했던 석사 때를 포함하면 30년을 훌쩍 넘긴다. 역사학계에는 여성이 드물 뿐더러, 그중에서도 기독교와 여성을 연구하는 학자는 더 희귀하다. 소속은 늘 바뀌었지만 흔들리지 않고 한 길만 걸었다. 그 길에서 얻은 통찰을 엿보고자 지난 1월 25일, 서울 은평구의 한 카페에서 윤 박사를 만났다.

   
 

― 박사 논문 주제가 ‘일제시대 기독교 여성운동’이다. 주제 선정에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석사 때 사회주의에 관심이 많아서 일제강점기 노동운동을 주제로 연구를 했다. 제사공장(製絲工場) 여공들이 기숙생활을 하다 보니 단체행동(단결권)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반독재운동이 활발할 때에 대학 생활을 해서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1989년에 석사 논문을 끝냈는데, 냉전시대가 끝나 버렸다.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이나 러시아 혁명 연구를 많이 했던 또래들이 사회주의권이 몰락하고는 무슨 공부를 해야 할지 잠시 길을 잃었던 때다. 나는 여성의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역사적 상황을 고민하다가 위안부 할머니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할머니들 인터뷰를 많이 하러 다녔고, 그 구술 기록이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증언집 1》에 실리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만 하면 학자적 연구에는 한계가 있을 것 같아서,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석사 논문 쓸 당시 한국근현대사에 기독교가 큰 영향을 끼쳤음에도 정리가 잘 안 되어 있던 게 늘 마음에 걸렸다. 역사에서 기독교 서술이 너무 단편적이고 편협하게 서술되는 것에도 문제의식을 느꼈고, 남들이 안 하니까 나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해서 여기까지 왔다.

― 기독교인으로서의 책임감 같은 것도 있었나?
신앙 때문에 시작한 연구는 아닌 것이, 연구하면서부터 교회에 다녔다. 사료에서 ‘부흥회’ ‘사경회’ 등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 그런 말들을 이해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그때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도움도 크게 받았다. 당시 사학계에서는 기독교 역사 연구에 대한 관심이 많지 않았다.

― ‘여성’에 주목한 이유도 궁금하다.
독립운동 인물 쪽을 살피다 보니까 기독교 여성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특히 서북지역 여성들이 그랬는데, 폭탄도 가지고 다녔다. 실제 평안도청이나 경찰서를 폭파하기 위해 앞장선 게 당시 여성들이었다. 기독교는 독립운동에 활력을 더했다. 그럼에도 사학계에서는 ‘기독교’는 물론 ‘기독교 여성’의 역할도 크게 주목하지 않는 분위기라 정리 그 자체에 목적을 두었다. 여성들에 대한 연구를 하면 할수록, 우리 역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 여권통문 발표 장소였던 서울 중구 삼각동 117번지. 아직 기념 표지석조차 없다.

― 지난해, 최초 여성인권 선언문인 ‘여권통문’ 선언 장소를 찾아내셨다.
여권통문은 우리나라 여성들의 최초 여성인권 선언문이다. 1898년 9월 1일에 작성되어 여러 신문을 통해 공표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장소는 120년이 지난 때에야 밝혀진 것이다. 여성들 스스로 직업권, 교육권, 참정권 등을 주장한 선언문으로 아시아에서 최초의 여성인권선언문이라 할 수 있다. 그때 여성들은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미 깨우치고 있었다. 그에 따라 고종이 기거하는 경운궁의 대한문 앞에 가서 ‘여학교를 세워 달라’고 단체로 상소도 하고, 외국 여성들 앞에서 연설하기도 했다. 이 선언문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찬양회’라는 조직도 결성되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단체다. 단체의 조직 장소와 선언 장소는 현재 서울 중구 삼각동 117번지다. 삼각동은 당시 굽은다리(광교), 홍문석골, 홍문골 등으로 불렸다. 지금은 신한은행 백년관이 들어서 있다.

― 그 의미에 비하면 선언문은 물론 장소도 너무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당시의 번지수 알아내고 통감부 시대 대한제국에서 만든 호적, 그리고 국가기록원 토지대장과 국사편찬위 자료를 참고해서 찾아냈다. 다만 행정적으로 매끄럽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까움이 좀 있다. 한국 여성운동 ‘1번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인데, 기념 표지석 건립도 순탄치가 않은 현실이다. 지난해 120주년을 기념해 표지석을 볼 수 있기를 기대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올해에는 세워지지 않을까 기대한다.

   
▲ 18세기 도성대지도에서의 홍문동 (사진: 윤정란 제공)
   
▲ 1912년 경성부 삼각정 지적도 (사진: 윤정란 제공)
   
▲ 1936년 대경성전도 (사진: 윤정란 제공)

 

―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일찍부터 독립운동가 개인이 아닌 그 가족의 삶에 주목해 여러 논문(<김구 선생 어머니 곽낙원의 삶과 민족운동> <독립운동가 가족구성원으로 여성의 삶> <일제강점기 박자혜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 아내로서의 삶> 등)을 쓰셨다.
독립운동을 했던 남성들은 잘 알려졌지만, 그들 뒤에서 장기적으로 ‘보급 기지’ 역할을 한 여성들 역할은 제대로 조명이 안 됐다. 몇몇 학자들이 연구하고 있지만, 그동안 대중들 관심 밖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들 대다수는 독립운동가의 가족으로, 가정 경제, 집안 대소사 처리, 가족 돌봄, 독립운동가 돕기, 군자금 모금 등을 도맡았다. 이러한 일들도 대다수 독립운동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는데,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은 여성독립유공자는 2014년 기준 2%에도 못 미친다. 여군의 시작을 1950년으로 보는 관점도 한국광복군(1940)부터로 변경되어야 한다. 광복군에서 이미 여성들은 군인으로서 훈련을 받고 있었다.

― 신채호와 결혼한 박자혜의 생애를 다룬 논문도 인상적이었다.
박자혜(1895-1943)가 독립운동에 들어서게 된 계기가 3.1 운동이었다. 생계를 위해 조선총독부의원 간호부로 살던 그가, 3.1운동의 부상자들을 치료하면서 일제 기관에서 일하고 있던 자신을 부끄러워하게 된 것이 큰 전환점이었다. 곧 ‘간호사 독립운동단체’인 간우회를 조직해 3.1운동에 직접 뛰어들었다. 이로 인해 국내에서는 머물 수 없게 되자 중국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신채호를 만났다. 이후에는 다른 전통적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독립운동가 가족으로 후방 지원을 했다. 신채호의 7년 옥중생활 동안 책, 옷 등을 보내주며 지극정성으로 옥바라지를 했다. 신채호가 죽은 뒤 첫째아들은 해외로 떠났고, 둘째아들은 1942년에 세상을 떠났다. 홀로 남아 셋방에 살던 박자혜는 1년 뒤에 눈을 감았다. 이런 분들 수는 단순히 헤아려도 5만 명에 이른다. 3.1운동 100주년이라 이런저런 언론사에서 전화가 많이 오는데, 일시적인 관심을 넘어서 이들에 대한 자료 발굴과 연구가 지속되어야 한다.

― ‘희생’ ‘헌신’ 등의 전통적인 여성 역할에서 벗어나 독립운동을 한 여성들도 있을 것 같다.
물론이다. 예를 들어 독립운동가 허헌의 딸이었던 허정숙(1908-1991)은 임원근과 결혼했지만, 그가 체포되자 송봉우와 동거했다. 그러다 1929년 송봉우가 공산주의운동으로 체포되어 전향하자, 결별하고 최창익과 세 번째 결혼을 했다. 이런 적극적인 연애를 임원근이 비난하자 그는 이렇게 일갈한다. “남편은 아내의 주인도 아니고 또한 아내는 남편의 소유물도 아니다. 자유로운 결정권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하물며 성생활은 인간의 자유로운 요구이고, 남편이 없는 동안 젊은 내가 다른 사람과 지내는 것이 무엇이 나쁜가!” 허정숙은 후에 항일군정대학 정치군사학과를 졸업하고 팔로군 120사단의 정치지도원으로 있었다. 1942년 화북조선독립동맹에 가담해 화북조선혁명군정학교 교육과장을 지내기도 했다. 같은 독립운동가의 가족이라도 그 여성이 처한 환경과 교육에 따라 그 방향은 완전히 달라졌다. 대다수 남성 독립운동가들은 전근대적 여성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보통의 여성들은 이중 삼중의 고통을 안고 살았다.

― 독립운동가의 가족이나 후손이 ‘어렵게 산다’는 이야기가 언론에 종종 소개된다.
예를 들면 해방이 찾아왔어도 그들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나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여전히 정치 활동을 하는 남편과 가부장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고, 그들에겐 해방 전과 똑같이 가족 생계를 홀로 책임져야 하는 삶이 지속됐다.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든 여성들의 상황도 나아지지 않았다. 중국 땅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정정화(1900-1991)는 ‘우리는 난민이었고 거지떼처럼 취급을 당했다’고 회고한다. 쉽게 말해, 해방공간은 더 이상 여성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노동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로 살았던 이병희(1918-2012)도, 그와 같이 활동한 이효정(1913-2010)도 외면당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해방 후 여성 활동가를 중심으로 건국부녀동맹이 조직되어 친일 여성, 민족주의 계열 여성, 사회주의 여성 등이 모두 포함되었으나, 대다수 운동가들이 변절하는 1930년대 국외나 지하에서 항일운동을 했던 이들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 단독정부 수립 후 상황은 더 나빠졌을 것 같다.
그렇다. ‘반정부’ 인사들이 제거되고 배제되는 시기에 여성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광복군으로 활동했던 김정숙, 김효숙, 조순옥, 이복영, 신순호 등이 정치사회적으로 소외된 것은 두고두고 우리 역사의 비극이다. 이분들이 사회적 조명을 받은 것은 1967년 〈대한일보〉가 마련한 좌담회에서가 처음이었다. 정부는 일제 말 변절한 여성들을 주로 조명하는 동시에, 광복군으로 활동했던 이들의 삶은 지우려 했다. 심지어 생활고 해결을 위해 구걸하면서 다녀야 했던 분도 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창설한 광복군 기념사진. 오른쪽 맨뒷줄과 가운뎃줄에 여군들이 보인다. (사진: 위키미디어 코먼스)

― 언론이 ‘3.1운동 100주년’ 기념 내용을 유통하는 방식을 보면, 학자로서 아쉬운 부분도 있겠다.
역사학자들은 다 고민이 많을 것이다. 3.1만세운동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시점이라는 점에서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지만, 역사는 다양한 관점으로 봐야 한다. 어느 쪽이든 민족주의를 너무 강조하고 이용하는 것은 문제다. 역사 연구 자체도 민족주의가 과잉일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식민지 경험이라는 현실이 있지만, 이제는 민족 안의 다양한 계층을 보아야 할 시기다. 예를 들어 민족 안에는 노동자, 농민, 사업가, 여성, 성소수자도 있다. 서구, 일본, 남한, 북한 모두 민족주의 과잉이다. 이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은 우리의 관점이 그만큼 낙후되었다는 증거다.

―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한국 사회에서 권력 핵심을 장악했는지를 다룬 책 《한국전쟁과 기독교》(한울)는 2015년 출간 당시에도 화제였고, 지금까지도 꾸준히 읽히며 인용되고 있다. 근대사 연구로 시작해 현대사까지 연구 범위를 넓히는 게 일반적인 일은 아니지 않나?
일반적이진 않다. 그러나 해방 후 현대사는 늘 궁금하게 생각하던 주제여서 늘 갈증이 있었다. 책에도 밝혔지만, 3.1운동 등 근대 민족운동에서 결정적이고 주요한 역할을 했던 서북 지역 기독교인들이 해방 후 지금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 전투적 반공주의자가 되어 버렸는지, 설명되지 않는 부분을 설명하고 싶었다. 이 문제의식과 관련해 해방 후부터 1960년까지 15년 동안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 탈식민과 냉전의 새 질서에 어떻게 적응하고, 한국전쟁을 계기로 주요 세력으로 부상하면서 박정희 정권과는 어떻게 관계 맺는지 살폈다. 

   
 

― 3.1운동과 서북 지역의 관계는 어떻게 되나?
무리해서 거칠게 요약하자면, 서북 지역은 오랫동안 정치사회적으로 소외된 곳이었다. 과거에 급제해도 관직에 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고향에서 서원이나 서당을 열어 젊은이들을 교육했다. 당연히 다른 지역보다 문맹률도 낮았고, 새 문물과 사상을 맺는 데 최적의 텃밭이었다. 또한 서양 선교사들이 관에 시달리던 조선 기독교인을 도와주는 것을 보고 관심을 보였다. 선교사들이 고위관료 민병석(1858-1940)이 가둔 교인들을 영국과 미국 총영사의 힘을 빌려 석방시킨 것을 보고 서북 사람들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부당한 세금 징수나 빼앗긴 토지를 찾거나 자신의 재물을 지키고자 선교사 이름으로 명의를 이전해 재산을 보호하기도 했다. 서북 지역의 독립협회 운동도 교회가 중심이었다. 독립협회는 (평가는 긍정/부정으로 갈리지만) 당시 한양 중심, 황제 중심의 조선사회를 뛰어넘는 자유권, 독립권, 교육, 법, 진보, 개화 등의 근대 시민 사상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런데 알다시피 독립협회 활동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에 고종이 보부상을 동원해 만민공동회를 공격하지 않나. 독립협회가 해산되고 서북 지역 기독교인들은 정치 행동을 이어갈 수는 없었지만, 그 실패를 교훈 삼아 교육운동에 나선다. 우리가 아는 안창호의 학교 설립이나 애국 계몽 단체의 조직이 그 연장선이다. 서북 사람들은 입헌군주제를 넘어 공화정 형태를 대중에게 선전할 정도로 개혁적이었다.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한 33명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는데, 그중 10명이 서북 출신이었다. 이 운동이 서북 지역 기독교인들에게 자신감을 준 것은 당연했다. 이만열 선생님은 “3.1운동은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바뀐, 즉 ‘황제’가 아닌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의식으로의 일대 전환을 보여준 사건”이라 보았다. 관련해서 사학계의 좋은 논문들이 많다. 그 연구들을 찾아 읽는 게 가장 좋다.

― 서북청년단도 그렇고, 이념 갈등과 한국전쟁이 한반도 곳곳의 비극을 더 증폭시킨 것 같다. 전쟁 시 민간인 학살과 관련한 구술 기록 작업도 하셨다. 전쟁은 모두에게 재앙이지만, 특히 여성과 아이들에게는 더욱더 그렇다.
한번은 전남 영광군 염산면에서 증언을 듣고 사료를 보며 기독교인 학살에 대해 연구했다.(공저 《전쟁과 기억》에 실림) 이곳에는 두 교회가 있었는데 민족의식이 강하고 자발적인 의지를 가진 지역민들에 의해 세워졌다. 그 지역은 지주-소작 관계의 갈등도 없었고, 기독교인들도 대부분 빈농이었다. 그런데 전쟁으로 좌익 세력에 의해 학살을 당한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이 피아의 구분을 만든 것이다. 이런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으로 교회들은 순교비를 세우는데, 그것이 오히려 이념 갈등을 부추기는 기제로 활용되고 사실을 왜곡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은 안타깝다. 구술 인터뷰를 하게 되면 사료에는 없는 뒷이야기도 듣게 되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한 폭력과 학살의 악순환이 반복되지 않도록 막는 일이 우리의 중대한 과제다. 전쟁에는 폭력, 성폭력이 만연하다. 상대적으로 여성들은 더 쉽게 폭력에 많이 노출될 수밖에 없다. 폭력의 근저에는 내가 타자를 짓밟아도 된다는 오만함이 자리하고 있다. 하나님의 섭리와는 완전 상반된 것 아닌가? 인격과 인격, 인간 대 인간 사이는 대등하다는 사실은 19세기 말 외국 선교사들이 신분제 철폐를 주장하며 ‘우리는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라 했던 메시지와도 다르지 않다. 이 메시지는 앞으로의 비극을 막기 위해서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 무의식에 지닌 편견도 그 메시지 앞에 들추어 예민하게 점검해야 한다. 

― 일제강점기부터 여성운동을 이끌던 세력들이 1960년 4월혁명(4.19) 후에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지를 논문 <4월혁명과 여성들의 참여 양상>으로 정리했다. 오히려 여권을 후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결론이 인상적이었다.
민주화의 장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4월혁명이지만, 여성운동이 한 발 후퇴한 계기이기도 했다. 혁명 직후 전국의 여성단체들은 ‘축첩 문제’ 해결을 위해 YWCA 회관에 모이는 등 국민운동을 전개했다. 그때 채택된 구호가 ‘첩 둔 남편 나라 망친다’ ‘아내 밟는 자 나라 밟는다’ ‘아내 배반자 민주 배반자’ 등이다. 당시에도 첩을 두는 문제를 사회구조적인 모순보다는 개인 일탈로 여겼다. 여성단체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들의 선거 참여를 독려했는데, 당선된 여성은 박순천 민의원(양원제 입법부의 하원)뿐이었다. 이에 여성단체들이 여성 군수 등을 기용해달라는 요청을 장면 정권에 몇 차례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때부터 갈등 관계가 되었는데, 장면 정권이 이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주요한 이유 중 하나는 여성의 정치 참여에 대한 여론의 불신 때문이었다. 4월혁명의 원인은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였는데, 여론은 부패의 핵심 책임이 프란체스카(1900-1992)와 박마리아(1906-1960) 등을 비롯한 ‘사모님족’에게 있는 것처럼 여겼다. 문제는 장면 정권에 대한 여성단체들의 실망이 5.16 군사정변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 구체적인 예를 들면?
김활란(1899-1970)은 군사정변을 합리화하고자 미국을 방문해 정계, 언론계, 교회와 사회단체를 찾아다니며 정변 지지를 호소했다. 최은희(1904-1984)는 국가재건 최고회의 산하 국민재건운동 중앙위원을 맡아 활동했다. 그러나 그때뿐이었다. 군사정권은 이들이 아닌, 육영수를 현모양처 여성의 이상형으로 이미지화하면서 대중들의 인지도를 얻었다. 기존의 서구 근대교육을 통해 여권을 강조했던 여성단체는 하나둘 해산됐다. 과거 일제강점기 때 지식인 여성들이 전쟁 협력을 주장하면서 일제에 종속되었던 것처럼 군사정권에 협력하고 종속되는 길을 걸어간 거다. 

― 근현대사뿐 아니라 조선시대 왕비들에 관한 책도 내셨다. 《조선 왕비 독살 사건》(다산초당), 《왕비로 보는 조선왕조》(이가출판사) 등인데, 역시 여성에 주목하고 있다.
너무 많은 시대를 넘나드는 게 아닌가 싶다.(웃음) 남성들의 나라, 왕과 사대부의 나라 조선에서 왕비들의 치열한 삶을 담은 책들이다. 보통 ‘조선시대 여성’, 그것도 ‘왕비’라고 하면 유교적 여성관이 뿌리 깊고, 철저하게 순종하며 살았던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왕비들은 자기 세력이 있어야 오래 버틸 수 있었다. 늘 생존의 문제가 걸려 있었다. 그래서 더 치열하게 살아야 했다. 위태롭지만 삶을 꿋꿋하게 살아내려는 그들의 몸부림을 보면, 사람이 살아가는 방향을 꼭 이데올로기가 정하진 않는다.

― 최근에는 상류층이나 지식인 중심이 아닌 일반 대중들로부터 성평등 운동이 활발하다. 시대별로 비교하면서 보게 되겠다.
지금은 19세기 말 ‘여권통문’에서 주장하던 권리들 대부분이 주어졌다. 선거권, 정치권, 교육권, 직업권 등 다 가졌는데, 지금은 여성이라서 당하는 ‘여성혐오’에 관한 문제가 제기된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인격으로서가 아니라 성적으로 대상화되는 현실을 폭로하고, 성폭력 근절 운동이나 미투운동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공통점이라 한다면, 어떤 운동이 활발히 이어질 때는 ‘자신의 문제’라는 깨우침이 동반된다는 점이다. 여러 정보를 얻고, 다양한 경험을 하며, 지금까지의 삶과는 다르게 살아야겠다는 순간을 만나는 것이다. 

― 통사적으로 봤을 때, 역사를 한 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여성의 힘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변두리에 머물러 있던 여성들이 자신들의 사회정치적 위치를 자각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실천에 나섰던 것이 역사를 한 발 앞으로 나아가게 한 힘이라고 할 수 있다. 후속 세대들은 이전 세대들이 사회정치적인 벽을 부수기 위해서 어떠한 노력과 헌신을 했는지 기억하고, 그 토대 위에서 역사 발전을 위한 실천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한 것이, 오늘날 여성들이 더 이상 타자화되거나 주변에만 머물지 않게 된 중요한 동력이 된 것 같다.
 

진행 이범진 기자 poemgene@gosc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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