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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그들은 ‘참인간’의 세상을 위해 싸웠다

기사승인 [340호] 2019.02.27  11:3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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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0호 커버스토리] ‘인간’의 눈으로 역사를 읽는 하희정 박사

   
▲ 하희정 박사 ⓒ복음과상황 오지은

100년 전 1919년의 3.1운동, 어둠의 시대를 뚫고 나온 그 운동의 힘은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 민족의 독립뿐 아니라 보편 인권과 평화의 정신을 외쳤던 그 운동 정신을 살펴보고자 감신대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는 하희정 박사(외래교수)를 만났다. 미국 버클리 GTU에서 ‘기독교 젠더 이데올로기와 동아시아 근대국가 담론 형성’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Ph.D.)를 받은 그는 역사 속 배제된 이들의 이야기와 시민사회의 성장 등에 주목해왔다. <국내외 독립선언문 다시 읽기: 3.1운동과 시민주권> <식민시대 기독교 젠더담론 구성과 한국교회의 대응: 1920-30년대를 중심으로> 등 여러 편의 연구논문 및 최근에는 “젠더로 읽는 기독교 2000년”이라는 부제가 달린 《역사에서 사라진 그녀들》을 저술하기도 했다. 인터뷰는 1월 28일 그의 연구실에서 진행했고, ‘민족 역사’ 너머 ‘인류 역사’의 눈으로 본 3.1운동이 그려졌다. 

― 언론 인터뷰가 처음일 텐데, 자기소개를 부탁드린다. 어떻게 신학대에 들어가게 된 건가?
충청도의 한 시골에서 부흥회 따라다니면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당시 시골교회 목사님이 여성 목회자셨는데, 그분을 롤 모델로 여기며 살았다. 고등학생 때 농촌 계몽을 다룬 《상록수》를 읽고 농촌 목회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감리교신학대학교(감신대)를 선택했다. 그때의 신앙이라는 게 부흥회를 통해 형성된 신앙이었다. 집회를 따라다니며 신앙 체험도 하고, 카리스마 있는 목회자를 우러러보면서 신앙생활을 했는데, 정작 1987년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큰 충격에 빠졌다. 그것이 스무 살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 왜 충격을 받았나?
내가 87학번이다. 1987년은 민주화운동이 절정이었을 때다. 당시 서울대생이던 박종철 열사가 고문으로 사망한 사건이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어 그해 말 대통령 직선제를 이뤄냈을 만큼 치열한 시기를 보냈다. 대학 새내기였던 그해 4월 감신대에서 ‘광주항쟁 사진전’을 보고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어떻게 광주에서 이런 무참한 학살이 일어나는가? 하나님은 그 시간에 도대체 뭘 하신 걸까?’ 내가 알고 있는 신앙의 세계와 현실이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걸 깨우쳤다. 내가 방언이나 치유 같은 은사를 사모하며 기쁨으로 교회를 다닐 때, 누군가는 죽음의 고통을 경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 아프게 다가왔다.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가 같은 하늘 아래 한국에서 벌어졌는데, 그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것도 충격이었다. 그 배신감과 더불어, 내가 얼마나 세상을 모르고 살았는지 처절하게 깨닫는 시기가 있었다. 사진전을 보고는 일주일 동안 밥을 못 먹었다.

― 역사를 전공하게 된 계기와 관련이 있나?
자연스레 인간의 고통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신은 왜 침묵하는가’를 끊임없이 물었다. 마침 그때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 널리 읽힐 때라 고민을 더 깊이 할 수 있었다. 대학교에 다니면서도 목회자가 되려는 마음은 남아 있었는데, 역사에 관심을 두니까 지난날 내가 꿈꿨던 농촌 목회는 결국 세상의 고통을 모른 채 낭만을 좇았던 거라고 자각하게 됐다. 대학원이 있는 것도 모르고 살았던 시골 출신이, 그렇게 대학원에서 한국교회사를 전공했다. 공부를 하다 보니 한국에서 일어난 일이나 국내 자료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많았다. 한국에 영향을 끼친 주변국이나 미국 관련 연구가 필요했다. 그때 제 선생님인 이덕주 교수님이 공부를 더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제안하셔서 미국 버클리 Graduate Theological Union(GTU)에 가게 됐다.

― 유학 생활은 어땠나?
GTU는 미국 내에서도 독특한 시스템을 가진 학교다. 아시아에 관심도 많고 열린 곳이다. 공부하기 좋았다. 가톨릭 3개 수도회와 개신교 6개 교단 학교들이 모여 컨소시엄(연합)으로 운영되는 시스템이었기에 경계를 넘나들며 공부할 수 있었다. 동시에 캠퍼스를 나란히 하고 있는 버클리주립대(UC버클리)와도 연계되어 있어 일반 역사를 공부하며 세계사적 관점에서 기독교를 보는 시야를 얻을 수 있었다. 특히 버클리주립대에 동아시아 도서관이 따로 있는데, 그런 환경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선 자리가 다르면 보이는 것도 다르지 않은가. 국내에서 벗어나 아시아의 한 부분으로 한국을 다시 들여다보니, 안에서 보는 것과 밖에서 보는 것이 참 많이 다르더라.

― 기독교 젠더 이데올로기와 동아시아 근대국가 담론 형성에 관한 연구(The Formation of Modern Womanhood in East Asia, 1880-1920: American Evangelical Gender Ideology and Modern Nation-Building)로 2010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은 이제 막 젠더 담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분위기다.
GTU에는 각 학교마다 여성 역사를 전공한 여성 교수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정말 잘 가르치셨다. 고대기독교 여성사 전문가였던 예수회 소속 메리 다나반(Mary Ann Donavan)과 버클리대의 수산나 엘름(Susanna Elm), 사회학적 관점으로 접근하는 성공회 소속 레베카 라이먼(Rebecca Lyman), 문화사적 관점으로 하버드 대학교에서 수십 년 동안 사상사를 가르친 경험이 있는 마가렛 마일즈(Margaret Miles), 미국 개신교 여성사 전공이면서도 아시아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키워준 란디 워커(Randi Walker) 등 좋은 교수들을 만나 많이 배웠다. 특히 책으로만 배웠던 여성신학자 로즈메리 류터(Rosemary Reuther) 교수에게 수업을 받고 석사논문 지도를 받은 것은 뜻밖의 행운이었다. 한국교회사로 시작해 서양사 전반과 여성 역사까지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고, 사회·문화사적 접근도 배우면서 논문을 쓸 수 있었다. 아시아 여성신학을 처음 배운 것도 그곳에서였다. 홍콩 출신 곽퓨이란과 함께 한국의 강남순, 현경 등의 신학자들이 대표적인 아시아 여성신학자로 소개되고 있었다. 열심히 공부해 후배들에게 넓은 시야를 열어주고 싶었던 마음이 커서, 듣도 보도 못한 자료를 보면 복사하는 게 일상이었다. 한국에 와서는 감신대에서 강의할 기회를 줘서 ‘교회사 속 여성’에 대한 강의를 했다. 최근에 젠더 문제가 이슈가 되면서도 오히려 토론 분위기는 더 경직된 것 같은데, 당시엔 가르치는 선생이 없어 혼자 원서를 찾아 읽으며 공부했지만 나름 진지하고 건설적인 대화들이 많이 오갔다. 지금은 말만 꺼내도 싸움이 되는 분위기라….

   
하희정 지음, 선율 펴냄

― 본론으로 들어가서, 최근에 쓴 《역사에서 사라진 그녀들》을 통해 “기록에서 배제되거나 기억에서 지워진 기독교 역사 속 여성들의 목소리”를 되살리는 시도를 했다. ‘동아시아 편’에서 3.1운동 이야기가 나오더라. 특히 송죽회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송죽회는 김경희와 황에스더(황애덕) 등 평양 숭의여학교 졸업생들과 재학생들이 중심이 된 항일 비밀 결사체다. 전국은 물론 해외까지 네트워크가 구축되어 있었다. 비밀리에 움직였기에 증언으로만 전해지는데, 졸업생들이 고향으로 내려가거나 전국 각지에 교사로 흩어지면서 전국 조직망이 구축됐다.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으기도 했고, 다들 목숨을 내놓고 활동했다. 특히 1919년 서울과 평양뿐 아니라 전국 네트워크를 가동해 3.1운동에 큰 역할을 했다. 2대 회장으로 활동한 황애덕은 일본 유학생으로 2.8 독립선언에 참여했다가 연행되기도 하고, 3.1 운동을 준비하기 위해 일본 여인으로 변복해 조선으로 들어와 파리강화회의에 여성 대표를 파견하는 일을 추진하기도 했다.

― 연통을 주고받기도 어려운 시대에 그런 역동적인 단체가 만들어졌다는 게 놀랍다.
남성들보다는 덜 의심받았기에 감시망의 허점을 파고들었을 것이다. 미션 스쿨이나 교회는 기독교 선교를 위한 종교 공간이었으나, 공식 비공식 모임을 통해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나라의 독립’과 ‘신앙의 구원’이 따로 있을 수 없었다. 물론 대다수 선교사들에겐 우리의 식민지 현실보다 선교가 더 우선되는 가치였다. 그래서 선교에 지장을 받지 않기 위해 정치적 중립을 고수했다. 하지만 피해자와 가해자가 있는 상황에서 중립을 지킨다는 것은 가해자의 폭력에 힘을 보태는 것이다. 선교사들 입장에선 종교인이 관여해서는 안 되는 ‘정치 문제’였는지 모르나, 우리에겐 한시도 지체할 수 없는 ‘민족 생존’의 문제였다. 여성들이 변복하고, 치마 속에 감추며 독립운동을 했던 이유다. 물론 선천에서 활동한 샤록스(A. M. Sharrocks)나 세브란스 의전 교수였던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 등 소수의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죽음까지 감수했다. 

― 그녀들이 일제의 감시 속에서도 3.1운동의 강한 동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민족의 어머니’가 되기를 자처했기 때문이라는 내용이 있더라. ‘여성’보다 ‘모성’이 강조된 것은 시대적 한계로 받아들여야 할까?
책에도 썼지만, “엄마”라는 이름만큼 세대와 공간, 성의 차이를 넘어 사람들에게 공감과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단어도 없다. 그럼에도 어머니에 대한 회상이 자칫 모성 예찬으로 이어져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이용되지 않을까 경계하는 시각도 이해가 된다. 다만, 서구적 경험에 근거해 여성과 가부장제를 설명하고 보편적 개념으로 이론화하는 것은 위험하다. 자칫 비서구 문화를 또다시 식민화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구 여성들과 달리, 아시아 여성들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 질서뿐 아니라 근대 사회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서구 제국주의의 다양한 식민주의적 문화를 경험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한국은 일제강점기라는 혹독한 시간을 헤쳐 나오며 미국이 주도한 개신교 선교의 영향을 가장 강하게 받았던 나라 중 하나다. 쉽게 말해, 이중적 식민화를 경험했다. 이 과정에서 ‘민족의 어머니’로 표상된 ‘모성’은 대중적 지지 기반을 확보하고 공격의 빌미를 최소화해 연대의 전선을 넓히는 데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었음은 분명하다.  

― 3.1운동에 대한 연구도 하셨는데, 어떤 점에 주목했나?
지난해 논문을 준비하면서 독립선언서들을 쭉 모아서 봤다. 만주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 일본에서 발표된 2.8 독립선언서(1919), 대한독립여자선언서(1919)… 그리고 그 전의 자료를 쭉 찾아보니까 1917년에 이미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박은식, 신채호, 조소앙 등이 서명자로 이름을 올리며 작성한 선언문 ‘대동단결선언’이 있었다. 중국 신해혁명(1911)에 이어 러시아혁명(1917.3)이 성공한 것이 민주공화혁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신케 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때 회의를 거쳐 나온 선언문이었다. 이미 정치체제를 공화정으로 바꿔야 한다고 거듭 논의되던 중 입헌군주제의 불씨가 꺼지면서 공화정으로 가자며 점을 찍은 게 대동단결선언이다. 이 선언문 초안 작성자는 조소앙이다. 대한독립선언서에 이어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기초한 사람이기도 한데, 일본에서 법을 공부한 분이다. 국제사회를 향하여 쓴 선언문이기에 굉장히 논리적이고 정교하다. 일제강점기가 한창일 때이지만, 국가의 미래를 그려냈다. ‘대한독립’이라고 했을 때 어떤 나라를 상상할 것인가? 다시 ‘조선’으로 돌아갈 것인가? 그렇다면 황제를 그대로 올려서 입헌군주제로 갈 것인가? 아니다. 그는 주권은 국민에게 있는 것이고, 주권은 국민에게 독자적으로 주어지는 것일 뿐 아니라 항구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재확인이다. 주권은 원래부터 국민에게 있는 것이다. 이 주권이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잠시 국왕에게 양도되었었는데, 양도권을 국왕이 포기한 것이니 원래 주인인 국민에게 그 주권이 다시 돌아왔다는 논리다. 그러니 한일강제병합이 일어난 1910년 8월 16일은 주권을 빼앗긴 날이 아니라 국가의 주인인 국민에게 주권이 회복된 날이 된다. 주권은 원래 국민의 것이었으니까. 주권은 황제라고 해도 다른 누군가에게 임의로 양도할 수 없는 것이라는 논리가 ‘대동단결선언’의 핵심이다.

― 굉장히 논리적이다.
그렇다. 그 논리에 따르면, 일본의 강제 점령은 무단 점거가 된다. 그때 처음으로 ‘민주공화국’이라는 개념을 독립 대한의 미래청사진으로 공식화한다. 지난 촛불집회 때 광장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소리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노랫말 아니었나. 그들의 염원이 이루어지기까지 100년이 걸린 거다. 조소앙이 이미 100년 전에 국제사회를 설득할 수 있는, 한 국가로서의 법률 요건과 명분 등을 정교하게 선언에 그려냈으나, 그는 초안을 썼을 뿐이다. 그 안에 담긴 사고와 사상, 논리는 이미 국민들 속에 어떤 형태로든 담겨 있던 것이고 조소앙이 논리적인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 대한독립선언서 때는 서명자 명단에 국외에 흩어진 대표들의 이름이 골고루 다 들어간다. 정교하다. 국민 주권의 항시성과 고유성을 말하고, 그다음 평등의 개념을 말한다.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삼균주의(三均主義)다.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간에 완전한 균등, 즉 평등사회의 원리로 정치적·경제적·교육적 균등(균권/균부/균지)을 청사진으로 제시한 거다. 이는 ‘대동평화사상에 기초한 것으로 세계 평화주의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국제사회를 압박하는 선언을 한 셈이다. 이것은 정치 세계에도 합치하지만, 하늘의 이치라는 논리로 이어진다. 우리 민족뿐 아니라 다른 민족에게도 적용되는 이치이며, 하늘의 명령이라고 확장한다. ‘국민은 하늘의 백성이다’ ‘영토는 남녀 모두의 공유 자산이다’ ‘누구도 양도하거나 독점할 수 없다’

― ‘대한독립여자선언서’(1919년 4월)의 의미도 궁금하다. 교과서에서는 못 봤다. ‘여성’을 앞세워 별도로 발표된 것은 최초이자 파격인데,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가?
위의 선언문을 접하고 여성들도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여성들도 주권자라고 외쳤던 거다. 들어야 할 대상이 다르기에 선언문의 성격도 조금 다르다. 국제사회를 향한 선언보다는 여성들의 참여를 독려한 성격이 컸기에 논리를 단순화하고 민족적 에토스에 호소한다. 이 선언서에는 한 나라의 구성요소로 역사, 국민, 영토를 꼽는다. 법률용어인 ‘주권’ 대신 ‘역사’를 넣은 것인데, 기존의 선언문을 보완하는 의미가 있다. 민중은 법률적인 주권을 가진 주체일 뿐 아니라 역사의 주체라는 뜻이다. 그래서 ‘민본주의’(民本主義)라는 단어를 꺼낸다. 한 나라뿐 아니라 인류 역사 자체 안에서 민중이 역사적 주체가 됨을 주장하는 개념이다. 선언문에 동서양 역사 속 여성들을 모범으로 소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 송죽회


―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3.1운동과 촛불집회가 ‘민중의 역사적 주체성’을 드러냈다는 측면에서 연결될 수 있겠다.
3.1운동은 기독교가 단독으로 주도한 것이 아니고, 모두가 함께 이룬 역사다. 누가 먼저, 더 많이 참여했느냐 따지는 것은 오히려 3.1운동의 의미를 축소할 뿐이다. 기독교가 먼저? 남성이 먼저? 여성이 먼저? 이런 것들을 따지며 들여다보는 것보다는 독립선언들 속에서 간절히 앙망하는 그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선언문 속의 어려운 개념들을 민중들이 어떻게 알았을까? 무슨 정보를 어떻게 얻고 광장에 나가 총칼에 맞섰을까? 일반 시민들이 독립 만세를 외치며 광장에 나갔다는 이야기는 그들에게 주인의식이 있었다는 뜻이다. 1890년대 〈독립신문〉이 나온 그 어간부터 시민사회가 성장하고 있었다. 왜? 정부가 무력화되면서 오히려 대중운동의 공간이 생겨났다. 아시아가 공화주의를 이루는 과정을 비교하면, 일본은 정부가 주도하고 지배하는 구조이고, 중국은 한족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이끈 구조다. 그러면 우리나라는? 정부로부터 아무것도 제공받지 못했던 시민들이 몸으로 싸웠다.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도 그 의식에 ‘이름’을 붙일 수 없을 뿐이지, 일제의 탄압에 맞서야 한다는 정신이 있었다. 역설이다. 여성들의 의식도 일본이나 중국보다 빠른 속도로 깨어나고 여성운동도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정부의 공백 상태로 인해 풀뿌리 민주주의가 빨리 성장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민주공화제”라는 단어를 명시해 헌법에 국민주권국가라는 이념을 새겨 넣은 것은 아시아에서 우리나라가 처음이다. 오늘날 시민광장이 열릴 수밖에 없었던 그 첫 출발을 몸으로 보여준 것이 3.1운동이다.

―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나라, 민주공화국을 100년 만에 잇는다?
홑옷 입고 러시아 벌판 다니며 동상에 걸리면서도 독립을 위해 싸웠던, 태극기 들고 만세 부르던 그들은 어떤 나라를 마음속에 그렸을까? 이런 질문을 우리가 잘 안 하는데, 3.1운동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촛불혁명은 불법적인 요소 하나 없이, 소수 개인의 호흡으로가 아니고 남녀노소가 모두 나서서 이룬 일이다. 폭력 없이 새로운 형태의 운동으로 국제사회에 민주주의를 보여줬다. 어느 날 갑자기 해낸 것이 아니라 100년 전부터 시작된 운동의 흐름을 붙잡은 거다.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리는 일이다. 이런 때 3.1운동 100주년을 찬양만 하고, 누가 주도했느냐 겨루면 안 된다. 목숨 바쳐 이루려 했던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이야기해야 한다. 이 기회에 조각을 모아 전체를 읽어야 한다. 그들이 바라고 우리가 바라는 그 나라의 조각을 맞춰가야 한다. 100년을 맞는 우리가 찬양 행사로 끝내는 게 아니라, 방향을 찾고 밑거름으로 삼는 법을 찾아야 한다.

― 3.1운동을 단순히 ‘실패한 운동’이라 보는 관점도 있다.
어떤 면에선 완벽하게 진압된 운동이라고 볼 수도 있다. 3.1운동이 일본의 무력통치를 문화통치로 바꾸었다는 데 의미를 두기도 하지만, 일제는 숨 쉴 공간을 터주며 더 교묘하게 통치를 했다. 경제적으로는 ‘민족독립’이 아닌 ‘민족생존’을 먼저 염려해야 할 만큼 민족경제가 파탄에 이르고 있었고 지성인들은 3.1운동의 한계를 성찰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국제사회와 연결되지 않으면 우리가 다 죽어도 모르겠구나 하는 의식이 생겼다. 그때 외국과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채널이 기독교였다. 이전 세대와는 또 다른 세대가 등장하는 시기다. 선교사들이 전해주는 교육만이 아니라 직접 외국에 나가서 공부를 하고, 민족 외에 다른 세계를 보며 의식을 형성하는 시기다. 3.1운동은 민족사뿐 아니라 세계사 흐름 안에서 근대 시민사회가 등장하는 관점으로 봐야 한다.

― 3.1운동을 세계사적 관점으로 본다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3.1운동 선언서에도 이미 세계평화주의와 시대정신이 들어가 있다. 저항운동으로서만이 아니라 연대와 참여, 그리고 국제사회의 역동성 안에서 재평가해야 한다는 얘기다. 시민 주권 회복의 관점으로, 시민사회가 발전해가는 흐름으로 봐야 한다. 정부는 무력화되었지만, 그럴수록 시민들은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소수의 민족 지도자 중심이 아니라 시민사회가 나름대로 몫을 나눠 공유하고 조율하고 집단적으로 실천한 역사다. 해방 이후의 민주주의 역사란 당시에 만들어진 이상을 시행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지키지 않은 것을 실현하려고 애썼던 것이 우리 민주주의 역사다. 우린 소중한 선물을 마련해 해방을 맞은 것이다. 일제 36년이 아깝지 않을 만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식민지 상황에서도 열매를 만들었고, 그 열매는 소수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만든 열매였다. 우리 스스로 우리 유산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 ‘인간’이기를 바랐던 이들의 역사라고 볼 수 있겠다. 《역사에서 사라진 그녀들》의 ‘여는 말’에 “오늘의 변화도 작은 힘들이 응축된 역사적 과정을 거쳐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라고 쓴 대목이 인상 깊었다.
3.1운동에서 시민 주권 개념이 어디서 나왔겠나? 사람이 누군가에게 종속된 신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깨우침에서다. ‘나도 사람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폭력에 분노한 것이다. 동학운동을 하고 일제에 저항한 것도 그 맥락이다. 당시 민중이 지금처럼 학벌이 높았던 것도 아니다. 지식에 접근할 수 있던 사람도 소수였다. 개신교에서 학교를 세웠다고는 하지만, 매우 적은 이들만 혜택을 입었다. 소수의 사람이 그 많은 사람을 다 움직일 수 있었을까? “민족자결주의”는 지식인들이나 이야기하는 것이지, 민중들은 ‘그냥’ 아는 거다. 단어를 모른다고 그 내용을 모르는 건 아니다. 내 이웃이 맞고 죽는 것을 지켜보고는 비인간성에 대한 분노가 끓어올라 일어난 운동이었다. 1월 중순에 들려온 고종의 사망 소식이 3.1운동의 중요한 도화선이 되었다. 그냥 자연사가 아니라 일제에 의한 독살이라는 소식이 시민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단지 그가 황제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부당하게 죽였기에 생기는 분노였다. 민중들이 땅을 빼앗기고 이웃이 억울하게 죽어가는 것을 본 것과 다르지 않은 죽음이었기에 분노한 거다. 인간으로 살고자 하는 축적된 갈망이 터져 나온 거다. 모두가 열망하는 것은 참인간(ανδροπος, 안드로포스)으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다.

   
▲ 하희정 박사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한국기독교여성운동사, 세계기독교여성사, 아시아기독교역사 등을 강의하고 있다. ⓒ복음과상황 이범진


― 지금의 한국교회는 여전히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기에 바쁜 것 같다.
자존감을 높이는 데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공감을 얻기 어렵다. 전체 안에서 지금의 구조는 좋아 보이지 않는다. 지금의 교회는 머지않았다. 끝이 오면 새로운 시작이 또 올 거다. 지금의 기독교가 아니라 새로운 게 등장할 수 있다. 그러나 시민사회는 끝나지 않는다. 국민이 살아 있으면 끊임없이 진화한다. 기독교도 살아있다면 함께 진화해야 하는데 멈춘 상태다. 진보하는 사회에서 정체는 곧 퇴보를 의미한다. 방법은 개방이다.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시민사회의 한 주체로서 합류해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집단 폐쇄주의가 이를 가로막고 있는 형국이다. 3.1운동의 유산에서 배워야 한다. 그때는 다른 종교와 연대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다. 지금은 없다. 새로운 바람이 들어오면 처음에는 불편하겠지만, 그게 소멸을 피하는 유일한 길이다. 이름을 내세울 때가 아니다. 얼마 전 방영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닌 단 하나의 이름 ‘의병’으로 기억되면 족하다고 한 말을 귀담아들어야 한다. 이름표 붙이는 걸로 ‘우월성’을 주장하려는 것은 못난 짓이다. 대한독립선언서에도 남녀 모두의 공유자산이라고 밝혔듯, 우리가 다 같이 한 것이다.

― 인터뷰 서두에 젠더 문제와 관련해 ‘말만 꺼내도 싸움이 되는’ 분위기를 언급했었다. 설문조사에 의하면 특히 20대 남성들이 성평등 담론에 적대적인 것으로 나온다.
젊은 청년들이 느끼는 박탈감이 있는 것 같다. 그들이 느끼는 위기감이나 심리적 박탈감에서 나온 현상이 아닌가 싶다. 위축되고 몰리면 원래 힘으로 누르려는 것이 일반적인 심리다. 청년들이 자신감을 회복하면, 극복할 수 있는 여지가 크다. 이런 구조를 만든 윗세대 즉 우리 세대의 책임이 크다. 일자리도 없고, 그렇다고 부모를 원망할 수도 없고, 가장 만만한 대상을 찾는 거다. 우리는 남녀를 떠나서 코너에 몰리면 본질이 아니라 겉모양만 보고 시비하다가 시간과 마음을 허비한다. 그러다 보니 성찰과 변화의 여지는 점점 줄어든다. 개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구조에서 생겨난 문제다. 우리가 참 인간으로 살기 위해 어떤 고민을 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질 기회를 상실해가는 것 같다.

―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젊은이들을 만나고 계신다.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수업에서 학생들을 만나면 학생들이 선생이다. 연구자의 영감의 원천은 학생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질문을 하고, 그러면 내가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니 그들이 나의 스승이다. 나는 강사 신분이기 때문에 늘 그 학기 수업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임한다. 학생들한테 강의 마칠 땐 “처음엔 내가 선생이지만 이제는 너희가 스승이다. 나는 떳떳하고 당당한 스승을 만나고 싶으니 서로 언제 만나든 부끄럽지 않게 만나자”고 말한다. 누군가에겐 자신도 스승이구나 생각하면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요즘 청년들이 다 가진 것 같지만, 하나도 가진 게 없는 세대이기도 하다. 부모님보다 더 낮은 경제적 성취를 하는 첫 세대라고 하지 않나.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여러 차원에서 부모보다 결핍된 성장으로 시작하는 게 이 시대 청년들이다. 그래서 뭔가를 시도하기를 겁내기도 하고. 어렵지만 역사에서 보면 막다른 골목에서 기어코 길을 찾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우리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우리 안에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가진 게 없어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환경이 자신감을 앗아가고 힘을 발견하지 못하게 하는 것 아닐까. 눈에 보이는 현실에 주눅 들지 않으면 좋겠다. 충분히 새로운 길을 만들어갈 수 있다. 역사 수업을 하면서 깨닫는다.

   
▲ "3.1운동 역시 적대가 아니라 평화를 말했고, 배타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세계시민이 되는 길을 열었다."  ⓒ복음과상황 이범진

― 연구실에 책이 굉장히 많은데, 독자들께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나?
갑작스러운 요청이라…. 고전 중에 에라스무스의 《우신 예찬》을 추천한다. ‘우신 예찬’은 ‘바보 예찬’이라는 뜻이다. 기독교의 엄격주의, 거룩주의가 세상을 지배해서 거기서 조금만 어긋나면 폭력이 일어나던 때, 예수의 이야기에서 웃음의 지점을 찾고 때로는 바보 같은 웃음을 던져 주는 책이다. 저자인 에라스무스는 신학자이자 사제였으나 수도원에 갇히지 않고 세상을 살폈다. 요즘같이 사회가 예민해 있고 극단적인 언어들이 난무하는 시기에 우리나라 마당극처럼 한마디 툭 던져서 모두 긴장을 풀게 하는 그런 책이다. 여유 있게 삶을 웃으며 바라보고, 뭐 좀 못났으면 어떤가? 완벽한 말을 할 필요는 없다.
이 책에는 우리가 버린 기독교의 신학도 많이 담겨 있다. 그런데 고전이라서 무턱대고 읽으면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 요한 하위징아의 《에라스뮈스》(연암서가)를 먼저 읽으면 좋겠다. 빛이 있으면 가까이에 그림자도 있기 마련이듯이, 종교개혁도 어두운 그림자를 많이 만들어냈다. 교리를 절대 진리로 숭상하고 배타적 민족주의가 팽창해 결국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나. 그래서 당시의 언어들도 상당히 대결적이고 적대적이고 배타적이다. 모두가 성경을 말하지만 자기의 해석만 옳다고 주장하던 때에, 유럽이 갈기갈기 찢기던 그 시대에 세계시민사회를 말했던 사람이 에라스무스다. 힘의 대결을 넘어서서 보편가치를 공유하려 한 인물인데 이 책은 그를 다룬 평전이다. 하위징아는 히틀러 나치 시대를 살았던 작가다. 그 적대와 허무가 가득한 시대에 에라스무스를 소환해 새롭게 읽어내는 것이다. 모두가 이기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을 때, 에라스무스는 포용의 언어를 썼다. 당시의 교회가 루터가 아닌 에라스무스를 선택했다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상상하곤 한다. 그렇게 많은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한국교회가 루터의 언어를 너무 숭상하는 것도 문제다. 대결의 시대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그의 언어는 상당히 적대적이고 때로는 증오로 가득 차 있다. 언어는 곧 그 언어에 담긴 세계관의 소환인데, 우리가 계속 루터를 노래할수록 증오의 세계관을 끌어들이게 된다. 적대와 혐오가 가득한 이 시대에는 오히려 에라스무스를 신학적으로 재조명해야 할 때다.
3.1운동과 에라스무스는 전혀 관계없는 것 같지만, 시민사회 등장의 맥락으로 보면 분명 짚어야 할 사건이자 인물이다. 3.1운동 역시 적대가 아니라 평화를 말했고, 배타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세계시민이 되는 길을 열었다. 온전한 시민사회는 에라스무스처럼 해학적이고 보편적이고 휴머니즘적인 언어로 채워지는 사회다.


정리 이범진 기자 poemgene@goscon.co.kr

하희정 poemgene@goscon.co.kr

<저작권자 © 복음과상황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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