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호 역사에 길을 묻다 : 공의회의 사회사 03] 제1, 2차 라테란 공의회

 

 

1. 최초의 서방 공의회, 그 배경 읽기 
지난 호에서는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통해 동·서방 교회가 언어와 문화적 차이로 분리되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이후 350년이 지난 12세기 중반에 잇따라 열린 제1, 2차 라테란 공의회는 과거의 공의회들과 구별되는 뚜렷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우선, 서방 지역에서 최초로 열린 공의회입니다. 공의회 명칭은 대체로 개최된 지역명을 따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몇 있습니다. 라테란 공의회나 가장 최근에 열린 바티칸 공의회가 그렇습니다. 두 공의회는 개최 장소인 로마 교황청 궁전을 이름으로 삼은 경우입니다. 제1차 라테란 공의회는 로마 교황이 최초로 소집하여 로마 교황청에서 개최되었으며 라틴어로 기록된 공의회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1054년 동·서방 교회가 공식적으로 분열되었기 때문입니다.

   
▲ 라테란 공의회가 열린 로마 교황청 라테란 대성전 (위키미디어 코먼스)


1054년의 동·서방 교회 분열로 인해 서유럽은 교황과 세속 군주들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 지형이 요구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유럽의 정치적 패권을 둘러싼 교황과 세속 군주들 사이의 갈등이 지속되는 가운데, 동·서방 교회 분열 이후 70여 년 만에 공의회가 열립니다. 이전까지 열린 공의회가 동로마제국 황제가 주도권을 쥐고 소집하여 교회 문제에 간섭한 무대였다면, 서방 교회 공의회들은 교황이 서유럽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해법을 풀어나간 현장입니다.

중세에 대한 단순하지만 강력한 편견 중 하나는, 서유럽 중세를 교황권이 지배하는 시대로 보는 관점입니다. 서유럽에서 가톨릭이라는 종교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부인할 수 없으나, 이것이 교황 지배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지는 않습니다. 

교황은 종신직이지만 선출직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교황 선출은 본질적으로 누군가의 지명을 받아야 하는 정치적 사건입니다. 교황을 가리키는 명칭 중 하나인 ‘로마 주교’는 로마의 유력 귀족이나 황제의 영향력 하에 선출되었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그런 사례는 아주 흔하게 찾을 수 있습니다. 밀라노의 주교가 된 성 암브로시우스 역시 정무적(政務的) 고려에 의해 평신도에서 단 몇 주 만에 주교직에 오른 인물입니다.

교황은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잉글랜드 등 세속 국가의 군주들을 견제와 균형을 통해 통제할 수 있는 정치 감각과 능력은 물론, 국제정세를 읽고 활용할 수 있는 외교적 감각과 능력 또한 갖추어야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교회가 세속 군주들과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종교적 힘의 사용, 즉 교회의 권한으로 세속 군주를 파문하거나 특정 국가에 성무(聖務) 정지를 명령하는 일 등도 무시할 수 없는 역할이었습니다. 그러니 세속 군주들의 입장에서도 교황 선출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11세기 중엽부터 가톨릭교회는 세속 권력의 영향력으로부터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추기경단에서 교황 선출을 하도록 결정합니다. 그 후로 ‘콘클라베’라고 불리는 정교한 교황 선출 절차가 마련됩니다. 문제는, 추기경의 수가 당시 세속 군주의 영향력 정도에 따라 정해지는 한계가 있었다는 거지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영향력이 강한 경우 추기경단은 신성로마제국 출신이 다수를 차지했고, 이는 교황 선출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프랑스 왕의 영향력이 확대된 후로는 줄곧 프랑스 출신의 교황이 선출되는 결과 역시 자명한 일이었지요.

 

2. 교황권과 세속권의 다툼

서임권 논쟁
중세 유럽 사회에서 가장 큰 이슈 중 하나는 교황권과 세속권의 관계 설정이었습니다. 이는 가장 현실적인 문제들을 야기했습니다. 영향력 있는 세속 군주들이 주교들을 선출하던 전례에 따라 중세 서유럽 세속 군주들의 성직자 임명은 관행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성직자는 교회에 속한 신분인 동시에 국가의 주요 직책을 맡는 공무원 신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해보면 우선, 성직자 입장에서는 국가와 교회 사이 관계에 대한 고민이 있습니다. 다음, 세속 군주와 교황의 관계 차원에서는 ‘누가 더 상위 권위인가’ 하는 갈등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독일 왕과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차이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당연직으로 독일 국왕입니다. 하지만 교황이 대관식을 집전하지 않으면 누구도 황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교황이 우월한 권위라고 할 수 있을까요? 상황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교황권이 강할 때는 그럴 수도 있겠으나,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세속 권력을 이용하여 교황을 폐위하거나 직접 지명하기도 했으니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962년 교황 요한 12세가 로마에서 오토 1세(912-973)의 황제 대관식을 거행합니다. 서유럽에서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한 이 나라는 후에 신성로마제국으로 불리게 됩니다. 같은 시기 비잔틴 제국의 동로마 황제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정교일치 제국’의 서유럽판이 탄생한 것입니다. 서유럽의 봉건체제 하에서 황제는 제국의 귀족과 지방 영주, 주교, 수도원장과 주종계약을 맺어 봉토를 하사하고 세속적인 권한들을 부여했습니다. 봉신들은 그 대가로 황제에게 충성 서약을 해야 했지요. 문제는 황제가 주교나 수도원장들에게 수여하는 권한 범위가 세속적 권한과 종교적 권한의 경계를 넘나드는 수준이었다는 것입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1017-1056)는 주교를 임명하면서 주교의 종교적 상징인 반지와 지팡이를 하사하는 의식을 진행했습니다. 자신을 서유럽의 실질적인 후견인으로 주장하는 교황 입장에서는 세속 권력이 교회 권력에 깊숙이 관여하는 이 관례가 못마땅했습니다. 그리하여 세속 군주에 의한 성직 서임(敍任)을 놓고 교황과 세속 권력 사이에 일련의 갈등이 빚어집니다. 역사는 이 갈등을 ‘서임권 논쟁’(Investiture Controversy)으로 기록합니다. 언뜻 보기에 이 서임권 논쟁은 종교 권력과 세속 권력 사이의 갈등 같지만 실은 좀 더 복잡합니다. 세속 군주가 주교나 수도원장들에게 영지를 수여하는 것은 주교들이 세속 권력을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즉, 종교 권력이 타락할 여지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실제로 세속의 힘을 얻게 된 교회는 다양한 방식으로 부를 축적했습니다. 

한편, 중세 유럽의 가톨릭교회는 제도적으로 혼인을 허용하지는 않았지만 성직자들은 암암리에 아내와 첩, 자식들을 두고 있었습니다.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는 일이 조선시대에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그래서 아들을 조카라고 부르고 그 조카들을 성직에 꽂아 주었습니다. 정실 인사를 의미하는 ‘네포티즘’(nepotism)이 조카를 의미하는 ‘네포스’(nepos, nephew)에서 나온 연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러한 중세 교회는 어떻게 작동했을까요? 당시 교회는 기본적으로 수도원, 고위 성직자, 귀족, 부자 등이 후원자가 되어 세워졌는데, 이렇게 설립된 교회의 재정 관리는 교회의 최고 성직자에게 맡겼습니다. 교회 사제들에게 주는 생활비를 성직록(benefice)이라고 하는데, 교회가 세워지면 성직을 임명하고 성직록을 수여할 권리가 발생합니다. 만약 교회가 수도원 소유라면 대개 수도원장이 성직록을 관리합니다. 그런데 이미 한 교회나 수도원을 보유한 성직자는 자신이 새로 세운 교회에 거주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 경우, 한 성직자가 여러 교회를 관리하는 ‘복수겸직’(pluralism) 문제가 생겨납니다. 복수겸직은 당연히 ‘부재성직’(absenteeism)을 낳습니다. 몸이 하나인데 동시에 여러 곳에 가서 성직을 수행할 수 없으니 대체자를 구해 그에게 자신이 받는 성직록 일부를 지불하고 교회 관리와 운영을 맡깁니다. 이렇게 교회를 몇 군데 소유하면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구조가 완성됩니다.

성직자의 은밀한 혼인 및 축첩, 성직매매, 복수겸직과 부재성직 등은 교권과 속권의 갈등과는 별개로 당시 유럽의 사회 문제였습니다. 주교들이 세속 군주로부터 영지를 하사받을 뿐 아니라 종교 권력의 상징인 반지와 지팡이까지 받았다는 점은, 세속 권력과 차별성이 없는, 권력과 유착된 종교의 문제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례입니다.

그레고리우스 개혁
서임권을 둘러싼 논쟁에서 교황에 의한 주교 서임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세속 군주들과 다투기 위해서는 종교 권력의 내부 갱신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실질적으로 세속 권력을 견제하는 조치들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중심에 선 중요한 인물이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1015-1085)입니다. 그는 두 가지 조치로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 연재 순서
1. 왜 지금 ‘공의회’인가? : 사회사 관점으로 교회사를 읽어야 하는 이유
2. 동서교회 분열의 서막인가, 확장인가 :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3. 위로부터 이뤄지는 교회 개혁의 전형 : 제1, 2차 라테란 공의회
4. 제3차 라테란 공의회
5. 제4차 라테란 공의회
6. 제 1차 리용 공의회, 제 2차 리용 공의회
7. 비엔나 공의회 
8. 콘스탄츠 공의회
9. 바젤, 페라라, 피렌체 공의회
10. 제5차 라테란 공의회
11. 트렌트 공의회
12. 제1차 바티칸 공의회
1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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