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1호 역사에 길을 묻다] 칼 바르트의 《로마서》 읽기

‘기억의 지층’으로부터
사랑하는 아들아, 네 편지 잘 받았다.
말문이 틔었을 때부터 너는 나의 대화 파트너였지. 어린 아이들의 순전한 질문에 모든 부모가 놀라곤 하지만, 너는 곧잘 철학적인 질문과 생각을 많이 해서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지. 너랑은 대학생들과 토론하듯 대화를 나누던 기억이 나는구나. 그런데 ‘제논의 역설’을 시간으로 해결할 수 있겠다는 너의 탁견을 기억하지 못하다니, 이런이런 이런…(그런 일이 너무 흔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네가 물었지. 타자(他者)란 누구인지,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 그 질문을 받자마자 나는 예상치 못한 책과 저자가 생각났단다. 타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신학 분야의 고전에서 타자에 관한 책이 어떤 것이 있을까, 묻자마자 바르트의 《로마서》(복있는사람)가 생각나더구나. 하나님을 가리켜 ‘전적 타자’(Wholly Other)라고 한 것이 모종의 말할 거리를 제공해주지 않을까 싶더라. 그래서 다시 읽어보았더니 이게 웬일, 그야말로 보물 창고가 따로 없더구나. 속으로 얼마나 환호했던지. 기억이란 실로 신기하구나.

그 책은 1995년 1월과 2월께에 읽었다. 어떻게 그 시점을 정확하게 기억하냐고? 95년에 아빠가 박사 과정(Ph.D.)에 입학했거든. 공부하기 전에 신학의 뿌리랄까 기초를 다져야겠다고 마음먹었고, 그렇다면 바르트의 《로마서》를 꼭 읽어야겠다 생각했지. 2천 년 역사에서 로마서와 로마서 주석이 시대를 뒤흔들고 새로운 시대를 창조했던 교회사의 증거로 보나, 종교철학 및 현대신학이라는 내 전공을 고려할 때 결론은 《로마서》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후배들을 끌어 모아 낑낑 대며 영역본으로 읽었지.

그때 내게는 낯선 용어가 있었어. 전적 타자. 하나님을 지칭하는 바르트의 용어였어. 인격적인 신을 저리 객관적이고 무덤덤하게 지칭하는 게 생소했지. 당시 ‘타자’라는 용어가 우리나라 학계에 유통되지 않았거나 아니면 내가 몰랐던 거겠지. 그래서 ‘타자가 뭐지’ 하고 넘어갔지. 이제와 생각하면 타자는 그냥 ‘남’ 또는 다른 것인데 말이야.

그런데 ‘타자 이해’를 바르트에게서 찾았을 때 예상치 못한 수확이 있었단다. 사르트르 전문가인 변광배에 의하면, 들뢰즈는 사르트르의 타자론이 서구 철학사에서 ‘타자에 관한 최초의 위대한 이론’이었다는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더구나.(《장 폴 사르트르》, 살림, 4쪽). 찾아보니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가 1943년,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는 1947년에 출간되었더라. 그런데 바르트의 《로마서》는 초판이 1919년, 전면 개정판은 1922년에 나왔거든. 그러니 들뢰즈의 말은 수정되어야 해. 서구 철학사에서 최초이자 최고의 타자론은 칼 바르트라고.

또 하나. 요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가히 전쟁이라고 할 만한 논쟁이 벌어지는 핵심 쟁점인 ‘믿음’을 바르트는 ‘신실함’으로 번역했더구나. 다시 읽으면서 어찌나 놀랐던지. 1919년에 초판이 출간되었고, 우리가 읽는 재판은 1922년판인데, 오늘날 ‘새 관점 학파’(전통적인 ‘칭의론’을 1세기 유대주의 관점으로 새롭게 해석하는 신학자들, E. P. 샌더스, 제임스 던, N. T. 라이트 등이 이에 속한다.-편집자)가 말하는 것을 반세기 전에 선취하다니, 그것도 신약학자가 아닌 조직신학자가 말이지. 놀랍다 못해 경이롭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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