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4호 제국과 하나님 나라 : 바울 서신 읽기 07] 빌립보서 다시 읽기 1

   
▲ 빌립보에 남아 있는 6세기의 바실리카(교회당) 유적. (사진: CC BY 2.0/Carole Raddato)

바울의 편지 다시 이해하기
신약성서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제일 먼저 관심을 갖는 장르는 복음서일 것이다. 필자도 처음 복음서 속 예수의 말과 행동들을 읽으며 놀라기도 하고 감동을 받기도 했다. 또한 복음서는 기독교 공동체에서 가장 많이 설교에 인용되는 책일 것이다. 이와 더불어 누가복음의 2부로 쓰인 사도행전은 읽는 이로 하여금 재미와 감동에 빠져들게 한다. 사도들의 용기와 행적, 그리고 바울 사도의 드라마틱한 체험이 담긴 선교여행을 읽어가다 보면 눈앞에 2천년 전의 풍경이 펼쳐지고 아레오바고에서 목소리를 높이던 바울 사도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이와 달리 (복음서만큼의 분량을 차지하는) 바울의 편지로 들어서면 여러 어려운 표현들과 논증들이 연속되며 마치 잔소리 같은 이러저러한 충고와 경구들을 만나게 된다. 이야기체가 아니니 쉽게 읽히지도 않을뿐더러 잘 이해되지도 않는다. 정작 이 편지들을 받은 대상들은 데살로니카 또는 고린도의 교회들이기 때문이다. 왜 신약성서에는 좀 더 많은 분량의 다른 복음서들이 실리지 않았을까? 이런 어려운 신학 논의보다는 예수의 어린 시절이나 사도행전 이후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이런 질문이 꼬리를 물다가 필자가 만나게 된 질문은 ‘바울은 왜 편지를 썼을까?’였다.

이 질문은 겉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조금 복잡한 주제들을 내포하고 있다. 바울은 처음부터 로마제국의 도시 곳곳에 에클레시아(교회)를 세워 몇몇 거점을 확보한 후, 서신을 중심으로 에클레시아 운동을 할 계획을 세우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편지는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담는 매우 중요한 매체가 되었으며 그 편지가 아직까지 성서에 남아 기독교 공동체의 중심을 형성하는 메시지가 되었다. 편지 자체가 갖는 의미가 그만큼 큰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바울의 편지를 더 이상 편지글로만 이해하지 않는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자 권고로 받아들이고, 구원에 대한 설명과 증거로 본다.

근대에 이르러 신구약성서들은 소위 ‘고등비평’ 또는 ‘역사비평’이라 불리는 방법을 통해 해석되기 시작했다. 창세기의 창조에 대한 글들은 실제 6일간의 창조 보도가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 고백된 ‘뜻으로 본 세상의 시작과 인류의 기원’에 대한 글이며 사실상 오경은 각기 다른 전승 기록들이 모여 있는 문서라고 보기 시작한 것이다. 복음서의 예수에 대한 여러 기록 또한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게 되었다. 학자들은 원래의 모습에 가까운, 소위 ‘역사적 예수’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면 복음서 기록들 중에 (근대의 눈으로 보았을 때) 역사성이 부족한 이야기들은 복음서 저자의 관점에 따라 편집, 가필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여러 기적 이야기들은 예수의 신적 소명과 능력을 강조하기 위한 이야기로 해석되었다.

이러한 근대의 날카로운 비평도 미칠 수 없었던 성서의 기록이 있었는데, 신약성서 안에서는 바울의 편지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곳에는 기적 이야기도, 여러 문헌들이 편집된 흔적도, 이해하기 힘든 수수께끼 같은 비유나 예언도 찾기 어렵다. 마치 어떤 유명한 목사에게 보낸 편지인 듯, 2천년의 세월을 훌쩍 넘어 우리 손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비록 이해하긴 쉽지 않지만, 바울의 편지가 가진 수많은 시간적 공간적 사상적 차이들을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과 선입견으로 해석에 도전한다. 여기에 ‘성서=하나님의 말씀’이란 생각까지 덧붙여지면, 어떤 이들은 금지옥엽 같은 하나님 말씀이 금방 잡아 올린 물고기처럼 펄쩍 뛰며 우리 앞에 놓인 듯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바울은 편지를 쓸 때, 자기 나름의 명확한 목적이 있었다. 그 편지를 받는 사람이 명확했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바울의 글들은 바울의 글이지 일점일획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글이 아니다. 하물며 바울은 예수도 아니다.

바울 시대에 편지는 현시대의 편지와는 그 목적과 형식이 달랐다. 현대의 편지로는 대표적으로 이메일과 손편지, 그리고 관공서나 사업상 보내는 여러 형식의 공문서 등이 있다. 이런 편지들은 보통 직접 얼굴을 보고 말하기 힘든 감정을 전달하거나(연애 편지), 자신이 쉽게 만날 수 없는 대상에게 글을 전하거나(팬레터), 공적인 일을 처리할 때 그 증거를 남기기 위한 목적으로 쓰인다. 쉽게 말하자면 대면 접촉을 전제로 부수적인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사용된다. 반면에 바울의 편지는 전화도, 화상통화도, 편리한 대중교통도 없는 시대의 산물이다. 따라서 어떤 즉각적 만남이나 전화를 통해 편지에서 생길 수 있는 오해를 해소할 가능성이 없다. 그런 시대의 편지는 지금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편지나 이메일과는 매우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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