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setNet1_2

교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다

기사승인 [346호] 2019.08.28  11:43:28

공유
default_news_ad1

- [346호 역사에 길을 묻다: 공의회의 사회사 08] 콘스탄츠 공의회(1414)

1. 교회 대분열(1378-1417)
1309-1377년에 이르는 약 70년간의 프랑스 아비뇽 교황청 시절(아비뇽 유수기)은 유럽사에서 중대한 변곡점을 맞이한 시기였습니다. 이 기간에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긴 클레멘트 5세부터 아비뇽을 떠나 로마로 돌아간 그레고리우스 11세까지 총 7명의 교황이 거쳐갔습니다. 교황청이 프랑스 왕의 영향하에 있었던 만큼 이들 모두는 프랑스인이었습니다.

자연히 국가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교황청은 중앙집권화되어 가는 국가체제를 따르게 됩니다. 이에 교황청은 점차 독자적인 재원 마련 체계를 만들어갑니다. 대표적인 예가 교회 재산의 십일조를 교황청에 내는 것과, 주교가 된 성직자의 첫 해 소득을 초입세(annates)라는 명목으로 교황에게 바치게 하는 것 등입니다. 이러한 체계 형성이 시사하는 바는 의미심장합니다. 우선은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최상위 계서(階序)를 형성하고 있던 로마가톨릭 교황청이 그 위상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불과 120-130년 전만 해도 유럽 봉건제의 최상위 지배자로 개별 국가로부터 세금을 받아 영위하던 교황청의 수입원 감소입니다. 그에 대한 대응으로 국가 내 성직자들에게 여러 명목으로 과세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자연히 주교를 비롯한 고위 성직자 선출에 뇌물이 오가는 현상을 낳습니다.

교황에게도 순종해야 하지만 관료로서 국가에도 충성해야 하는 이중적 지위를 지닌 성직자들에게 이는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성직자가 친국가 성향을 띠느냐, 친로마 성향을 보이느냐에 따라 국가와 교회 사이의 균형추가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14세기 말의 잉글랜드 종교개혁가 위클리프(1320?-1384)는 “왜 잉글랜드 사람들이 낸 돈이 로마로 흘러들어가야 하는가?” 하고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기도 했지요.

지난 호에서 살펴본 것처럼,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도 따지고 보면 가톨릭 교회가 세속국가의 영향력 아래로 종속되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입니다. 유럽에서 서서히 근대적 형태의 국가 체계가 형성되어가는 흐름과 맥을 같이 합니다. 이 교회 대분열(The Great Schism, East-West Schism)의 시기와 상당 기간 중첩되는 백년전쟁(1337-1453) 동안에야 비로소 잉글랜드인과 프랑스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구별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 콘스탄츠 공의회 앞에 선 얀 후스(그림: 위키미디어 코먼스)

프랑스 아비뇽에 머물던 교황청을 다시 로마로 복귀시킨 교황은 그레고리우스 11세(재위: 1370-1378)였습니다. 그 역시 프랑스 출신이었지만, 유럽 내에서 비등하는 교황청의 로마 복귀 요청을 무시할 수 없어 1377년 1월 로마로 복귀합니다. 하지만 이듬해 그의 사망으로 교황 선출을 놓고 또 다른 혼란에 빠집니다. 로마 시민들이 로마 사람을 교황으로 뽑으라는 시위를 연일 벌였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추기경단은 로마 사람을 교황으로 선출하되, 여전히 프랑스의 영향력을 교황에게 행사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1378년 4월 이탈리아인 우르바누스 6세가 교황으로 선출됩니다. 하지만 선출된 직후 교황은 프랑스로 대표되는 세속권력으로부터 교회를 구별하고자 분명한 선을 긋게 됩니다. 추기경들이 세속 통치자로부터 뇌물이나, 선물, 연금 등과 같은 재정지원 받는 일을 엄격하게 금지합니다. 이는 누가 보더라도 당시 프랑스 왕 샤를 5세를 고립시키고자 하는 의도였습니다.

프랑스인 추기경들은 이 상황이 달갑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르바누스 6세 선출이 로마 사람을 교황으로 뽑으라는 로마 폭도들의 압박 때문에 이루어진 불법적인 결과라고 비판하면서 아비뇽으로 돌아갑니다. 이후 1378년 9월 20일 아비뇽 추기경단은 클레멘스 7세 교황을 선출합니다. 가톨릭 교회에 2명의 교황이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며 대립하게 되는 교회 대분열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교회 대분열은 1417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해소되기까지 40년간 지속됩니다.

   
▲ 아비뇽에서 로마로 복귀하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그림: 위키미디어 코먼스)

이 분열은 교황이 2명이 세워진 사건 이상입니다. 대립하는 두 교황 중 누구를 지지할 것인가를 놓고 전 유럽이 분열되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함의입니다. 예컨대, 프랑스 아비뇽에 근거를 둔 교황을 지지하는 세력으로는 프랑스, 아라곤, 카스티야와 스코틀랜드 등이 있었습니다. 로마 교황은 신성로마제국, 잉글랜드, 덴마크, 헝가리, 포르투갈, 북부 이탈리아 도시국가 등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공교롭게도 아비뇽 교황 지지파와 로마 교황 지지파는 종교적인 색깔로 구분되기보다는 대부분 정치적 대립 관계에 놓인 국가들로 나뉩니다.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의 대립,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대립, 아라곤, 카스티야와 포르투갈의 대립 등으로 구도가 그려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것은 1417년의 교회 대분열 종식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봉합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정확히 100년 후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유럽의 분열은 항구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교회 대분열로 불리는 이 사건은 여러모로 1517년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전조가 됩니다. 이 점이 종교개혁을 그저 종교적 신학적 사건, 교회 내부의 사건으로 보아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종교개혁을 유럽사의 문맥 안에 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놓치기 쉬운 종교 너머의 맥락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한국의 개신교회들이 즐겨 외치는 ‘종교개혁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구호가 자칫하면 시대착오적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2. 인정되지 않은 역사, 피사 공의회(1409)
우리가 읽어내야 할 교회 대분열의 핵심은 대립 교황이 난립한 가톨릭 교회의 타락상이 아닙니다. 국민국가 형성과 그에 따른 민족의식의 등장이, 하나의 유럽을 지탱하는 축이 되어왔던 가톨릭 교회에는 돌이킬 수 없는 위협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일반 유럽사에서 종교개혁을 바라보는 주된 시각 중 하나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분열보다 ‘국가와 교회의 관계 재설정’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대분열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는 이러한 시각이 더 유효함을 보여줍니다. 유럽의 교회가 둘로 쪼개진 위기 상황에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은 역시 공의회를 소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교회법에 따르면 공의회의 소집권자는 교황인데, 대립하는 두 교황이 생긴 상황에서 공의회 소집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피에르 다이(Pierre d'Ailly)나 장 제르송(Jean Gerson) 같은 신학자들은 교회법의 문자에 매이지 않고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 결과 대립하는 양측 추기경들이 서로 합의하여 교회 대분열을 해결하기 위한 공의회를 소집했습니다.

이 공의회는 1409년 이탈리아의 피사에서 열리게 됩니다. 당시 교황은 아비뇽의 베네딕투스 13세와 로마측 그레고리우스 12세였습니다. 이 공의회에서는 두 교황 모두에게 교회 분열의 책임을 물어 폐위를 결정합니다. 그리고 양측 추기경단이 제3의 인물을 지명하여 알렉산데르 5세 교황으로 세워 1409년 7월 7일 새 교황의 대관식이 열립니다. 얼마 못 가 그가 사망하자 뒤를 이어 요한 23세 교황이 선출됩니다.

하지만 이 피사 공의회의 결정은 해결책이 되기보다는 더 큰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폐위된 두 교황 모두 물러나기를 거부하고 자신을 따르는 세력을 규합하여 여전히 정통성을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유럽 교회는 전무후무한 3인의 교황이 난립하는 시대에 접어들게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기지요. 이 피사 공의회는 가톨릭 공의회의 계보에서 빠져 있습니다. 왜 피사 공의회는 역사 속 공의회로 인정되지 않았을까요? 이에 관해서는 여러 논쟁점이 있는데, 소집 목적인 교회 분열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두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교회법에 따라 교황이 소집하지 않은 공의회는 적법하지 않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추기경단이 공의회를 소집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누가 소집할 권한이 있는지 여부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고, 적법하지 않은 교황이 임명한 추기경단 역시 적법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는 이유입니다. 그러니 적법하지 않은 추기경단이 소집한 공의회는 그 자체로 무효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 자체로 모순이 있습니다. 이 공의회에서 선출된 알렉산데르 5세의 후임인 요한 23세가 콘스탄츠 공의회를 소집했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요한 23세 교황이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폐위되지만 콘스탄츠 공의회에 대한 적법성 논란은 없습니다. 그러니 이 피사 공의회가 역사에서 인정되지 않은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이 공의회에서는 교회 분열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야 하는 권한과 책임 소재에 관한 논쟁을 야기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공의회주의’(conciliarism)라는 것이 등장하는데, 교회의 최상위 결정권자는 교황이 아니라 교회 대표자들이 모인 공의회라는 주장이지요. 대립 교황으로 교황권의 권위가 추락한 틈을 비집고 등장한 대안적 주장입니다. 콘스탄츠 공의회와 그 다음에 열린 공의회에서 교황주의자들(papalist)과 공의회주의자들(conciliarist) 사이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그 승부의 끝이 드러납니다. 미리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공의회주의자들이 패배했고 그 결과 피사 공의회는 역사에서 인정받지 못한 공의회가 된 것입니다. 

3.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
교회 분열 문제를 해결하고자 소집된 피사 공의회가 해결점을 찾지 못하자, 오히려 3인의 교황이 난립하게 된 상황에서 교회는 유례없이 신속하게 또 다른 공의회를 소집합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기스문트의 강한 압박으로 소집되는데, 피사 공의회에서 선출된 교황 계열인 요한 23세가 1414년 독일의 콘스탄츠에서 공의회를 개최합니다. 이 공의회의 소집 목적은 교회 대분열 종식, 이단 문제 해결, 교회 개혁, 세 가지입니다.

교회 대분열 종식
콘스탄츠 공의회는 교황의 권한보다 주교단의 권한이 더 크다는 공의회주의의 우위성이 압도한 공의회입니다(실제로 교황 역시 로마 주교). 이 공의회에서는 대립 교황들인 요한 23세와 로마의 그레고리우스 12세, 아비뇽의 베네딕투스 13세를 모두 폐위하고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고자 합니다. 이 공의회의 특징은 교황 선출 절차에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추기경들이 개인적인 자격으로 투표하던 것을, 유럽 대학 국민단(nation)이라고 불리는 국가 단위가 투표권을 행사하게 된 것입니다. 투표권을 가진 추기경들의 편향된 국적 구성이 가져올 수 있는 표심 왜곡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국가별로 투표권을 나눠주었습니다. 

이 공의회를 소집한 요한 23세는 자신의 입지가 불리해지자 공의회 장소를 떠나 도망하다가 돌아와 재판을 받고 폐위됩니다. 1415년 그레고리우스 12세는 자진 사임을 하고, 물러나기를 거부한 또 다른 대립 교황 베네딕투스 13세는 파문당합니다. 이렇게 대립 교황 문제를 일단락한 후, 1417년에 이탈리아인 마르티누스 5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합니다. 흥미롭게도, 그 후 1978년에 폴란드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선출되기까지 2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탈리아 출신의 교황이 선출됩니다. 이를 보건대,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내려진 해결책은 교황의 역할과 권한을 이탈리아 반도로 제한하는 것이었다고 풀이해도 무방합니다. 실제로 마르티누스 5세 이후 교황들은 유럽에서 단일한 절대적 우위를 상실하고 점증하는 세속 군주의 영향력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교황들은 전 유럽의 교회 개혁에 힘쓰기보다 아주 현실적으로 자신들의 영향력을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확장하고자 애쓰게 됩니다. 그 결과 이른바 르네상스 교황 시대(1440-1520)라고 불리는, 세속주의적 야심이 끊임없이 발산되는 시기로 접어듭니다. 결국 르네상스 교황들의 종교적 무관심과 세속적 야심과 영향력 추구는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르네상스에 대한 교황들의 관심과 후원이 없었다면 오늘의 르네상스 문화는 형성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지요.) 그 긴 출발점이 바로 콘스탄츠 공의회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이단 문제 해결
콘스탄츠 공의회라는 명칭이 낯설다면, 보헤미야의 개혁가 얀 후스(1372?-1415)가 이단으로 화형당한 공의회였다고 하면 좀 더 익숙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합니다. 교회 개혁과 이단 문제 대응은 공의회에서 끊이지 않는 단골 소재였습니다. 하지만 이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 받은 인물들은 나중 프로테스탄트 진영에서는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불리는 이들입니다. 바로 얀 후스와 그의 사상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잉글랜드의 존 위클리프입니다.

잉글랜드의 개혁가 존 위클리프는 교회 대분열의 시기를 살면서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도전한 인물입니다. 그는 위클리프 성경으로 알려진 성경 번역(영어)으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종교개혁의 샛별’이라는 별칭답게 그는 마르틴 루터가 내세운 기치만큼이나 명확하게 가톨릭 교황제에 반대하고 잉글랜드의 반(反)성직주의를 이끌었습니다. 그는 교회를 신의 선택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교황이나 추기경들이 신의 선택을 받았는지 여부가 불분명하다고 비판하고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까지 불렀습니다. 그는 신의 선택을 받지 못한 교회는 신의 선택을 받은 세속 군주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잉글랜드 국왕이 교회 문제에 개입하여 교회 개혁을 이끄는 것을 옹호했습니다. 이는 국가가 정당하지 못한 교회의 재산권을 박탈할 수 있다는 데에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뿐 아니라, 가톨릭 성직주의의 핵심이 되는 화체설(성찬 시 떡과 포도주가 사제의 축복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그 실존 양식이 바뀐다는 교리-편집자)을 비판하여 가톨릭 교회에 정면으로 도전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생전에 수차례 종교회의에 소집되어 사상의 이단과 오류성에 대해 재판을 받게 됩니다. 그의 사상은 대학이라는 공간을 넘어 ‘롤라드 파’(Lollards)라고 불리는 추종자들을 통해 대중운동으로 확산됩니다. 이러한 위클리프의 주장과 가르침은 훗날 헨리 8세가 로마와 결별하고 독자적인 잉글랜드국교회(Church of England)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그리고 그의 신학 사상은 당대 옥스퍼드로 유학을 온 체코 보헤미아(체코명 모라비아/모라바)의 신학자들을 통해 얀 후스에게까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얀 후스 역시 대중설교를 통해 가톨릭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공격하고 국가가 교회의 재산권을 박탈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칩니다. 아울러 그는 성찬 시 포도주를 성직자에게만 나누어주는, 성직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진 관행을 버리고 평신도들에게까지 포도주 잔을 돌렸습니다.

그의 주장이 대중적인 관심을 받고 확산되어 갈수록 가톨릭 교회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급기야 그는 1414년 콘스탄츠 공의회에 소환장을 받습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안전통행권을 받아 참석한 이 공의회에서 후스는 체포되어 고문을 받습니다. 재판 결과 30개의 주장을 이단으로 단죄하여 이듬해인 1415년 후스를 화형에 처합니다. 그후 보헤미아는 로마가톨릭에 대항하여 국민교회를 형성하여 가톨릭 교회와 전쟁을 벌이게 되지요. 또한 콘스탄츠 공의회는 30년 전(1384)에 사망하여 루터워스 교회당에 묻힌 위클리프를 두고는, 그의 주장 200개를 이단으로 단죄하고 뼈를 불살라 강에 던지라는 부관참시를 명합니다.

왜 후스와 위클리프였을까요? 약간의 시차를 두고 발생한 이 두 흐름은 가톨릭 교회의 핵심인 성직주의에 대한 정면 도전입니다. 이른바 중세말의 반성직주의(anti‐clericalism)의 상징적인 흐름이 이 두 사람을 통해 형성되었습니다. 후스의 보헤미아 국민교회에서는 양종성찬을 하고, 위클리프는 가톨릭 성직주의의 핵심이라고 할 만한 화체설을 부정했습니다. 그리고 양쪽 모두 세속국가가 교회권력을 견제할 수 있다는 세속지배론을 강조합니다. 이 주장은 자연히 가톨릭 교회보다는 보헤미아나 잉글랜드의 국가 입장을 대변합니다.

이는 100년 후에 일어날 사건의 예고편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독일인들의 민족의식에 기대어 반교황주의 전선을 형성했습니다. 루터 역시 성경 번역을 통해 독일의 민족의식을 일깨웠지요. 그래서인지, 그는 자신이 후스나 위클리프파의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다른 점이라면 루터 역시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소집한 제국의회에 소환되었지만, 후스와 같은 운명에 처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후스와 위클리프의 개혁을 ‘조산한 종교개혁’(premature reformation)이라고 부릅니다.

공의회를 통한 교회 개혁
짧게는 40년의 대립 교황 시대, 더 길게 보자면 1309년에 시작된 아비뇽 교황청 시대부터 100년 이상 지속된 비정상 시대의 교회에 대해 서서히 대안적인 움직임이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그 움직임은 콘스탄츠 공의회를 통해 공의회주의 운동으로 결실을 거둡니다. 공의회의 결과, 항상 교황청이 쥐어온 교회 개혁 운동의 주도권이 공의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흐름으로 넘어옵니다. 각국 대표들로 구성되는 공의회주의자들의 관심은 여전히 하나의 가톨릭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교황이 곧 가톨릭 교회’라는 관념으로 보자면 낯설지만, 이제 역사는 가톨릭 교회와 교황중심제를 분리하는 시기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만큼 교황의 절대적 권한은 약화되고 세속군주들의 영향력에 좌지우지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교회의 종교적·도덕적·윤리적 가치를 지켜내지 못한 교황이 자초한 길입니다. 콘스탄츠 공의회에서는 대립 교황 문제를 해결하면서 공의회가 교회의 최고 권위이며 교황권보다 우위에 있다는 입장을 담은 교령 <Haec sancta>를 반포합니다. 더 나아가 지속적인 교회 개혁을 위하여 콘스탄츠 공의회 폐회 5년과 7년 후 각각 공의회를 소집하고, 그 후에는 10년 주기로 공의회를 소집할 것을 결정하는 교령 <Frequens>를 확정짓습니다. 이 결정을 교황이 호락호락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열린 후대 공의회에서 교황주의자들이 공의회주의자들을 밀어내고 다시금 주도권을 확보합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소집 의제와 결정 과정, 그 결과 측면에서 이전과는 매우 다른 상황을 가톨릭 교회에 안겨주었습니다. 몇 가지만 다시 정리해 보자면, 교황 선출권을 각 국가의 대표단이 행사했다는 점과, 후대 교황이 거의 모두 이탈리아 출신으로 채워졌다는 사실입니다. 이단으로 단죄받고 화형을 당하거나 부관참시 당한 얀 후스와 존 위클리프는 프로테스탄트 역사에서는 종교개혁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종교개혁의 선구자들로 인정받습니다. 그들의 사상에서 눈여겨볼 점은 가톨릭 교회의 성직주의를 반대하고 개별 국민국가 군주들에게 교회 개혁의 주도권을 넘겼다는 것입니다. 이는 중세 말 근대적 군주국가의 형성기에 등장하는, 국가가 종교를 지배하는 시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흐름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여러 측면에서 콘스탄츠 공의회는 교회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사건입니다. 그 강은 100년 후 루터 시대에 이르러 여러 개의 지류로 확정됩니다.

4. 나가며
콘스탄츠 공의회는 1309년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라는 오랜 과거에서 그 시작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종교적인 영향력을 상실하고 세속군주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된 ‘바빌론 유수’와 같은 사건을 통해 교회는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고민했어야 합니다. 유럽에서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세속과의 결탁이 아니라 자기 쇄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비뇽의 교황들은 잃어버린 입지와 그로 인해 쪼그라든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성직자 과세를 도입하고, 뇌물로 성직을 사고 파는 다양한 성직매매 방식들이 생겨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절제되지 않은 교회의 욕망이 만들어낸 괴물인 대립 교황의 시대는 유럽에서 하나의 가톨릭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2명, 심지어 3명의 교황이 동시에 존재하는 현실 앞에서 자연히 교황 수위권에 대한 물음표가 던져지는 것이지요. 그것이 교회나 교황청의 문제를 공의회가 주도하여 해결해야 한다는 ‘공의회주의’ 운동이 등장하게 된 배경입니다. 이후 종교개혁이 일어나기까지 향후 100년의 기간 동안 교황주의자들과 공의회주의자들의 세력 다툼이 있었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종교개혁은 급작스레 생겨난 사건이 아니라 점진적인 현상으로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습니다. 다음 호에서는 공의회주의 운동의 성립과 쇠퇴를 중심으로 이 흐름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다시, 종교개혁 기념 주간이 성큼 다가오고 있습니다.

■ 연재 순서
1. 왜 지금 ‘공의회’인가? : 사회사 관점으로 교회사를 읽어야 하는 이유
2. 동서교회 분열의 서막인가, 확장인가 :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3. 위로부터 이뤄지는 교회 개혁의 전형 : 제1, 2차 라테란 공의회
4. 권력의 정점을 향하는 교회, 그 빛과 그림자 : 제3차 라테란 공의회
5. 가톨릭 교회, 삶과 죽음의 지배를 완성하다 : 제4차 라테란 공의회
6. 종교개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 제 1, 2차 리용 공의회
7. 교회여, 낮은 청빈의 자리에 설 수 있는가? : 비엔나 공의회

8. 교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다 : 콘스탄츠 공의회
9. 바젤, 페라라, 피렌체 공의회
10. 제5차 라테란 공의회
11. 트렌트 공의회
12. 제1차 바티칸 공의회
1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최종원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에서 교회사와 지성사를 강의한다. 인문주의 정신의 존중이 교회 갱신의 핵심이라고 믿고,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교회사 재구성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최종원 goscon@goscon.co.kr

<저작권자 © 복음과상황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책과 함께

1 2 3 4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