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호 제국과 하나님 나라] 고린도후서 읽기

바울 서신을 읽는 방법
같은 사건이라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어느 대형교회 목사의 범죄는 한 개인의 일탈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한 교회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시작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시야를 더 크게 넓히면 이는 교회 전체의 위기 징후로 볼 수도 있다. 개인의 문제로 볼 것인가, 공동체의 문제로 여길 것인가, 아니면 사회 전체를 반영한 징후로 생각할 것인가? 결국 시야의 문제는 해석의 문제로 귀결된다.

바울 서신 읽기도 마찬가지다. 첫째, 바울의 이야기를 한 개인의 신앙과 열정의 드라마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한계에 이르러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난 개인의 회심과 소명 이야기로 읽는 것이다. 둘째, 바울 서신을 통해 그리스-로마 지역에 있었던 메시아 공동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도 있다. 바울과 각 공동체 구성원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재구성하고 그들의 신앙고백과 예배 생활을 발굴함으로 초기 메시아 공동체의 살아 숨쉬는 삶을 엿볼수 있다. 바울 서신이 초대 교회 역사를 재구성하는 유물로 사용되는 것이다.

신앙공동체에서 바울 서신을 읽는 첫 번째 방법은 대체로 개인적 시각의 방식이다. 바울의 회심이나 목회에 자신을 심리적으로 일치시켜 스스로 삶의 등불로 삼는다. 이 방법의 강점은 서신의 맥락과 역사적 배경을 알지 못해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물론 약점도 있는데, 때로 어떤 본문은 맥락을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바울의 저술을 무조건적으로 맹신하게 될 수 있다.

두 번째 방법은 보통 성서신학에서 사용하는 역사비평학에 기대어 바울 서신의 맥락과 역사적 상황을 연구하여 바울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이 방법의 강점은 당연히 본문의 맥락과 의미에 접근이 용이하므로 자의적인 해석을 막고 성서의 과도한 신비화를 방지하는 데 있다. 반면, 약점은 깊이 침투해간 과거의 역사에서 현재로 돌아오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바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재의 깨달음으로 바꾸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시야를 더 확장하는 세 번째 방법이 있다. (바울 서신을 읽는 세 가지 방법은 서로 이질적인 것이라기보다 시야의 폭이 서로 다른 것으로 볼 수 있다.) 바울 서신을 당시 전체 그리스-로마 사회 속에서 읽는 방식이다. 비록 바울은 당시 수많은 사람들 중 한 개인이었을 뿐이지만, 그가 고민하던 문제가 단순히 개인적인 사안이었다고 보기는 매우 어렵다. 바울의 하나님 나라와 부활의 메시지들은 한 개인을 넘어 메시아를 따르는 사람들 모두가 가져야 할 소망이었다. 게다가 유대 공동체 중심의 선교활동을 이방인 중심으로 과격하게 변화시킨 인물이 바울임을 기억할 때, 그의 서신은 하나의 공동체나 민족의 경계를 넘어 당시 사회 전체를 향해 있음을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다. 필자는 이 확장된 바울 이해가 현재의 우리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와 호응한다고 믿는다. 만약 바울 서신의 주제들이 개인 구원의 종교적 문제일 뿐이거나 이미 해결된 인간 문명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현재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읽으며 고민하는 글이 될 수 없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바울의 글을 직접 읽어가다 보면 부지불식간에 바울이라는 개인, 또는 한 메시아 공동체의 문제에 쉽게 몰입하게 되어 넓은 시각으로 들여다보는 일이 힘들어진다. 좋은 예를 들어보자.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고린도 공동체에 보낸 눈물과 애통의 편지이다. 이전 글에서 고린도 공동체의 분열과 그에 대한 응답이 바로 고린도전서임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수많은 참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바울의 지혜가 담겨 있다. 고린도교회가 실패했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이 평소에 소망했던 에클레시아의 모습을 편지에 아로새겼다. 그리고 그 에클레시아를 이루기 위해 다시금 고린도 공동체가 힘을 써주기를 소망했다.

고린도후서를 살펴보면 그러한 바울의 소망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의 기대와는 달리, 고린도에서 아마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몇몇 공동체원들은 바울의 소망과 충고를 참견과 독설로 받아들였고, 급기야 바울과 일대 격전을 준비했다. 그들은 복음에 대한 바울의 순수성을 의심하고 사도로서 바울의 권위를 부정했다. 이제는 에클레시아를 어떻게 이루느냐가 문제가 아니었다. 바울은 사도로서 자신의 자격과 순수성을 증명해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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