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호 역사에 길을 묻다: 공의회의 사회사 09] 바젤-페라라-피렌체 공의회(1431-1445)

   
▲ Council-Florence (그림: 위키미디어 코먼스)


1. 공의회주의 운동 

유럽의 정치 지형 변화
중세 가톨릭 교회에서는 교회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교황이 공의회를 개최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그러나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는 대립 교황들이 생겨난 ‘교회 대분열’의 상황에서는 교황이 더 이상 개혁의 주체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각 나라를 대표하는 고위 성직자들이 참여한 공의회가 대안으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3인의 대립 교황으로 인한 교회 대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개최한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는 대립 교황의 문제를 해결하고 새 교황을 선출하여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이 공의회에서는 10년 주기로 정기적이고 지속적으로 공의회를 개최하도록 명문화함으로써 일상의 교회 관련 문제 해결의 주도권을 교황에게서 공의회로 가져오고자 했습니다.

좀 넓게 보자면 교회의 아비뇽 유수(1309)부터 교회 대분열이 마무리된 시점(1418)까지 100년은 유럽의 정치적 지형이 변모하는 시기였습니다.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는 교황이 유럽 내에서 정치적으로 절대적인 지위를 상실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었습니다. 더불어 프랑스와 같은 강력한 국가권력의 영향력으로 인해 교황을 선출할 추기경단이 프랑스인으로 채워지고 자연히 프랑스 출신의 교황들만 선출되자, 보편 교회가 전 유럽 교회의 민의를 대표하지 못하고 특정 국가를 왜곡하여 지지하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교황선출권을 추기경단이 아닌 각 국가별로 부여한 이유도 민의의 왜곡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근대적인 형태의 국민국가가 서서히 발전하는 정치 지형 변화는 전 유럽을 아우르던 가톨릭교회 체제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강력한 한 국가의 영향력에 의해 공교회가 좌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제도적으로 전체 교회를 대표하는 공의회에 최상위의 권위를 부여하는 ‘공의회 우위설’이 생겨났습니다. 대립 교황이라는 비상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임시 조치였을 듯한 공의회 주도의 교회개혁은, 실은 유럽의 정치 지형 변화 속에서 생겨난 ‘공의회주의 운동’이라는 흐름의 결과였습니다. 이는 교황과 추기경단이 중심이 되어 교회를 이끌어 온 전통에 대해 치밀한 반기를 든 움직임이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 대분열 전후로 이른바 교황주의자들과 공의회주의자들 사이의 주도권 다툼이 전개됩니다. 바젤-페라라-피렌체 공의회는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정기적으로 공의회를 열게 한 결정에 따라 소집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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