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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끄 엘륄〕 자연에 대한 기독교의 책임 그리고 자유

기사승인 [349호] 2019.11.20  11:5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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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9호 커버스토리] 돼지를 생각하다

   
▲ 자끄 엘륄. (사진: CC BY-SA-4.0 / Jan van Boeckel, ReRUN Productions)

오늘날 기독교가 한편으로 자연의 파괴에 영향을 미치고 다른 한편으로 권위주의적이고 중앙집권적인 국가 체제 설립에 영향을 끼친 사실을 비판하는 것에 일반적으로 동의한다. 이는 아주 단순한 방식으로 과장된 것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들 간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이다. 내 생각에는 이 모든 것은 간결한 문장 하나로 설명될 것 같다. 즉, “기독교는 불을 사용했지만, 불을 제어하지 못했다!”

우리는 그 개요를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정리해볼 수 있다. 먼저, 예언자들의 메시지의 뒤를 이은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권력, 법률, 사회학적 도덕, 종교 등의 모든 것으로부터 인간의 해방이 선포되었다. 그래서 원래 기독교는 하나의 ‘종교’가 아니었고 그 자체가 ‘종교’가 되지 말아야 했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정통 기독교, 즉 초기 기독교 세대의 기독교는 종교들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켰다. 기독교는 사물과 자연에 결부된 전통적인 신성한 것을 파괴했다. 다음으로 기독교는 자신의 환경과 세상에 대한 인간의 자유롭고 완전한 통제를 선언하였다. 그런 환경과 세상에서 기독교는 절대적인 지배자처럼 나타났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였다. 이는 인식할 수도 없고 파악할 수도 없는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초월적인 만큼 더더욱 그러하다.

마침내 기독교는 극단적으로 개인화되어 갔다. 즉, 기독교에서는 그 어떤 사회 집단이 지니는 가치보다 개인의 가치를 더 우선시했다. 예수의 가르침에서 중요했던 것은 바로 군중과 대중에서 떨어져 나온 ‘너’였다. 그런데, 이는 사람이 견딜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말하자면, 기독교의 메시지에는 제시된 요점 하나하나마다 대위법(對位法)1이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는 했지만, 이는 오로지 그가 하나님께로 귀의하는 경우에만 생각할 수 있는 것이었고, 그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경우에만 생각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인간은 개인이 되기는 했지만, 이는 그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다른 유형의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는 경우에만 받아들일 만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공동체는 다른 모든 공동체의 역할을 지녀야 하면서도 다른 식으로 근거를 둔 공동체, 곧 ‘교회’이다.

인간은 더는 신성하지 않은 세상에 대해 제약 없는 지배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그 세상을 바로 하나님의 창조물로 간주한다는 조건에서 그러했다. 달리 말해, 신성한 것이 이 세상 속에 더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이 세상은 하나님이 만든 작품이자 하나님이 준 선물이므로 전적으로 완전히 존중받아야 했다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는 이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초월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강생했으며,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상에서도 갖게 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다른 종교들의 신들만큼 우리와 가까이 있었고, 심지어 그 신들보다 훨씬 더 가까이에 있었다. 

제도에서 억압으로
이렇게 예수의 가르침은 옛 질서 전체를 파괴했지만, 그와 동시에 하나의 새로운 질서를 재구성했다. 인간은 허공이나 사막이나 ‘아무 곳에나’ 내던져진 것이 아니었다. ‘종교적인 것’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연에 대한 자세, 도덕, 정치에서도 새로운 기반들이 있었다. 그러나 자유와 사랑을 바탕으로 하나의 새로운 세상을 재구성할 수 있게 해야 했던 그 기반은 그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모든 것이 타락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어떻게 보면 인간은 예수의 메시지가 가져온 것을 이용하기만 했을 뿐, 그 메시지로부터 온갖 결과들은 도출해내지도 않았고, 새로운 의무와 새로운 지시를 가지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방향을 따르지도 않았다. 인간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졌고, 그와 동시에 인간은 새로운 사회의 토대 및 사랑과 자유의 새로운 도덕의 토대를 놓으라고 부름을 받았다. 또한 인간은 타인들 및 사물들과 함께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를 형성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의 이익 이전에 타인들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끊임없이, 인간은 절대적으로 초월적인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대적으로 현존하는 하나님과 자신이 가까이 있음을 깨달아야 했다. 그러므로 비극은 실제로 파괴의 효력이 드러나도 그에 상응하는 구축이 없다는 것이었다. 

2차 대전 이후 새로 구축된 세계에서는 권위주의적 국가가 생겨났고, 예수의 가르침을 종교로 변질시켰으며, 교회를 억압적인 종교 단체로 만들었다. 또한 외적인 사회통제 외에는 다른 방향을 갖추지 못한 채 개인을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그리고 바로 이후부터 인간은 자연에 관해서 스스로를 절대적인 주인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실패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제도는 하나님의 은총보다 더 강력하게 작용했고, 그와 동시에 무정부주의적 자유, 도를 넘어선 개인주의, 무도덕주의, 착취의 씨앗이 뿌려졌다.

교회가 쌓아 올린 장벽들이 무너져 내리자, 기독교가 초래한 결과들은 가시적이고 효과적이 되었다. 따라서 기독교가 그러한 결과들을 초래하는 역할을 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예수의 가르침에서 파괴적인 효과만이 남아있었던 한 그러했고, 새로운 인간, 새로운 세상, 새로운 관계들이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생겨나지 않았던 한, 그러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현재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자연과 자유라는 모험에서 기독교가 맡아야 할 엄청난 역할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중세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도, ‘기독교 사회’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도, 기독교 사회에 대한 교회의 지배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도 절대 아니다. 이는 터무니없는 일일 것이고, 정확히 말하면 잘못된 일일 것이다! 내 말은 성서적 메시지의 진정성을 다시 생각해보자는 것이고, 어떻게 성서적 메시지가 베르나르 샤르보노2가 언급한 ‘자연과 자유의 모순과 변증법’ 속에 편입되는지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성서적 메시지가 인도하는 길 위에서 어떻게 그 메시지가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자연을 관리하고 사랑할 것
나는 아주 간단한 교훈 세 가지를 밝히고자 한다. 먼저, ‘관리’에 대한 이야기다. 자연이란 더는 신성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에, 인간은 절대적으로 자연의 주인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요점을 잊었다. 즉, 자연은 하나님의 창조물이었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연을 맡겼다. 그런데, 이는 자연을 가지고 아무것이나 함부로 만들거나 자연을 아무렇게나 다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연을 보살피기 위해서이다. 그 점은 무엇을 뜻하는가?

구약성서의 관점에서 그 점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하나님은 자신이 직접 이 창조물을 불변의 메커니즘에 따라 작동하는 사물처럼 지배하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전능한 힘에 기계적으로 종속되지 않도록 인간을 자연 속에 둔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의지와는 다른 의지와 자유를 자연 속에 도입하려고 인간을 자연 속에 둔다. 따라서 하나님은 일종의 여유 공간을 설정하려고 자신과 자신의 창조물 사이에 매개자를 둔 것이다. 둘째, 그 점은 하나님의 반영이자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은 창조물에 대하여 하나님처럼 행동해야 하며, 전능한 힘으로서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한 하나님은 ‘사랑’으로 특징지어진다. 만약 하나님이 무언가를 창조한다면, 이는 사랑에 의한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창조물에 독립성을 부여한다면, 그것도 사랑에 의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도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자연을 다루어야 한다. 즉, 자기 자신의 맹목적이고 이기적인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자연을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 신화들의 의미였다.

따라서 이는 ‘인간의 절대적 지배’라는 해석과는 아주 동떨어지고, 그 ‘관리하는 자’는 분명하게 해명을 해야 한다. 그러한 개념은 끊임없이 예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게 한다. ‘관리하는 자’는 책임자이다. 즉, ‘관리하는 자’는 누구 앞에서든 대답해야 한다. 비록 우리가 성서적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역할에 대한 그 두 가지 관점은 유지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바로 인간은 다른 누군가를 위해 세상을 관리하는 존재인 동시에, 다른 누군가 앞에서 자신의 관리를 책임지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때 그 다른 누군가란 예를 들자면 나머지 인류이거나 또는 자신의 후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인간에게 주어진 그러한 책임이 확실하게 산산조각이 날 순간에 놓여 있고, 우리가 한 행동의 결과들에 의해 심판받을 순간에 놓여 있다.

만물의 유한성을 받아들일 것
내가 성서의 가르침에서 끌어내려는 두 번째 교훈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세 가지 관점에서 제한된 것처럼 보이는데, 바로 유한성, 임계점, 한계점이다.

   
▲ 엘륄은 말한다. 기술은 자체의 논리를 따르면서 스스로 성장한다고. 민주주의를 무시하고, 천연자원을 고갈시키며, 문명을 획일화할 거라고.

우선, ‘유한성’이란 간단히 말하자면 인간과 그 인간이 존재하는 세상에는 끝이 있다는 사실이다. 시간의 유한성이 있다. 인간은 태어나고 죽는다는 것이다. 성장의 유한성도 있고, 자원의 유한성도 있으며, 공간의 유한성도 있다. 원래 그런 것이므로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성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에게 그 유한성에 대해 가르쳐주며, 인간에게 그러한 유한성에 종속된 삶을 받아들이는 것을 일종의 의무로서 제시한다. 인간이 그 유한성을 부인하려고 했을 때마다, 이는 대재앙으로 변했다. 유한성은 인간의 자유를 엄밀히 제한한다. 인간은 그러한 자연의 필연성에 속한다.

다음으로, 이반 일리치3가 밝힌 ‘임계점’, 즉 어떤 경향이 뒤집어지는 지점을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임계점에서는 무언가를 보완하기 위해 어떤 것을 추가하면 기대했던 것과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난다. 예를 들면, 어떤 약물의 과다 복용이 새로운 질병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이와 비슷한 실제 사례를 수없이 들 수 있다. 이는 언제 어디서나 자동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우리의 자유는 제한된다. 성서는 수많은 사례를 제시하면서, 우리에게 임계점을 넘지 않도록 우리의 행동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평가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마지막으로 ‘한계점’이 있다. 이 경우에는 앞서 살펴본 것과 반대로, 우리는 인간의 자유가 가능한 상태에 존재한다. 한계점이란 인간이 자신이 할 수도 있는 일을 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자유를 최고조로 표현한 것이다. 요컨대, 인간은 “살인하지 말라”는 한계를 설정할 때 비로소 진정으로 인간이 된다. 실제로 인간이 할 수 있는 행동이 하나 있다고 하자. 그러나 인간은 자신을 위해 선택하고 부여한 이유들로 인해 그 행동을 끝까지 밀고 나가지 않기로 자유롭게 마음먹을 수 있다. 바로 그 순간 인간은 자유로워지는데, 인간이 자유로워지는 것은 자신의 행동과 능력과 힘을 무한정으로 증가시킬 때가 아니다. 달리 말하자면, 인간 스스로 법과 도덕과 행동 규칙을 세우고, 아무 길이 아닌 그런 길을 자신에게 제시할 때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바로 그때 인간이 자연을 관리하는 데 있어 마땅히 져야 하는 책임이 나타난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에게 맡겨진 자연을 가지고 많은 것을 할 수는 있지만, 모든 것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제한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서 전체는 그런 종류의 선택을 표현한다. 

비폭력을 넘어 ‘비능력’으로
마지막으로, 그러한 점은 세 번째 요소, 곧 세 번째 교훈으로 귀결된다. 앞서 우리는 의도적으로 제한된 힘의 사례를 살펴보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비폭력을 훨씬 능가하는 ‘비능력’4을 선택하는 예수의 사례이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 닮기’가 있다면, 이는 오로지 비능력의 길에만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비능력을 선택한다는 것은 우리가 자연과 동물과 타인을 대하는 방식뿐 아니라, 군대적이고 기술적인 우리 사회의 토대와 방향, 그와 동시에 자율성과 절대적 독립성과 주권 등과 같은 자유에 대한 우리의 개념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능력을 택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자연적 경향’과 관련한 우리의 자유이기도 하다. 또한 자연은 우리에게 ‘생존을 위한 투쟁’과 적자생존 사례를 보여준다. 만약 우리가 적자생존 게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우리는 오로지 필연성에 의해 조건지어지기 때문에 무한히 힘을 증가시키게 된다. 단지 그것이 그저 숙명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우리는 그 숙명의 세계 가운데 자유를 도입시켜야 한다. 그 자유는 비지배, 비폭력, 타인에 대한 비소외, 그리고 자연 환경에 대한 착취이든 타인에 대한 착취이든 간에 비착취를 결정함으로서만 표현될 수 있다. 

나는 그 세 가지 교훈이 성서가 전하는 메시지 전체를 정확하게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삶의 경계선을 거부하고, 책임, 존중, 비능력, 사랑의 표현을 받아들이지 않고서 자율성을 누리고자 했을 때 대재앙은 일어났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성서 메시지의 근원으로 기꺼이 돌아가, 그러한 근본 가치들을 재발견하기를 원한다면, 그들은 환경보호에 보완적인 논거를 제시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확신하고서, 실패하지 않을 기회와 더불어 그 어려운 일에 위험을 무릅쓰는 용기와 소망을 줄 것이다. 


■ 번역·감수 : 한국자끄엘륄협회 

이 글은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엘륄의 원고로, 도서출판 대장간의 허락을 받아 전재합니다. -편집자 

 

1 대위법(le contrepoint). 음악에서 독립성이 강한 한 둘 이상의 멜로디를 동시에 결합하는 작곡 기법을 가리킨다. 문학에서는 처음 것과 평행하게 전개되는 두 번째 주제를 가리킨다. -옮긴이. 이하 주는 모두 옮긴이 주 
2 Bernard Charbonneau.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환경운동가. 에마뉘엘 무니에(Emmanuel Mounier)와 함께 잡지
에스프리를 창간한다. 샤르보노는 현대 사회를 분석하고 경제와 발전이 지닌 절대적 힘을 비판하면서, 20세기의 이데올로기와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 조직 형태를 착상할 것을 제안한다. 특히, 그는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진보를 통해 초래되는 변화와 문제를 고찰하고자 엘륄과 더불어 정기간행물을 펴내는 클럽과 토론 그룹을 만들기도 하고, 엘륄과 함께 '인격주의 선언을 위한 강령'을 작성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그는 엘륄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치고 엘륄의 인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엘륄은 샤르보노에 대해 그 시대에 보기 드문 천재인데도 완전히 진가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하면서, 자신이 학문 연구와 사상의 방향을 설정하는데 샤르보노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샤르보노가 없었다면 자신이 이렇게 많은 일을 행할 수 없었을 것이며, 적어도 상당한 부분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라고 밝힌다. 
3 Ivan Illich. 오스트리아 출신의 신학자이자 철학자. 남아메리카의 미국형 현대화 정책에 반대하면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와 획일화된 교육 정책은 문화의 다양성을 부정하고 미국형 문화에 적응을 강요한 것이라 비판한다. 특히, 그는 당시 전 세계가 추종하던 개발 이념에 도전하고, 현대 문명에 근원적인 도전을 던진다. 그는 사회학, 철학, 경제학, 여성학, 종교학, 언어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기며, 가장 근원적이면서 급진적인 사상가로 평가 받는다. 1965년에 그는
기술 혹은 시대의 쟁점기술의 역사를 영어로 번역한 기술 사회를 읽음으로써 충격을 받고 엘륄 저작의 진가를 발견한다. 이후로 10년간 그는 환경, 사회구조, 문화, 종교 등에 대한 기술 수단의 지배에서 비롯된 사회적 결과들을 연구한다. 그는 자크 엘륄에 대하여의 서문에 실린 엘륄에 대한 헌사에서 엘륄을 '자크 스승님'(Maitre Jacques)으로 호칭하면서, 30여 년 전부터 자신의 행로에서 결정적으로 방향을 바꾸게 한 것이 엘륄이며, 자신은 엘륄이 앞서 간 족적을 따라온 것이라고 밝힌다. 
4 엘륄은 '무능'(
無能, I' impuissance)과 '비능력'(非能力, la non-puissance)을 구분한다. '무능'은 본래 힘과 능력이 없어서 힘과 능력에 의해 행동할 수 없는 상황을 가리키고, '비능력'은 실제로 힘과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 힘과 능력을 쓰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나타낸다. 

 

   
▲ French sociologist and technology critique Jacques Ellul in his studio in Pessac, France. Photo taken as part of the filming of the documentary "The Betrayal by Technology" by ReRun Productions, Amsterdam, Netherlands.

자크 엘륄
프랑스의 개신교 신학자이자 법학자, 철학자, 기술비평가. 20세기의 중요한 사상가로 꼽히는 그는 “세계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라는 말을 남겼다. 보르도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1936년에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후 역사학과 사회학 분야에서도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쇠렌 키르케고르와 카를 마르크스의 저작을 섭렵했으며, 카를 바르트에게도 많은 영향을 받아 자신의 사상을 형성해나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독일에 맞서 비폭력적 방식으로 레지스탕스 지하운동에 참여했는데, 유대인들을 홀로코스트에서 구해내기 위해 노력한 사실이 밝혀져 이스라엘 국립 홀로코스트기념관으로부터 ‘열방의 의인’ 칭호를 받았다. 종전 이후 보르도 부시장으로 활동하는 등 현실 정치와 행정에 잠시 참여하기도 했으며, 오랜 기간 동안 보르도 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생태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의 저서 중 40여 종이 넘는 한국어판이 나와 있으며, 거의 대부분 도서출판 대장간에서 ‘자끄 엘륄 총서’ 시리즈로 나오고 있다. 

 

 

 

자끄 엘륄 goscon@goscon.co.kr

<저작권자 © 복음과상황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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