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호 신학자의 말] 자끄 엘륄 전문가 프레데릭 호뇽 교수 강연문 및 미니인터뷰

   
▲ 감신대 이봉석 박사(맨 왼쪽)가 통역을 맡았다. ⓒ복음과상황 이범진

‘프레데릭 호뇽의 대화마당’이 10월 30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이제홀에서 열렸다. 기독교환경운동연대, 한국교회환경연구소, 한국자끄엘륄협회가 공동주최한 이 모임은 자끄 엘륄 사상으로 나누는 “창조세계의 생태 위기와 기독교의 응답”이 주제였다. 프랑스의 개신교 신학자 자끄 엘륄 전문가인 프레데릭 호뇽은 프랑스 개혁교회 목사이자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종교철학 교수로, 엘륄의 삶과 사상을 조명한 연구서인 《자끄 엘륄, 대화의 사상》이 국내에 번역 출간되어 있다. 오후 4시부터 시작한 강연은 질의응답과 함께 약 두 시간 동안 이뤄졌다. 다음은 강연 내용을 편집한 것이다.

이 시대의 마지막 예언자, 자끄 엘륄
자끄 엘륄은 1912년에 태어났고, 보르도대학의 법 역사학 교수로 일했습니다. 또한 그는 사회학자이자 신학자였으며, 방대한 양의 저작들을 남겼습니다. 58권의 책과 1,000편이 넘는 논문과 글을 남겼지요. 1994년에 작고했는데 생전에는 유럽에서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그가 쓴 책들은 지금으로부터 약 5년에서 10년 전부터 전파되기 시작했지요. 당시 어떤 사람도 보지 못했던 것을 엘륄은 예견했습니다. 

그의 저작은 크게 두 개의 축으로 구성됩니다. 하나는 기술 분석이고 다른 하나는 신학적 측면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사회학적 저작들만 읽는다면 실망하실 것입니다. 잠을 못 잘 정도로 불편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쓴 기술 분석 책은 우리 사회가 어떻게 재앙으로 향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학적 저술들은 이런 재앙으로 향하는 사회학적 문제들에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엘륄은 우리 사회의 구체적 문제들을 신학이 풀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세계는 온갖 자연적 재해가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각국 정부는 기술 혁신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해 왔지요. 정부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많은 생태운동가들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엘륄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했던 사회분석을 따라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첫 번째 저서인 《기술 세기의 도박》은 출판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1949년에 이 책을 썼지만 1954년이 되어서야 출간할 수 있었지요. 당시 어느 누구도 기술에 대한 관심이 없어서 출판사를 찾는 데 5년이 걸렸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이 기술을 얘기하지만 과거에는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지식인들은 정치와 경제 문제에만 집중했고, 서구사회에서는 동과 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대립하고 있었지요. 자끄 엘륄은 소련이나 미국이나 유럽이나 모두 같은 방향으로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바로 ‘생산성 향상주의’라는 이름으로 말이지요. 이는 역사를 추동하는 동력이며 우주를 정복하려는 일입니다. 

엘륄이 말하는 ‘기술’의 개념과 몇 가지 특징들 
그렇다면 무엇을 기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자끄 엘륄은 기술이라는 개념을 이렇게 규정합니다. ‘기술이라는 것은 완전하게 효율성에 근거한 생각 덩어리이다.’ 엘륄은 기술을 복수로서의 기술(les Techniques)과 단수로서의 기술(la Technique)로 구분합니다. 복수로서의 기술은 방법들의 총체입니다. 자연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인간이 사용했던 모든 것으로, 기계나 어떤 물리적인 도구를 말합니다. 하지만 단수로서의 기술은 좀 더 광범위한 것입니다. 단순히 물리적인 도구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커다란 가치와 정신, 어떤 형식으로 세상과 자신을 볼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물질과 비물질을 모두 포함하지만, 단순히 일할 때의 도구, 생산이나 여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의 것을 기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엘륄은 우리의 모든 관계, 생각하고 말하는 방식, 그리고 영적이고 내적인 삶마저도 기술화되었다고 보았습니다. 

나아가 엘륄은 이러한 기술의 가장 중심에 ‘효율성’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효율성은 보편적 가치로, 이것이 없는 삶이란 있을 수 없겠지요. 문제는 절대화된 효율성입니다. 효율성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서 다른 가치들은 의미 없는 것이 되는 게 문제라는 것이지요.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기술의 특징으로는, 첫째, 우리 삶 가운데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기술은 어느 곳에나 있어서 감각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기술 속에 우리가 있다는 것 뿐, 우리 안에 그것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합니다. 

둘째로는 기술이 자율적 시스템을 지니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더 문제가 됩니다. 인간이 기술에 혁신을 가하는 것 같지만, 현실에서 기술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매순간마다 혁신되어야 하는 기술은 기술 자체에 의해 혁신되기 때문이지요. 인간은 그 뒤를 좇아갈 뿐입니다. 마치 어떤 마술사가 마술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셈이지요. 

기술의 세 번째 특징은 방법들의 연합체라는 것입니다. 목적 없이 방법만 있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기술 사회에서는 설정된 방법만 존재할 뿐 정치적·인간적·윤리적 목적이란 것이 없습니다. 노벨상을 수상한 헝가리 물리학자의 이름이 붙은 ‘가보르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기술적으로 가능한 모든 것은 그 실현이 옳건 그르건 모두 실현되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우리가 필연적이라고 하는 것들은 인간에게 더 좋은 것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의로워서거나 아니면 불편한 것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하는 일인 것이지요. 

기술에는 중립이 없다 
기술의 네 번째 특징은 중립적이지 않다는 점입니다. 모든 사람은 기술이 중립적이라고 말합니다. 동일한 기술로 좋은 일도 하고 나쁜 일도 할 수 있는 선택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즉 기술을 어떻게 사용할지 결정하는 것은 ‘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엘륄은 그것이 틀렸다고 말합니다. 기술에는 양면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기술 혁신의 부정적 결과 없이 긍정적 결과만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핵발전은 전기를 일으켜서 고속열차를 달리게 하고 비싸지 않은 전기를 제공하지만 갑작스러운 사고도 있을 수 있고, 테러의 위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사회를 감시·통제해야 하지요. 핵폐기물 처리 비용을 생각하지 않고, 핵발전의 좋은 점만 생각할 수만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핵폐기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땅속에 묻어놓고 어떻게 할지 쳐다보지도 않는 거지요. 핵폭탄과 핵발전의 관계는 또 어떻습니까? 자끄 엘륄이 이런 위험을 말했을 때 프랑스 정부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핵발전이 핵무기로 전환되는 것은 단순하진 않지만 가능하며 분명히 존재합니다. 1979년에 이란 혁명이 있었습니다. 만약 이란의 핵발전소를 공격했다면, 이란은 핵폭탄을 얻게 되었을 것입니다. 즉 재난이나 다른 문제 없이 좋은 수준의 기술만 볼 수는 없습니다. 

두 번째로 엘륄은 장기이식을 예로 듭니다. 프랑스에서는 장기이식 연구가 1980년대에 크게 발전했습니다. 장기이식 기술을 발전시키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젊은 사람의 몸에서 장기를 취해야 합니다. 고령자나 환자에게서는 취할 수 없지요. 그래서 길에서 사고를 당한 사람의 몸에서 장기를 취했습니다. 1980년대 프랑스에서는 도로상에서의 사고는 정말로 치명적이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술을 먹고 취해서 새벽 2-4시에 도로에서 죽었습니다. 엘륄은 젊은이들의 죽음과 장기이식 기술의 발전을 연결해서 보았습니다. 당시 아무도 두 사건을 하나의 사건으로 보지 않았지요. 오늘날 도로에서의 죽음은 많이 예방되었고 그 결과 장기를 적출할 사람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장기이식 기술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신을 찾아야 하는데, 이 예는 기술 발전을 위해 지불해야 할 비용이 엄청나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기술 발전에 뒤따르는 그 비용을 우리는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당장 내 눈 앞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지요. 

예를 하나 더 들어보겠습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은 우리를 많은 곳에 연결시킵니다. 지구 반대편과도 소통할 수 있게 하는 환상적인 기술이지요. 그러나 동시에 중독을 유발합니다. 게임을 하면서 밤을 지새게 됩니다. 컴퓨터는 물리적인 기기입니다. 재료를 중앙아프리카에서 찾는데, 그곳에는 컴퓨터의 부품을 만들기 위한 전쟁이 있습니다. 컴퓨터를 버릴 때는 어떤가요? 모잠비크 등에 폐기품을 보내 그 나라들을 오염시킵니다. 우리는 컴퓨터가 초래하는 어떤 부정적인 결과를 상상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기술의 양가적 측면입니다. 

매순간 일어나는 기술 혁신은 좋은 결과를 불러올 수도,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기술에 의해 제기된 문제를 기술로 풀려고 하지요. 기술이 양가적 측면이 있는 것과 같이, 기술로 인해 일어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되는 기술 역시 문제를 야기합니다. 기술이 문제를 만들고, 다른 기술이 그 문제를 푸는 이어달리기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쉬운 예를 들어 보지요. 폭염 때 우리는 에어컨을 켭니다. 에어컨은 우리를 숨 쉬게 하고 편안하게 하지요. 그런데 에어컨이 대기 온도를 올리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끝도 없고 해결책도 없습니다. 엘륄은 이런 점에 주목했습니다. 

새로운 종교가 된 ‘신성’한 기술 
《기술 체계》에서 엘륄이 소개하는 기술의 특징은 기술이 시스템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정보혁명과 함께 모든 기술은 상호 연결되어 하나가 되었습니다. 기술 혁신이 하나의 축에 도달하면 다른 축들도 기술 혁신의 영향을 받습니다. 재난, 고장, 사고, 테러 등이 일어나면 다른 축들도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기술 시스템’ 사회 속에서 기술은 점점 더 강해지고 이 시스템을 항구적으로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점점 더 약한 사회를 만들어내고 있지요. 

기술의 마지막 특징은 신성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컴퓨터나 차를 경배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인간의 신성한 것이 담겨 있다고 봅니다. 자끄 엘륄은 우리가 기술을 마치 제단에 올려놓은 우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기술적이지 않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요. 그래서 우리는 인생 전체를 기술에 헌신하고, 기술과 관련 없는 것은 지워버립니다. 인간관계, 건강, 영적인 삶마저도 희생합니다. 기술이 새로운 종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기술은 다른 것을 비신성화하고 있습니다. 

제자도,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음을 선택하는 ‘비능력’
그렇다면 우리에겐 희망이 없을까요? 자끄 엘륄은 성경을 변증적인 메시지로 읽었습니다. 희망과 절망, 그리고 소망이라고 하는 세 개의 개념이 변증적으로 놓여 있다고 그는 말합니다. 희망은 인간이 상황을 좀 더 좋은 쪽으로 전개해 나가는 것입니다. 절망은 아무런 해결책이 없을 때 가질 수 있는 마음이지요. 엘륄은 우리에겐 인간에 의해 남용된 것만 있기에 희망이 없고, 또 그렇기에 비로소 소망이 생긴다고 말합니다. 희망이 세속적 의미라면 소망은 성경적 의미입니다. 소망은 하나님에 대한 신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약속으로 소개해주셨습니다. 이는 미래가 쉬운 것이 아님을 일러주지요. 엘륄은 긍정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소망으로 가득 찬 비관론자라고 불렀습니다.

이제 엘륄의 마지막 변증을 소개하겠습니다. 능력과 무능력과 비능력의 변증법입니다. 능력은 어떤 것을 할 수 있는 힘이고, 무능력은 어떤 것을 할 수 없는 상태이지요. 그런데 ‘비능력’은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의지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능력이 있는 사회를 살아갑니다. 현대는 옛 선조들이 할 수 없었던 수많은 일들을 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비능력의 선택에 초대받았습니다. 

왜 ‘비능력’입니까?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비능력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모든 것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님’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기적을 요구했으나 그는 행하지 않았지요. 로마군병에 체포되었을 때 도망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분의 제자라면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셨던 비능력의 길에 초대된 것입니다. 앞서 얘기한 ‘가보르의 원칙’을 기억하시나요? 기술적으로 가능한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는 주장 말이지요. 엘륄은 이를 뒤집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한계점을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기술의 한계점’을 찾는 것과 ‘비능력’을 택하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제자가 되는 길이며, 우리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프레데릭 호뇽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학 개신교 신학부 종교철학 교수. 주요 저술로는 자끄 엘륄, 대화의 사상과 교회 안에서 분쟁의 조절 등이 있다. 지역교회에서도 강의 활동과 분쟁 조절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 프레데릭 호뇽 교수 ⓒ복음과상황 이범진
   
▲ 대화 마당에 함께한 자끄 엘륄의 손자, 제롬 엘륄 ⓒ복음과상황 이범진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한계점’을 기억해야 한다” 

‘프레데릭 호뇽의 대화마당’에 자끄 엘륄의 손자인 제롬 엘륄이 함께 참석했다. 제롬은 가족 도서관에서 할아버지의 책을 정리하는 일을 하면서, 세계 각국에서 열리는 자끄 엘륄 콘퍼런스에 참여하고 있다. 강연 전, 호뇽 교수와 제롬을 만나 얘기를 나눴다.

― 한국은 처음인가? 
호뇽 : 이번이 두 번째다. 5년 전 한국인인 아내의 가족을 만나기 위해 온 적이 있다. 올해는 자끄 엘륄 콘퍼런스 때문에 오게 되었다. 
제롬 : 나는 이번이 처음인데, 도착했을 때 깜짝 놀랐다. 프랑스 미디어에서는 북한 관련한 국제정세 외에는 한국 문화에 관한 소식을 접할 길이 별로 없다. 그런데 와서 보니 한국이 프랑스와 달리 기술이 무척 발달한 역동적인 사회라는 인상을 받았다. 생각보다 한국에 많은 크리스천들이 있고 서로 다른 유형의 교회들이 있는 것 같다. 

― 자끄 엘륄의 사상에 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나. 
호뇽 : 21세기의 가장 큰 문제는 환경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국지적인 문제가 아니라 세계의 문제이며, 정치 성향과 경제적 조건을 넘어서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술과 환경 문제에 깊이 천착했던 엘륄은 크리스천 정체성으로 사회문제를 분석했던 사람이라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웠다. 
제롬 : 1930년대에 자끄 엘륄은 이 세계의 끝, 한계점이 있을 거라고 말한 첫 번째 크리스천이다. 즉 지구의 생태 위기에 따른 경제적 위기와 대규모 이민 등을 포괄하는 문제로, 엘륄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에 대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모든 일들이 지금 실제로 일어나고 있지 않나. 당시 생태 위기를 말하는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없었다. 1차 세계대전 전에 독일에서 삼림 문제를 걱정하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전쟁 후 모든 것이 파괴되었고 생태 문제를 고민할 여력이 없었다. 

― 생태 위기를 떠올릴 때 개인적 영역에서는 작은 변화가 가능할지 몰라도 전체 시스템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느낀다. 시스템을 먼저 바꿔야 하는 문제도 있는 것 아닐까. 
호뇽 : 엘륄에게 생태 문제는 무엇보다 정치적 문제가 아닌 영적인 문제였다. 엘륄은 정치인이나 정당이 세상을 변혁할 수 있을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정치인과 정당은 각자의 목적이 있고 권력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작은 그룹은 모든 이들을 위한 선을 추구할 수 있다. 시스템을 바꾸고 싶다면 먼저 내 생각을 바꿔서 회심을 하고, 문제를 인식해야 한다. 그 이후 작은 그룹과 모든 단계에서 점진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제롬 : 엘륄의 사고를 완벽하게 설명하는, 그가 한 말이 있다. “세계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활동하라.”(Think globally, act locally.) 전 세계를 염두에 두고 환경운동을 하면 범위가 너무 커서 불가능하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소수의 사람일지라도 이 잡지를 읽고 문제를 인식해서 작게나마 개인이 할 수 있는 범위, 지역사회 안에서 작은 행동들을 한다면? 그리고 그 움직임이 모인다면 어떻게 될까? 
호뇽 : 몇 년마다 열리는 선거에서 우리는 투표를 한다. 그러나 정치인의 임기는 정해져 있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먹고 어디를 가고 어떤 에너지를 쓸 것인지 ‘선택’하는 일은 매일 일어나는 문제다. 내 일상의 선택의 결과는 모두에게 연쇄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매일의 선택이 환경과 관련된 운동인 셈이다. 

   
▲ 인터뷰는 10월 30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의 한 카페에서 진행했다. ⓒ복음과상황 이범진

― 환경 파괴의 주된 요인으로 공장식 대량 축산 문제를 꼽지 않나. 환경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이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제롬 :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동물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를 사랑한다고 나온다. 동물을 죽이는 것은 제한적인 일이었고, 이들을 괴롭히거나 착취하거나 고통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를 거스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동물들을 죽이고 먹는 것이 시스템화되었다. 책임 없이 죽이고 먹는 사회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지구의 재앙에 대비해, 친구들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고 알릴 책임이 있다. 인간은 하루에 무려 세 끼를 먹는다. 우리의 소비 선택으로 동물과 인간의 일상을 바꿀 수 있다고 본다. 나도 평소 비건(채식) 지향 식사를 하고 있는데, 그리스도인으로서 내 삶에 한계를 두는 일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호뇽 : 공장식 대량 축산은 한계를 잃어버린 사회의 민낯이다. 현대 사회에는 더 이상 한계라는 것이 없다. 성경에서 나타나는 첫 번째 한계는, 창조 과정에서 마지막 하루를 쉬는 하나님의 모습에서도 나타난다. 인간은 7일 동안 쉼없이 일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지구 또한 언제까지나 버텨낼 수 없다. 자끄 엘륄은 한계를 기억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 한국 개신교인들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믿는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비능력’이 그리스도인의 책임이자 제자도라고 얘기하면 이해를 대부분 못할 거다. 프랑스나 유럽 교회는 어떤가? 
호뇽 : ‘모든 것이 다 허용되지만 모든 것이 다 유익하지는 않으며, 모든 것이 허용되지만 모든 것이 다 덕을 세우는 건 아니다’(고전 10:23)라는 말씀을 기억하면 좋겠다. 엘륄의 생태학적인 분석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기술적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를 활용해야 한다는 시스템 속에서 자유를 잃어버렸고, 그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책임 또한 망각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책임과 자유 모두 손에서 놓아서는 안 된다. 프랑스에서는 지역 안건들이 지역 노회로 올라오고 전국노회연합으로 상정이 된다. 이 과정이 일 년 반 동안 이뤄진다. 올해 프랑스 개혁교회와 노회에서는 생태학을 주제로 선택했다. 지금 프랑스 교회는 녹색교회가 되어가는 중이다. 이미 지역 교회에서 의미 있는 결정들이 내려진 것으로 알고 있다. 예를 들어 교회에 갈 때 카풀을 해서 교회에 드는 에너지를 줄인다. 또 교회 안에서 일회용품을 쓰지 않는 움직임들이 있고, 생태 운동을 위한 자금을 모으기도 한다. 
제롬 : 지금으로부터 5세기 전 프랑스에서는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끊임없는 싸움이 있었다. 절망의 순간, 프랑스 개혁교회는 루터의 비텐베르크 반박문과 함께 세워졌다. 엘륄은 인쇄술의 발명으로 인한 성경 보급이 혁명을 이끌었다고 본다. 한국에서 당신들은 새로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다. 어쩌면 여러분들은 성경의 새로운 메시지들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는지도 모른다.  

 

 진행 김다혜 기자 daaekim@gosc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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