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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종교'를 만들다

기사승인 [349호] 2019.11.29  10: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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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7호 역사에 길을 묻다: 공의회의 사회사 11] 트렌트 공의회(1545-1563)

1. 종교개혁 다시 보기
제5차 라테란 공의회가 종료되고 몇 개월 후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게시되고 곧 유럽은 종교개혁이라는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지금까지 공의회 역사에서 살펴본 것처럼, 14세기 초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 이래, 가톨릭 교회는 여러 차례 분열을 경험했습니다. 대립 교황이 세워진 사례도 여러 차례 있었고 그런 사건을 겪을 때마다 교황의 권위는 한 풀씩 꺾여갔지요. 루터의 종교개혁과 이후 일련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등장은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에서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대개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과 가톨릭의 개혁 움직임을 별개로 보아왔습니다. 이러한 시각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완성된 이후에 후향적으로 그 흐름을 개괄하다보니 불가피하게 형성된 것입니다. 아마도 당대의 루터파 교회나 가톨릭 교회, 혹은 유럽을 지배하던 세력인 신성로마제국 황제나 프랑스 국왕의 인식은 오늘 우리의 인식과 같지 않았을 것입니다.

   
▲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가톨릭을 재건한 트렌트 공의회 모습. (그림: 위키미디어 코먼스/ CC-VY-SA-3.0)

프로테스탄트 진영에서는 트렌트 공의회로 대표되는 가톨릭의 종교개혁을 오랫동안 반동종교개혁(Counter Reformation)이라는 틀 안에서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가톨릭 교황은 교회개혁에 대한 인식과 의지가 없었다가 루터의 종교개혁 때문에 대응적·수동적으로 개혁에 나섰다는 시각이지요. 그런데 이제 종교개혁사 연구에서는 가톨릭 교회의 개혁을 이 틀에서 바라보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 꾸준하게 (물론 결과적으로는 불충분했지만) 개혁에 대한 열망과 요구들이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프로테스탄트 쪽에서 보기에는 가톨릭 교회 관점이라는 혐의를 둘 만한 이 견해가 지금은 종교개혁사 연구에서 중요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으며, Reformation(개혁)이 아니라 Deformation(개악)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수정주의(revisionism) 흐름까지 생겨났습니다. 만약 우리가 루터의 종교개혁과 트렌트 공의회를 서로 전혀 별개 사안이 아니라 교회개혁이라는 명제를 두고 벌어진 일련의 흐름 속에 놓는다면, 종교개혁이 시작된 1517년과 트렌트 공의회가 마무리된 1563년 사이의 40여 년을 같이 엮어서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전제는 루터나 혹은 루터파로 대표되는 프로테스탄트 진영이 처음부터 가톨릭과 완전한 결별을 의도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나뉜 역사를 이미 알고 있는 우리는 각 종파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역사를 종파적 시각으로 해석합니다. 이 경우 몇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우선, 종교개혁이라고 부르는 이 사건이 실제로는 단순한 종교 문제를 넘어 유럽의 정치 지형 안에서 이해해야 할 정치적 성격이 크다는 점입니다.

2. 카를 5세를 중심으로 종교개혁 읽기
종교로 인한 유럽의 분열 상황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이는 당시 유럽의 실권자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1500-1558)였습니다. 그 때문에 종교개혁기의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편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주도적으로 행사하고 문제 해결을 시도한 이는 교황도, 루터도 아닌 바로 카를 5세였습니다. 종교개혁은 신성로마제국의 다수를 차지하는 독일 제후들이 루터를 지원하면서 시작되었고 확산되었습니다. 황제는 제국 내부로 확산되는 프로테스탄트를 저지해야 하는 동시에, 교황에게 압력을 가해 교회 분열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종용했습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제국 내부의 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결정적인 한 가지 변수는 발칸 반도를 점령하고 서유럽의 목전까지 치고 들어온 이슬람의 서진(西進)이었습니다. 1529년에는 술탄 쉴레이만(1494-1566)이 이끄는 오스만 제국이 신성로마제국 수도 비엔나를 포위하여, 합스부르크 왕조는 쉴레이만과 평화협정을 맺어야 했습니다. 카를 5세가 제국 내부의 프로테스탄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군사적인 도모만을 할 경우, 제국은 불가피하게 내전에 휩싸이고 외부의 적인 오스만 제국의 위협 앞에 더 크게 노출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황제는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마르틴 루터를 단죄하지만, 그 뒤로도 루터를 보호하고 지지하는 제후들과 제국의회를 통해 평화적인 해결을 모색합니다. 제국의 분열은 곧 제국의 약화와 이슬람의 공세 앞에 무력해질 위험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1530년 시작된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를 통해 황제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화해와 일치를 촉구했습니다. 요한 에크(Johann Eck)와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이 각 세력을 대표하여 협상에 참여한 이 회의에서는 신학적 견해들에 대한 최대한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1530년 루터의 동지인 필립 멜란히톤이 프로테스탄트 진영을 대표하여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Confessio Augustana)을 작성하여 낭독했습니다. 루터교회의 교의를 담으면서도 직접적으로 교황을 비난하지 않아 타협의 여지를 남겨 두었습니다.

이에 맞서 가톨릭 진영에서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반박서’(Confutatio Confessionis Augustanae)를 작성했습니다. 이로써 양 진영은 상호 논의할 쟁점을 좁혀 나갔습니다. 누구보다 황제가 이 협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습니다. 남은 교리적 쟁점은 평신도에게 포도주를 나눠주는 성혈배령의 허용, 사제의 결혼과 수도 서원, 제후들이 몰수한 교회 재산의 반환 및 미사의 제사적 성격에 대한 논의였습니다. 미사에서 평신도에게 포도주를 나눠주는 것과 사제의 결혼 허용에 대한 논의는 루터파의 의견 개진 전에 이미 가톨릭 교회 내에서도 오랜 기간 논의된 것이었기에 수용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협상이 그러하듯이 일선 실무진보다 뒤에서 조종하는 세력의 영향력이 크다면 실무협상은 순조로울 수 없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몇 가지 양보는 있었지만, 루터는 교황제 폐지가 전제되지 않은 협상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결국 이 제국의회는 공의회 개최의 필요성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러나 트렌트 공의회가 열리기까지는 그로부터 15년의 세월이 더 걸립니다. 1545년 트렌트 공의회가 개최되지만, 황제는 신성로마제국의 문제는 내부적으로 해결하고자 제국의회를 압박합니다. 우선 제국의회 내에서 잠정안을 마련하여 그 규정을 공의회에서 통과시키기로 한 것입니다. 1547년 이른바 ‘무장 제국의회’에서 마련된 잠정안(interim)에서는 평신도 성혈배령과 사제의 결혼을 허용합니다. 이 잠정안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진영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해 분쟁이 발생합니다. 이 분쟁은 1555년 9월 아우크스부르크 평화협정(Peace of Augsburg) 체결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협정으로 유럽에서 최초로 루터파가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됩니다. ‘제후의 종교가 그의 지역의 종교’(cuius regio, eius religio)라는 명제가 이 협정을 대표합니다. 유럽 본토에서 가톨릭 교회 외의 교회가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이 협정으로 개인이 국가의 신앙과 다른 신앙을 추종할 경우 이주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는 점도 의미가 있습니다. 평화협정의 결론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가톨릭과 루터파의 화해가 아니라 루터파의 존재를 합법화함으로써 제국 내 종교가 공식적으로 나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결론을 이끈 주체가 다름 아닌 제국 황제였다는 것입니다.

따져보면 가톨릭 외의 종교가 유럽에서 인정된 최초의 사례는 아닙니다. 유럽 본토가 아닌 잉글랜드에서 1534년 수장령의 선포로 국교회가 성립된 선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사례는 커져가는 세속 군주들의 세력 앞에서 결국 교황이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잉글랜드의 국교회 성립도 아우구스부르크 평화협정도 이런 기울어진 상황 속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3. 카를 5세와 공의회 개최
트렌트 공의회는 이런 배경 위에서 접근해야 그 개최와 진행, 결정사항들에 대한 그림이 비로소 맞춰집니다. 중세 말부터 이어진 교회개혁에 대한 응답이 적절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가톨릭 교회는 영구 분열되었습니다. 단순히 루터파만의 문제가 아니라 제국 황제와 세속 군주들과의 관계에서 혼란을 겪어야 했던 가톨릭 교회는 루터의 종교개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의회를 소집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종교개혁을 시작한 이듬해 이미 루터는 공의회를 통해 개혁 안건을 다루자고 요청했습니다.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에서도 궁극적으로 루터의 문제제기는 공의회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황 입장에서는 공의회 개최가 이미 앞선 세기에 제기되었던 공의회 우위설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세속 권력의 각축장에 교황령을 지키는 세속 군주로서의 위상, 르네상스 후원을 통해 이탈리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시도 등은 전 유럽의 종교적 수장으로서 교황의 정체성을 흐리게 한 것입니다.

콘스탄츠 공의회로 교회 대분열이 끝나고 교황청이 다시 로마에 자리 잡은 후 르네상스 교황기의 교황들은 남부 유럽에서 교황의 정치력 확대를 위해 골몰했습니다. 그러나 1527년 카를 5세 휘하의 신성로마제국군이 클레멘스 7세 교황이 재위하던 로마로 진군해 무자비하게 약탈하고 살육한, 이른바 ‘로마의 약탈’(Sack of Rome)은 유럽의 무게추가 이미 확연히 기울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카를 5세는 가톨릭을 적극 옹호하는 가톨릭 황제였습니다. 그런 그가 가톨릭의 본거지인 로마를 침공하여 교황의 거처인 라테란 궁전을 병사들의 숙소와 마구간으로 사용한 일은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굴욕적인 사건입니다. 이제 유럽사에서 교황과 가톨릭이 하나라는 등식은 사라졌습니다. 이 굴욕의 당사자인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황제의 요구 사항인 공의회 개최를 약속합니다. 그러나 그럴 경우 교황권이 세속 권력과 공의회주의에 예속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적극적으로 응하지는 않았습니다.

공의회가 빠르게 열리지 못한 데는 유럽의 헤게모니를 놓고 쟁탈을 벌이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와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의 갈등도 한몫했습니다. 1545년 일련의 ‘이탈리아 전쟁’에서 프랑스에 승리한 카를 5세는 1544년 크레피 조약(Treaty of Crépy)을 체결하고 공의회 개최에 동의하도록 압박합니다. 그래서 1545년, 지금은 이탈리아에 속한 지역이지만 당시에는 신성로마제국에 속했던 트렌트에서 공의회가 개최됩니다.

4. 트렌트 공의회: 신구교 분열 확정, 위로부터의 개혁
유럽의 군주들이 이탈리아 반도에서 벌인 전쟁과 로마의 약탈을 경험하며, 교황 파울로스 3세(재위 1534-1549)는 역설적이게도 공의회를 통한 교회개혁에 대한 생각을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로마 약탈 후 얼마 지나지 않은 때에 교황이 된 그는 유럽에서 프로테스탄트의 대두 앞에서 교회를 지키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카를 5세의 압박으로 우여곡절 끝에 개최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트렌트 공의회는 예상치 못한 큰 결과를 낳았습니다.

1545년 12월 13일 개회식에는 의결권을 가진 참가자가 겨우 31명 참가한 소규모였습니다. 공의회 시작부터 황제와 교황 사이의 긴장이 있었습니다. 황제는 프로테스탄트와의 일치를 목적으로 한 반면, 교황은 프로테스탄트의 도전 앞에서 가톨릭 교리를 재확인하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이미 첫 번째 회기(1545-1548)부터 공의회는 루터의 ‘오직 성서’ 주장에 반해 성서와 더불어 전통을 신앙의 원천으로 받아들이는 결정을 내립니다. 이는 사실 황제가 원하는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교황은 트렌트에서 발생한 전염병을 핑계로 회기를 중단하고 공의회를 중단합니다. 황제는 로마 침공을 압박하며 위협하지만 교황이 사망해버립니다. 

2년 후 신임 교황 율리우스 3세(재위 1550-1555)가 주재한 두 번째 회기(1551-1552)가 열립니다. 1회기에 참여하지 않았던 프로테스탄트 진영이 두 번째 회기에는 참여합니다. 카를 5세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에 화해할 수 있는 여지를 기약한 것입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은 공의회 우위설을 주장하며 교황이 주재하는 회의를 거부했고, 더 이상 논의는 진척되지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이 마주앉은 마지막 회기가 되었습니다. 이제 황제 역시 현실을 받아들였습니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평화협정은 이 현실을 인정한 데서 나온 결과물입니다. 

교황 피우스 4세(재위 1559-1565)의 주재 하에 1562-1563년 열린 제3차 회기는 전통적인 가톨릭 교회의 핵심 교리인 칠성사를 다시 확정합니다. 트렌트 공의회는 루터와 프로테스탄트 진영이 제기한 새로운 교리에 대한 수용을 전면 거부하고, 제4차 라테란공의회 이후 형성된 가톨릭 교의들을 재확인합니다. 가톨릭의 성찬 교리인 화체설뿐 아니라, 성찬식에서 평신도에게 포도주를 나눠주는 후스파와 루터파 등 프로테스탄트의 관행을 거부합니다. 프로테스탄트 지역에서 인정되던 사제의 혼인 역시 트렌트 공의회에서는 수용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면벌부 교리 역시, 현금으로 매매하는 것을 금지하였을 뿐 교리 자체는 폐기되지 않았습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연옥 교리도 인정하고, 성인 공경이나 성물이나 성화상 사용에 대한 관행도 원칙적으로 유지되었습니다.

내용을 요약하면, 여전히 성직자와 평신도의 위계는 명확하게 차별이 있었습니다. 성찬 시 빵과 포도주를 모두 평신도들에게 주는 양종 성찬이 거부되고, 성직자의 혼인 역시 거부되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이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 양측이 어느 정도 합의에 이르렀는데도 말이지요. 가톨릭 진영에서는 전통적인 종교의 위계를 유지하기로 선택하는 대신, 사제의 독신을 다시 결정합니다. 아울러 수 세기 동안 관행적으로 용인되던 성직자의 축첩이 엄격하게 금지됩니다. 트렌트 공의회는 전통의 교리를 재확인하는 동시에 교회의 제도적 개혁을 통해 사제권의 오남용을 막고 사제의 도덕과 윤리를 개혁하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이런 결정은 이전의 가톨릭 공의회와 유사하게 위로부터 시도하는 개혁이었습니다.

1563년에 열린 최종 회기에는 200명 이상의 추기경, 주교와 수도원장들이 참여하여 서명했습니다. 공의회는 결정 사항에 대해 교황의 재가를 요청했고, 1564년 교황 피우스 4세는 교령(Benedictus Deus)를 반포하여 이 결정을 비준합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주도하여 기획한 트렌트 공의회는 황제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유럽 교회의 분열을 확정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제국의 평화와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카를 5세는 실패했습니다. 그의 통치 하에서 유럽의 종교 지형도는 분열을 확정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분열의 파열음이 지나치게 커지지 않고 잦아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공로입니다. 그는 제국 내에서 프로테스탄트와 협상하면서 그들의 지위를 인정해주는 한편, 교황과의 교섭하면서 공의회를 통해 가톨릭 교회가 다시금 안정을 찾아갈 수 있는 장을 열어주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따져보면, 트렌트 공의회의 주역은 교황이 아니라 공의회 소집을 지속적으로 요구한 카를 5세와 가톨릭 교회에 피할 수 없는 개혁의제를 던진 루터였던 셈입니다. 카를 5세는 아우크스부르크 평화협정 이듬해인 1556년 퇴위한 이후 에스파냐의 한 수도원에서 말년을 보내다 1558년 사망함으로써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집니다.

루터나 프로테스탄트 개혁에 비해 수동적으로 이루어진 개혁이라고 폄하되던 트렌트 공의회는 예상 외로 큰 성공을 거둡니다. 이는 가톨릭 교회가 세속 군주들과 각축을 벌이며 넓히고자 했던 세속의 영향력 확대를 포기하고, 가톨릭 교회 본연의 가치를 붙들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교황의 선택은 이미 이탈리아 반도 전체가 유럽 세속 군주들의 각축장이 되어 버린 상황에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교황의 자의에 의한 것이든, 타의에 의한 것이든, 그로써 가톨릭 교회는 여전히 가톨릭에 충성하는 유럽인들에게 호응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어갑니다.

5. 공의회 이후, 새로운 종교를 만들다
트렌트 공의회는 변화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습니다. 변화는 극적이었고 거대했습니다. 그 변화는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대체로 확정된 가톨릭 교리를 전부 재확인한 복고적인 것인 동시에, 변화한 세계 속에서 적극적으로 교회개혁 아젠다를 실행한 전향적인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 변화를 이끈 주인공이 교황 피우스 5세(재위 1566-1572)입니다. 그는 중세와 근대 초기 교황으로는 드물게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가톨릭 전례개혁을 이끈 인물입니다. 그가 이끈 변화의 핵심은 통일된 가톨릭 미사 형식 제정이었습니다. 1570년의 ‘로마미사경본’(Missale Romanum)은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새로운 미사 형식이 제정되어 대체될 때까지 무려 400년 동안 가톨릭 교회의 표준미사로 지켜졌습니다. 1962년의 미사와 구별하기 위해 구 미사(Old Mass)라고 불리는 이 트렌트 미사(Tridentine Mass)는 전례에서 여러 미신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형식을 재조정한 것이었습니다. 

트렌트 미사는 종교개혁으로 인해 분열된 가톨릭을 하나로 묶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자국어(vernacular) 예배를 드린 것과 달리, 트렌트 미사는 라틴어로만 진행되었습니다. 몇 가지 특징을 들자면, 사제는 동쪽을 향해 전례를 수행하며 회중들은 사제 뒤에 서 있게 됩니다. 엄격한 지침에 따라 모든 순서를 수행하고, 회중들은 미사에서 어떤 중요한 역할도 맡지 않습니다. 어느 지역에 가서나 동일한 언어와 형식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분열된 유럽에서 하나의 가톨릭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트렌트 미사는 유럽의 경계를 넘어 예수회 선교사들을 통해 중남미에도 정착합니다.

무엇보다 라틴어와 같은 뿌리를 둔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 로망스어군 유럽에서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라틴 기독교의 뿌리가 된 로망스어군 유럽이 가톨릭으로 남았다는 것은 변화보다는 전통을 택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트렌트 미사의 도입은 새로운 종교(New Tridentine Religion)를 만들어냈다고 평가 받을 정도로 가톨릭 교회 역사에 항구적인 변화를 가져옵니다.

이와 달리, 독일어와 영어, 네덜란드어, 덴마크어, 스웨덴어 같은 게르만어파에서는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롭게 대조됩니다. 게르만어파 지역에서는 1360년대 체코어 성서번역, 1380년대 위클리프 성서번역 등 중세 말기부터 성서번역이 이루어졌습니다. 루터도 1522년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습니다. 1526년에는 안트베르펜에서 네덜란드어 성서번역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점에서 성서는 새로운 종교성을 상징하는 반면, 전례는 전통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트렌트 공의회를 기점으로 교황은 가톨릭에 우호적이던 나머지 유럽 국가들을 자신의 우산 아래 하나로 묶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1560년대에 형성된 종교적·정치적 지형에서 보면 가톨릭은 수세에 몰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후 100년 가까이 이어진 종교전쟁(confessional wars) 속에서 가톨릭은 효과적으로 반등했습니다. ‘30년 전쟁’(1618-1648) 후에 맺어진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 결과, 유럽의 모든 프로테스탄트 국가의 영토보다 가톨릭 국가의 영토가 더 넓었습니다. 

트렌트 공의회는 다음 공의회인 제1차 바티칸 공의회까지 300년 동안 공의회가 없었을 정도로 가톨릭 교회에서 안정적이고 항구적인 변화를 이뤄냈습니다. 종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예배 형식은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자국어 미사를 허용하는 것으로 미사 형식을 개혁할 때까지 400년간이나 유지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교황이 더 이상 유럽 세속 군주의 위상을 추구하지 않고 종교개혁에 집중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 글에서 다루지는 않았지만, 이 가톨릭 종교개혁을 가능하게 한 큰 축은 로욜라의 예수회입니다. 교황이나 제도 교회가 담보하지 못했던 내적이고 정신적인 개혁과 변화라는 종교성을 그들이 뒷받침했기 때문에 가톨릭은 예기치 않은 부흥기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6. 나가며
지금까지 중세에 열린 열두 차례의 공의회를 살펴보았습니다. 중세의 첫 공의회인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869)는 이전의 언어인 그리스어가 아닌, 라틴어를 기반으로 독자적인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라틴 기독교의 등장을 알렸습니다. 중세의 마지막 공의회인 트렌트 공의회는 로망스어를 기반으로 한 라틴 기독교와 게르만어권의 프로테스탄트 기독교로 나뉘는 변화로 막을 내리는 평행 구조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중세의 라틴 기독교가 교황이 실질적인 세속의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형성된 반면, 중세 말의 분화는 자의건 아니건 교황이 세속 군주의 정체성을 벗어버리고 교회개혁과 실천이라는 종교적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중세 초의 변화를 견인한 것은 베네딕트 수도회였고, 중세 말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한 것은 예수회라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중세 가톨릭 공의회를 규정하는 일관되고도 핵심적인 문구가 바로 ‘위로부터의 개혁’(reformatio in capite)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가톨릭의 ‘위로부터의 개혁’이 실패함으로써 비롯되었으며,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의 재건은 이 ‘위로부터의 개혁’이 효과를 거두었음을 보여줍니다. 그 결과 프로테스탄트만이 아니라, 가톨릭 또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한국교회 개혁에 대한 요구가 거세지만, 대부분은 개혁의 실현에 비관적입니다. 개교회가 중심인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가톨릭과 같은 위로부터의 개혁을 시도할 주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가 많기는 하지만, 각 교단에 아래로부터의 지속적인 개혁 요구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면 위로부터의 개혁이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교단 총회를 불신한 결과, ‘위로부터의 개악’이 지속적이고 일관되게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을 바라보는 조금은 다른 시각이긴 하지만, 루터와 같은 아래로부터의 개혁 움직임과 요구는 결국 위로부터의 개혁을 이루어냈다는 사실을 트렌트 공의회는 보여줍니다.

■ 연재 순서
1. 왜 지금 ‘공의회’인가? : 사회사 관점으로 교회사를 읽어야 하는 이유
2. 동서교회 분열의 서막인가, 확장인가 :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3. 위로부터 이뤄지는 교회 개혁의 전형 : 제1, 2차 라테란 공의회
4. 권력의 정점을 향하는 교회, 그 빛과 그림자 : 제3차 라테란 공의회
5. 가톨릭 교회, 삶과 죽음의 지배를 완성하다 : 제4차 라테란 공의회
6. 종교개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 제 1, 2차 리용 공의회
7. 교회여, 낮은 청빈의 자리에 설 수 있는가? : 비엔나 공의회
8. 교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다 : 콘스탄츠 공의회
9. 실패로 끝난 교회의 근대 체제 실험 : 바젤-페라라-피렌체 공의회
10. 교회가 사람을 못 바꾸면, 사람이 교회를 바꿔야 한다 : 제5차 라테란 공의회
11. ‘새로운 종교’를 만들다 : 트렌트 공의회(1545-1563)
12. 제1차 바티칸 공의회
1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최종원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에서 교회사와 지성사를 강의한다. 인문주의 정신의 존중이 교회 갱신의 핵심이라고 믿고,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교회사 재구성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로》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왜 존 왕은 마그나 카르타를 승인했을까?》 등이 있다.

최종원 goscon@gosc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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