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호 심에스더의 독서일기] 《수치심》

   
▲ 수치심커트 톰슨 지음 / 김소영 옮김IVP 펴냄 / 2019년

수치심의 기억
학창시절, 공부를 못했다. 안 했다고 말하는 걸 더 선호하지만 결과 중심으로 볼 때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선배들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성적에 의해 인간의 존재 가치가 결정되는 경험들을 종종 할 수 있었다. 나는 선생님들을 종종 혼란에 빠뜨리는 학생이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평소 나의 유머와 재치(…), 혹은 기발한(…) 장난에 선생님들은 감탄을 금치 못하며 ‘매우’ 똑똑하다거나 보통아이가 아니라는 둥 과찬을 서슴없이 했는데 성적표만 나오면 매우 당황스러워 하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는 뜻이다. 평소 나를 매우 아끼던 한 교과목 선생님은 (자기 반 학생도 아닌) 내 성적표를 굳이 확인하고 찾아와 “너 이런 애였어? 놀라고 실망했어”라고 한 적도 있었다.

공부를 못하는 아이는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인식은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도 종종 발견할 수 있었다. 중학교 때 다니던 학원에서는 성적에 따라 ‘우열반’을 나누어 가르쳤는데 ‘우’반의 남학생 중 몇몇이 ‘열’반의 ‘여’학생들을 유독 놀리며 함부로 대하곤 했다. 나는 그 ‘여’학생들 중 하나였다. 한번은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있는데 위에서 킥킥 소리가 났다. 올려다보니 방금 말한 남학생들 중 하나가 화장실 문을 타고 올라와 내가 일을 보고 있는 모습을 보며 웃고 있었다. 무의식적이든 아니든 나를 공부를 못하는 아이로, 그래서 함부로 막 대해도 되는 대상으로 인식해서 저지른 짓이라는 걸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스스로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일이 어렵지 않은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저 두 사건을 자세히 말한 적이 별로 없다. 대충 휘뚜루마뚜루 언급한 적은 있지만. 좋은 기억이든 아니든 자기 경험을 떠들어대기 좋아함에도 저 일들에 대해서 떠올리고 말하기 어려운 이유는 ‘수치심’ 때문이었다. (위의 두 경험은 ‘수치심’ 하면 떠오르는 가장 직관적인 기억이다.)

골목을 꺾는 순간 마주치는 이름, 수치심
누구나 수치스러웠던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간혹 구체적인 사건이 머릿속에 얼쩡거릴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뇌인지 마음인지 어딘가에서 곧 내가 불쾌해지거나 부끄러움을 느낄 거라는 경고음이 울려댄다. 이불이 있다면 킥을 날릴 거라고도 알려준다. ‘수치심’의 감각이 스파이더맨의 위험감지본능처럼 ‘징징징’ 느껴진다. 평소 안 좋은 기분을 즐기는 취미가 있다면 몰라도, 아니라면 경고에 따라 기억 근처에서 ‘수치심’이 건드려지기 전에 발걸음을 돌리게 된다. 벗어나기는 어렵다. 조용히 덮고 갈 뿐….

‘수치심’은 대체 뭘까. 어떤 감정, 혹은 상태이기에 사람을 움츠러들게 하고 ‘그것’을 직면하기 어렵게 만들까. 벗어나기보다 피하기가 더 쉬운 이 ‘수치심’. 커트톰슨은 자신의 책 《수치심》에서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수치심이라고 부르는 이것은 정확히 무엇일까? 우리는 수치심이 일어나는 순간 그것을 어떻게 식별하는 것일까?” (37쪽)

그러나 대답은 쉽지 않다. 톰슨은 ‘수치심’이 명확히 정의내리기 모호한 개념이지만 우리에게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심리적 상태임을 설명한다.

“각자의 순례 길에 있는 사람들과 보낸 수많은 시간을 토대로 볼 때, 수치심을 정의하는 것조차 결코 쉬운 과업이 아니다. (…) 이것은 수치심이 의도하는 바의 일환이다. 그것의 모호함은 그것이 지닌 힘의 핵심 요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굴욕’ ‘당혹감’ ‘수모’ ‘불명예’ 등 여러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 (…) 궁극적으로 그 단어들은 본질상 우리가 수치심을 경험할 때 진입하는 실제 신경심리학적 상태를 나타내는 상징들이다.” (37쪽)

또한 톰슨은 “인간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수치심이라 부르는 이 현상에 감염되는 것”이며 “우리를 계속 병든 상태로 머물게 하는 데 전념”한다고 말한다. 수치심을 피하기만 하고 내버려 둘 경우 어떤 문제가 생기는 걸까? 그냥저냥 잘 살 수도 있지 않을까? 톰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치심은 예기치 않은 강력한 감정적 전환으로서 우리의 허를 찌른다. 그 결과 우리는 잘려나가고 밀려나는 감각, 최악의 순간에는 비루하다는 감각을 강하게 경험한다. 수치심의 뒤에 남는 것은 (예기치 않게 꺾여 버린 기쁨의 증거인) 깨어진 꿈과 상실된 관계의 잔해다.” (114쪽)

‘수치심’은 하나님과 우리 자신의 ‘기쁨’을 위해 창조된 우리 존재를 ‘손상’시키고 고립시켜 근본적 기쁨으로부터 우리를 매우 멀어지게 만든다. 때문에 그냥 두면 안 되는 거다. 그렇다면 수치심은 어떤 방법으로 해결되는가?

수치심 해결, ‘폭로’

“우리는 수치심이라는 근본적 느낌이 어떻게 판단하기, 숨기, 반응 강화, 고립을 초래하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노출이야말로 수치심이 치유되기 위해 필요한 것임을 이해하기란 그리 간단하지 않다.” (52쪽)

저자는 자신의 수치를 받아들이고 이를 폭로하는 것이 수치심을 해결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것은 피하고 싶은 우리의 직관에 반대되는 ‘반직관’에 해당하는 태도이다. 아무한테나 막 드러냈다가 더 큰 수치심을 경험할 수 있으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뼈아프게도 매우 와 닿는 방법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서 느끼게 되는 ‘수치심’인 만큼 기도만 입 아프게 할 일이 아니라 사람에게 고백하는 일이 훨씬 효과적인 방법이 된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이 자연스레 떠오르게 된다. 누구에게, 어디에 우리의 수치를 ‘폭로’ 할 것인가. 흔히 믿음의 공동체라 불리는 교회는 어떤가? 그 안에서 우리의 수치를 고백할 수 있는가? ‘수치심’의 고백이 다른 차원의 고통으로 되돌아오지 않을 확신을 우리가 속한 공동체와 사람들에게 가질 수 있을까?

《수치심》을 읽는 도중 잊고 있던 위의 두 사건이 떠올랐다. 애써 밀어둔 건 아니었지만 부러 들여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책을 내려놓고 충동적으로 평소 의지하는 언니들과 대화하는 카톡창에 밑도 끝도 없이 이야기를 꺼냈다. “있자나… 내가 책을 읽는데 예전에 수치스러웠던 기억 두개가 떠올랐어.” 이야기와 공감, 그리고 위로가 이어지자 새로운 ‘폭로’도 이어졌다. “나는 어렸을 때…” 개인적인 ‘수치심 폭로’라는 작은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작은 실험들이 성공으로 이어지는 이런 경험들이 쌓일 때, 우리는 수치심에 강력하게 손상된 자신의 회복 가능성을 보게 된다. 꼭 믿음의 사람들이나 교회 공동체가 아니어도 좋다. 그럴 수 없을 때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안타깝지만, ‘폭로’는 두렵지만 모험할 가치가 있는 일이다. 용기의 뽐뿌가 필요하다면 이 책을 40쪽까지만 읽어도 도움이 된다.



심에스더
성을 사랑하고 성 이야기를 즐겨하는 프리랜서 성과 성평등 강사이자 의외로 책 팟캐스트 〈복팟〉 진행자. SNS 중독자. 최근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공저)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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