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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아우르는 사랑

기사승인 [351호] 2020.01.21  16: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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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1호 부전자전 고전] 묵적의 《묵자》 읽기

   
   
 

1.
아빠와 편지로 고전에 관한 대화를 시작한 지 벌써 1년이 지났어요. 그새 12권의 고전을 놓고 치열하게도 얘기했네요. 아빠가 소개한 신학의 고전에 철학사의 고전을 덧대 비교하면서 이야기를 이끌어 오는 이 시간이 정말 즐겁습니다. 아빠는 제 편지를 받을 때마다 세미나 수업을 하는 기분이라고 하셨는데 저는 꼭 수업을 듣고 소논문으로 수업 내용을 정리해보는 기분이 들어요. 그만큼 어렵지만 재미있다는 거겠죠? 이렇게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아직 1년이나 남아있다는 게 기분이 좋네요.

그런데 지난 편지들을 돌아보면 제 글에 만족감도 있지만 아쉬움도 남습니다. 특히 저번 두 편지에서 나눈 플라톤의 《국가》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정치학》를 다시 읽어보니 부족함이 많이 느껴졌어요. 철학사의 거장들을 읽고 쓴다는 흥분에 글을 너무 학술적인 분위기로 쓴 게 아닌가 해서요. 

그런 아쉬움이 있던 차에 니그렌의 《아가페와 에로스》를 담은 아빠의 편지를 읽고 여러 차례 감탄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책장 한 구석에서 자주 보던 그 책을 택하셔서 기대가 되었는데, 신학사적 맥락에서 소개하면서도 니그렌의 삶, 책에서 비판할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와의 편지 맥락까지 잘 버무려진 글로 읽혔거든요. 기독교적 사랑인 아가페의 본질을 추적하는 책이라면 저도 꼭 읽어야겠습니다. 

아빠의 그 글에 대한 응답으로 저는 《묵자》(길)를 읽었어요. 우리 편지에서 비서구인이 등장한 첫 번째 글이 되겠네요. 고등학교 때까지는 동양철학을 더 많이 읽고 좋아했던 것 같은데, 철학과에 가면서부터 서양철학을 중심으로 공부하다보니 《묵자》는 아주 오랜만에 펼쳐봤어요. 《묵자》를 통해, 아빠가 이야기한 기독교의 핵심적이고 독창적인 개념인 아가페를 ‘묵자의 겸애(兼愛)’와 비교해보려고 해요.

2.
우선 제가 썼던 묵자와 관련된 짧은 글을 하나 옮기면서 개괄하려고 해요. 《여하튼, 철학을 팝니다》에 실었던 글 일부인데, 제목은 ‘묵자와 호빵맨’이에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호빵맨에 빗대서 묵자의 사상을 짧고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려 한 글입니다.

망토를 두르고 하늘을 날며 나쁜 이들을 무찌르는 호빵맨. 흔한 만화 속 영웅처럼 보이지만, 배고픈 사람을 만나면 자기의 머리를 떼어주는 호빵맨의 모습은 다른 만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죠. 다소 기괴한 이 설정은 「호빵맨」의 작가 야나세 타카시가 태평양전쟁 때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오는 동안 겪은 살인적인 배고픔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의 생각에 세상에 배고픈 것보다 괴로운 일은 없는데, 만화 속의 영웅들은 배고픈 사람들을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는 머리를 떼어내 배고픈 사람에게 건네주는 호빵맨을 창작합니다. 전 세계를 날아다니며 분쟁 지역에서 배를 곯는 어린이들에게 빵을 나누어주는 호빵맨은 그를 전투기로 오인하여 발사한 미사일에 맞는 것으로 최후를 맞이합니다.

고대 중국에도 호빵맨과 같은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봄春과 가을秋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잔혹했던 춘추전국시대. 200여 개에 이르는 제후국들이 몇 개의 국가로 통합하는 과정은 현대인이 상상할 수 없는 전쟁의 연속이었죠. 그 유명한 공자나 노자도 이 시기에 활동했습니다. 혼란한 때에 무엇이 세상을 이롭게 할까 고민했었죠.

모든 사람이 제 일을 하면서 서로 예를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공자는 정치로 뜻을 펼치기 위해 천하를 방랑했고, 노자는 흙탕물에 손을 대보아야 더 흐려질 뿐이라는 생각으로 세상살이에 손을 떼고 은둔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상가를 강력하게 비판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를 갖추다 보니 생기는 허례허식들을 감당할 수 없으니 예는 집어치우라고 했던, 지식인이 손 떼면 사회 개혁은 누가 책임을 지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던, 싸우지 말고 백성들이 굶지 않는 실용적인 정치를 갈망했던, 모든 사람을 차등 없이 사랑하라는 사상을 펼쳤던 묵자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 백성과 노동자의 삶이 실제적으로 개선될 수 있도록 평생을 고민하여 싸웠던 묵자의 사상은 춘추전국시대뿐만 아니라 헬조선에서도 울림이 있을 것입니다. 백성의 실제적인 삶을 방관하며 정치인의 사익을 위해 싸우는 정치는 지금도 만연하니까요.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는 묵자가, 아니 호빵맨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어떤가요? 《묵자》뿐 아니라 묵자를 다룬 해설서도 많이 읽으신 아빠가 보기에 묵자의 사상이 짧고 쉽고 재미있게 요약된 글인가요? 그 깊이 있는 사유와 통찰을 어떻게 하면 간단하게 쓸까 고민하다가 묵자를 처음 접했을 때 떠올랐던 호빵맨의 느낌을 바로 적용해보았어요. 지금 생각해보아도 묵자와 호빵맨은 서로 비슷한 철학을 공유한다고 자신합니다. 인용한 제 글에서 이미 설명해버렸지만(?) 본격적으로 이번 주제에 맞게 사랑을 이야기해볼까요?

3. 
우리가 매일같이 사용하면서도 정작 무슨 뜻인지 명확하게 알기 어렵고, 받기도 어려울뿐더러, 주기는 더 어려운 그 말, 사랑. 사랑이 넉넉하면 세상은 더 좋은 곳으로 변하지 않을까요? 아마 묵자도 사랑(愛)을 두고 비슷하게 고민하고 번뇌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묵자는 폭력과 전쟁이 넘쳐나는 시대를 살면서 사랑을 갈망한 사람이니까요. 다음 구절을 읽으면 묵자가 사랑 없음을 얼마나 통탄해하는지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난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 살펴보면 서로가 사랑하지 않는 데서 일어난다. 신하나 자식이 군주나 부모를 사랑하지 않음을 이른바 난이라 한다. 자식은 자신만을 사랑하고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다. … 아우는 자신만을 사랑하고 형을 사랑하지 않는다. … 신하는 자신만을 사랑하고 군주를 사랑하지 않는다. … 부모는 자신만을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다. … 형은 자신만을 사랑하고 아우를 사랑하지 않는다. … 군주는 자신만을 사랑하고 신하를 사랑하지 않는다. … 이것은 무엇인가? 모두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데서 일어난다. … 천하가 어지러워지는 일은 여기에 다 갖추어져 있을 뿐이다. 이것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 살펴보면 모두 서로가 사랑하지 않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201쪽)

묵자는 혼란스러운 시기에 공동체를 구성하는 관계들의 밑거름이 되는 가치와 신념들이 모두 무너지는 걸 보면서 사랑을 희망으로 삼았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중요한 단어를 묵자는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 걸까요? 사랑이라는 말만 들으면 수많은 용례와 맥락들이 떠오릅니다. 친구, 연인, 가족 등 대개는 ‘애정’의 의미지요. 아빠가 저를 사랑하고, 저도 아빠를 사랑할 때 우리는 여기서 사랑을 애정이라고 바꿔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아요.

반면 묵자가 사용한 사랑(愛) 개념은 애정(affection)보다는 고려(consideration)에 가깝습니다. 묵자의 맥락에서 ‘愛’의 어원을 분석한 자료를 찾아보니, 당시 愛의 글꼴은 旡(기:뒤돌아보다), 心(심:마음), 夂(쇠:천천히 걷다)의 합성어래요. “뭔가 뒤에 마음을 두고 돌아본 채 천천히 가는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이러한 어원에 비추어 볼 때 사랑은 ‘차마 끊지 못하는 마음’ ‘차마 잊지 못하는 마음’으로, 애틋하며 살가운 애정이라기보다 어떤 것이 좋은 효과를 거둘 수 있을까라는 관점에서의 냉정하고 차분하게 따지는 고려에 가깝겠지요.

그런데 묵자는 사랑이라는 말 앞에 한 글자를 덧붙여서 놀라운 개념을 만들어냅니다. 다름 아닌 겸(兼)인데요. ‘아우르다’는 뜻이에요. 그렇다면 묵자의 상징적인 개념인 겸애(兼愛)가 ‘모두를 아울러 사랑(고려, 배려)하는 것’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겠지요. 모두를 아울러 사랑한다면 난세를 극복해낼 수 있다는 묵자의 굳센 꿈은 《묵자》 전체에 흩뿌려져 있어요. 그런데 아빠, 이렇게 놓고 보면 겸애와 아가페는 정말 닮지 않았어요?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에요. 굉장히 많은 연구자들이 예수 이전의 사상가인 묵자의 겸애에서 기독교적 아가페를 발견하고 놀라워합니다. 심지어 겸애와 아가페가 일치한다는 다소 강한 견해도 있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겸애와 아가페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미 아빠가 알아채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묵자는 사랑을 통한 목적이 분명합니다. 바로 이로움(利)이에요.

천하에서 남을 사랑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을 가려 이름을 붙이자면 ‘별(別)’이겠는가, ‘겸’이겠는가? 곧 반드시 ‘겸’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이 번갈아 아우르는 것이야말로 과연 천하의 큰 이를 낳는 것이겠다. … ‘겸’은 옳다. … 인인(仁人)이 해야 할 일이란 반드시 힘써 천하의 이를 일으키고 천하의 해를 물리치기 바라는 것이다. 지금 내가 ‘겸’이 생겨나는 데를 알아보니 천하의 큰 이라는 것이다. 내가 ‘별’이 생겨나는 데를 알아보니 천하의 큰 해라는 것이다. … ‘별’이 그르고 ‘겸’이 옳다. (225쪽)

‘별’은 ‘겸’의 반의어로, 모두를 아우르는 것이 아닌 나와 가까운 것부터 챙긴다는 뜻이지요. 아빠가 니그렌의 신학을 소개하면서, 아가페를 크게 네 가지로 풀이한다고 했지요. 그런데 그중 첫 번째 요소, 아가페의 자발적이고 비동기적인 면은 묵자의 겸애와 그 결이 사뭇 달라요. 아빠는 아가페의 자발적인 측면을 ‘자기 밖 외부의 요구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자기 스스로 사랑하기로 선택했다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아무 까닭 없이 믿는 욥의 비동기적 신앙과 사랑을 예로 들었죠. 겸애는 그 정도로 형이상학적인 사랑은 아니에요. 모두를 아울러 사랑한다는 극도로 추상적인 이야기는 사실 그 동기가 명쾌하고 분명합니다. 그것이 모두에게 이익이 되기에 그렇게 해야 한다는 거예요. 더 나아가 이로움이 곧 의로움이라고도 합니다. 모두에게 이로움이 된다면, 그것이 의롭다는 말이지요.

4. 
모두에게 이익이 되게 하자는 묵자의 사상은 기독교적인 아가페보다 근대의 공리주의와 매우 비슷하고, 묵자를 공리주의적으로 분석하는 연구도 많이 있어요. 그런데 아빠, 묵자 철학의 고갱이인 겸애가 아가페와 외견은 비슷하나 속은 다른 점이 있지만 묵자를 읽다 보면 또다시 기독교와 가까운 친화성을 마주하고 흠칫 놀라게 됩니다. 바로 하늘의 뜻, 천지(天志)에 대한 논의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은 또한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싫어하는가? 하늘은 의를 바라고 불의를 싫어한다. 그렇다면 천하의 백성을 이끌고 의로운 일에 종사한다면 내가 곧 하늘이 바라는 바를 하는 것이 된다. 내가 하늘이 바라는 바를 한다면 하늘 또한 내가 바라는 바를 한다. 그렇다면 내가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싫어하는가? … 하늘은 생을 바라고 죽음을 싫어하며, 부를 바라고 가난을 싫어하며, 다스려짐을 바라고 어지러워짐을 싫어하는 것이다. (337쪽)

이 구절도 읽다보면 묵자의 하늘이 기독교의 하나님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무언가 다르다는 게 확연히 느껴집니다. 바로 인격성입니다. 기독교의 대표적인 특징이 하나님의 인격성이잖아요. 그러니 아빠가 얘기한 아가페의 네 가지 중 마지막, ‘하나님과의 친교를 불러일으키는 아가페’는 ‘하늘의 뜻을 실현하는 겸애’와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지요. 동양철학에서의 하늘(天)은 사용하는 사람마다 종교적인 특성을 부과하는 경우도 있지만, 기독교의 하나님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인격을 갖고 세상과 관계를 맺지는 않지요. 하늘은 그 자신의 지고하고 합당하며 근본적인 원칙이며, 그에 어긋나는 것을 수정하면서 세상의 일을 주재(preside)합니다.

하늘이 의를 바라고 불의를 싫어한다는 것도 하늘을 형이상학적이고 도덕적인 원리로 두고 퇴행하는 혼란한 시대를 개탄하는 의미에 가까워요. 인간들의 고통을 두고 애간장이 끊어지는 기독교의 하나님과는 많이 다르지요. 물론 묵자도 하늘이 천하의 백성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것 역시 의와 불의에 따른 상벌이 명확하다는 게 근거입니다. 이로써 하늘의 뜻(天志)은 사람들이 따라야 할 행위의 법도, 즉 제재의 기준이 되지요. 전란이 일상이고 규칙은 무너지던 시기, 최고의 객관성을 갖는 도덕적 원칙을 설정하고 그에 따라 모두를 아우르는 사랑을 역설하려는 묵자의 시도는 아빠가 얘기한 아가페의 둘째 요소인 ‘대상에 좌우되지 않는 사랑’, 셋째인 ‘죄를 용서하는 창조적인 사랑’과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사랑에 관한 묵자의 사상을 읽어보면서 동시에 묵자의 겸애와 니그렌이 정리한 아가페를 비교해보았는데, 아빠가 보시기엔 어떤가요? 니그렌의 그 광범위하고 장대한 아가페나, 천하 모두를 아우르는 묵자의 겸애나 여하튼 사랑이라는 게 참 어렵다는 사실만 확인한 것 같아요. 더구나 우리가 그동안 타자와의 마주침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폭력이나, 그 폭력을 독점하고 지배하는 국가를 이야기한 것을 두고 보면 사랑이 더더욱 터무니없는 동화로 들리기도 해요. 저 또한 그렇게 냉소적으로 접근할 때가 많고요. 사랑을 공부하면서도 사랑을 인정할 수 없는 이런 모습을 겨냥해 묵자는 단호히 이야기합니다.

천하의 인사가 모두 ‘겸’을 듣고서 그르다고 하는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 말하기를, “좋기는 좋다. 비록 그렇더라도 어찌 실제로 쓰일 수 있겠는가?”라고 한다. … 장차 나가 싸우려 할 때 왕래할 수 있을지 아직 알지 못한다고 가정하자. … 집안 관리와 부모 받들기, 처자 부양을 부탁함에 있어 ‘겸’을 주장하는 친구가 좋을지 ‘별’을 주장하는 친구가 좋을지 알지 못하겠는가? 내가 생각하건대 이런 경우를 당하여서는 천하에 어리석은 남녀할 것 없이 비록 ‘겸’을 그르다 하는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겸’을 주장하는 친구에게 의탁할 것이다. 이것은 말만은 ‘겸’을 그르다 하더라도 택하기는 바로 ‘겸’을 취하는 것이 된다. (228쪽)

할 말이 없게 만드는 한 방입니다. 모두를 아우르는 사랑〔兼〕이 허망한 공상에 불과하다는 사람이 부지기수지만, 정작 그들도 위험에 처할 때는 ‘겸’을 말하는 사람을 찾게 된다는 거지요. 서로 사랑하는 이상적인 세계는 비웃으면서 타의 사랑이 없으면 견딜 수 없는 인간의 본질적인 속성을 꿰뚫는 묵자의 방어네요.

5.
이렇게 사랑을 두고서도 아빠와 풍성한 이야기를 나눴네요. 사랑에 관해 읽고 생각하고 쓰고 이야기했지만, 사랑을 실천하고 사랑을 살아내는 것은 전혀 색다른 과제가 되겠죠?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을 받은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또한 저를 더 특별히 배타적으로 사랑한다고 한 아빠에게 저도 모두를 아우르는 겸애를 실천해야 하지만, 아빠를 더욱 ‘별’나게 사랑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대답하고 싶어요.

벌써 다음 주제를 고를 시간이 되었네요. 이번엔 ‘진리’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벌써 숨이 턱 막히죠? 진리를 탐구한다는 학문을 붙들고 있는 아빠와 저지만, 누군가 대뜸 “진리가 무엇인가요?”라고 묻는다면 즉답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거예요. 공부를 한 걸음씩 해나갈수록 역설적으로 진리가 무엇인지 더 모르겠다는 많은 학자들의 말을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고요. 진리를 주제로 편지를 주고받는다고 그 불투명하기 짝이 없는 보물이 더 선명해지지는 않겠지만, 진리에 관한 토론은 결국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의 기반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진리가 무엇인가, 라는 이 지나치게 큰 질문을 신학자인 아빠가 어떻게 소화할지, 철학도인 저는 어떻게 뚫어볼지 벌써 설레네요. 그럼 아빠가 평생 해오신 진리에 관한 고민을 어떻게 녹여낼지 기대하면서 편지를 마무리할게요.  

 


김희림
경희대 철학과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전공뿐 아니라 정치, 예술, 과학 등 다양한 학문에도 관심이 많은‘공부 덕후’라 할 만하다. 고등학생 시절, 신학자인 아버지와 주고받았던 종교와 학문에 관한 대화글을 엮어 《그런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요?》을 출간했다. 본지에 2년반 동안 ‘스무 살의 인문학’을 연재했으며, 페이스북 페이지 <철학 개그>에 올린 글들을 모아 교양철학서 《여하튼, 철학을 팝니다》(2018)를 펴냈다. 머리 아픈 철학책을 좋아하는만큼 베이스 기타를 시끄럽게 두들기는 취미를 즐긴다. ‘로고스서원’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토론하는 청소년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김희림 goscon@gosc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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