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호 성경으로 보는 세상만사]

 

오래만이다. 너희들에게 편지 쓸 일이 없어야 하는데 또 이렇게 쓰게 될 줄이야! 코로나19 사태로 온 나라가 몸살을 앓고 있구나. 이런 때 젊은 기독인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 것이 좋을까 생각하다가 마가복음 13장 이야기를 하고 싶어 펜을 든다.

마가복음 13장은 요한계시록, 마태복음 10:23 등과 함께 세상 마지막 날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란다. 세상 끝 날에 대한 가르침이라 학자들이 종말론이라고 부르지. 이 마지막 때에 관한 가르침들은 기독교 역사 초창기부터 신학적 이설과 이단들이 근거로 삼는 성경 본문으로 줄곧 악용되어왔단다. 심지어 성서학자들 가운데도 오류를 범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나타났고. 특히 계시록과 복음서 중 마가복음 13장이 그러했는데, 오늘은 이 본문을 함께 살펴보면 좋겠구나. 

이 본문이 오해를 낳거나 악용되는 몇 가지 원인이 있어. 가장 두드러진 건, 종말에 관한 말씀들을 ‘종말의 날이 언제 올지 계산하는’ 근거로 삼거나 그 날을 계산하려고 억지 해석을 하려 했기 때문이야. 성경 은 읽다가 잘 이해가 안 되는 곳이 나오면, 아 이 말씀은 잘 모르겠다 하고 그냥 넘어가야 한단다. 이해하고 알게 된 말씀만 잘 실천하고 살면 되는 거지. “네 이웃의 모든 소유를 탐내지 말아라” “거짓말 하지 말아라” 하는 구절들은 구태여 설명이 필요 없지. 이처럼 명확한 말씀만 실천하기에도 신앙이 벅찬데 난해한 구절들에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있겠니? 말씀은 실천을 위해 있는 거란다. 실천하는 만큼 알게 되는 것이 성경 말씀이지. 아는 만큼 실천하게 되는 것이 아니란다. 

이단들은 실천을 위해 성경을 읽지 않고, 자기네 교리에 쓸 근거를 찾아내기 위해 읽는다. 그들은 말씀을 악용하여 사람들의 정신이 흐려지도록 미혹(迷惑)하고, 그 미혹된 사람들을 광신도로 만들어 지배하려 하지. 기독교 역사에는 그런 집단들이 끊이지 않았단다. 그럼 이제 마가복음 13장 일부를 함께 읽어보기로 하자. 

예수께서 올리브 산에서 성전을 마주 보고 앉아 계실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따로 예수께 물었다.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이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이런 일들이 이루어지려고 할 때에는,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는 ‘내가 그리스도다’ 하면서, 많은 사람을 속일 것이다. 또 너희는 여기저기에서 전쟁이 일어난 소식과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을 듣게 되어도, 놀라지 말아라.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아직 끝은 아니다.” (3-7절, 새번역)

13장 전체 본문은 마지막 날이 오기 전의 징조(sign)들에 대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이 언제인지 계산하기 위한 근거로 징조들을 가르쳐주시지 않았어. 중요한 건 징조 자체보다 그 징조를 누가 만들어 내느냐는 거지. 이 본문은 언젠가 때가 되면 그날을 하나님이 하늘에서 툭 떨어뜨린다는 이야기가 아니야. 

마지막 날, 말 그대로 온 인류가 망하는 날의 징조는 누가 만들어내는지 생각해본 적 있니? 그 징조는 인간이 빚어내는 여러 일들과 인간이 만들어가는 이 세상에 있단다.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문화의 모습들, 곧 문명이 그 징조들이라는 얘기다. 그러니 마가복음 13장 말씀은 인간이 멸망의 문명을 만들어낸다는 가르침인 거야.

이 본문 뒤에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를 잡아 죽일 계획을 세우는 이야기가 나온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14:1-2) 그리고 율법학자들/종교의 위선과 권력지향성, 자본만능주의의 악마성을, 가난한 과부의 (신앙의) 겸허와 비교하여 가르침을 주시는 이야기(12:38-44)가 바로 앞 장에 나온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니까 마지막 날의 징조를 얘기하는 13장이 본론이고, 12:38-44은 서론, 14:1-2이 결론인 거지. 이처럼 복음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연결된 이야기란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모음집이 아니야. 복음서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하고 있어.

하나님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온 세상의 왕이 되셨다. 
이제 그 어떤 나라의 왕에게도 절대 복종하지 말고 오직 예수님의 삶과 말씀들을 통해서 보여주고 가르쳐준 말씀에 절대 복종하고 살아라. 그러면 행복한 나라, 안녕한 세상이 된단다. 
그렇지 않고 세상의 왕들에게 복종하고 살면 모두가 망하는 날이 온다. 반드시 온다. 그 날은 세상의 왕들이 옳았는지 아니면 예수님을 통해서 가르쳐준 하나님이 옳았는지를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날이다.

복음서의 이야기들은 이 거대한 이야기 틀 안에서 읽어야 하는 거야. 그렇기에 서론과 결론을 앞뒤로 두고 마가복음 13장을 읽으면 다름 아닌 인간이 만들어왔고 지금도 만들고 있는 문명의 모습들임을 가르치는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단다. 하나님이 무서운 심판자 같은 분이라서 핵폭탄을 떨어뜨리듯 멸망의 날을 떨어뜨린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거지. 오히려 그 말씀은 하나님의 애원으로 읽고 받아들이는 게 맞겠구나.

너희들이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으면, 예수가 가르쳐준 문명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모두 함께 멸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제발 십자가의 삶으로 모두 함께 멸망하지 않는 문명, 모두 함께 안녕하고 넉넉하고 즐거운 세상(문명)을 만들어가거라.   

당시 종교 세력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고 계획하는 이야기 바로 다음에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이름 없는 한 여인(과부와 함께 권력도 자본도 없는)의 이야기(14:3-9)가 나오고, 이어 가룟 유다의 배반 이야기(14:10-11)가 등장한다. 여기서 유다 이야기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예수를 사랑과 믿음과 희망, 곧 신앙의 대상으로 예배하지 않고 종교 창시자나 교주로 따르는 이들은 결국 예수 죽임의 주역을 맡게 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 아닐까? 

왜 예루살렘 성이 멸망했는지 아는가? 누가 예루살렘 성을 멸망시켰는지 아는가? 로마가 아니다. 예루살렘을 포함한 인간 문명이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아니라,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교주로 알고 따르는 자들이 주역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30년 후 예루살렘의 멸망을 지켜 본 마가가 증언하고 싶었던 내용 아니었을지. 특히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누구보다 그렇게 읽어야 할 듯싶구나.

오늘날 인류가 겪고 있는 기후변화, 코로나19 같은 각종 신종전염병은 모두가 멸망의 길을 가고 있다는 징조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지구온난화로 극지방의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상승하는 일이, 우리가 숨 쉬는 대기와 저 푸른 하늘이 매연과 미세먼지로 고통받는 것이 과연 하나님이 하늘에서 떨어뜨린 일일까? 

인간 문명은 과학기술의 발전 과정에서 인류의 안녕과 행복보다 정복과 전쟁을 위한 신무기 발명과 이용에 더 급급했지. 할로겐 원소를 발견하자 독가스를 만들어 한꺼번에 1만 5천 명을 죽인 나라가 바로 바흐와 베토벤과 괴테와 루터의 독일이야. 원자의 구성 비밀을 발견하자 원자폭탄을 개발해낸 것은 청교도 신앙을 내세우는 미국이었고. 월터 브루그만이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전 세계의 부를 문어발처럼 빨아들이는” 국가라고 비판한 게 바로 기독교 국가를 자처하는 미국이야. 

세계 각국의 군비 경쟁을 보면 마가가 전해주는 예수님의 경고, 세상의 마지막 날을 만드는 주역들은 기독교 국가들 아닌가 싶구나. 군대와 무기를 이끌고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아시아와 온 지구를 식민지화한 국가들이 다름 아닌 기독교 국가들이었다. 1,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온 세계를 피바다로 만든 주역도 그들이었어. 오늘날 지구온난화를 일으키는 탄소배출량이 많은 나라들도 바로 그들이지. 

기독교가 반성하지 않으면 지구의 마지막 날이 생각보다 더 빨리 다가올 것 같구나. 따라서 지금은 신앙 공동체인 교회가 어떤 문명을 만들고 있는지 돌아보고 반성할 때라고 나는 믿는다. 멸망의 날을 향해 달려가는 이 파괴적 문명을 멈추고 ‘함께 잘 사는’ 평화의 세상을 십자가로 일구어 가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고 믿는단다. 죽어서 천당 가는 것이 기독교의 사명이 아니야. 우리 세대는 ‘예수님 따르기 사명’에 이미 실패했어. 그러니 인류의 마지막 날을 재촉하는 이 ‘죽음의 문명’을 모두 함께 잘 사는 ‘생명의 문명’으로 바꾸는 것이 너희 젊은 기독인들의 사명이란다. 

한 미국의 감리교 감독이 간디를 찾아가서 물었지. “기독교 최대의 적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한참 생각하던 간디의 대답이 이랬어. “기독교 최대의 적은 기독교인입니다.”

한국 기독교 최대의 적은 한국 기독교란다. 할아버지 세대의 기독자들이 만들어낸 교회가 기독교 최대의 적이 되고 말았어. 정말 미안하다. 우리 사회의 이단과 사교가 기독교의 적 아니냐고? 그들은 일제 때부터 생겨난, 사실상 한국 기독교의 산물이야. 이 또한 미안하구나.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 역할을 못하면, 교회가 십자가 길이 아니라 가룟 유다의 길을 가면, 성직자들이 교주처럼 성도들 위에 군림하면, 교회에 필요 이상의 돈(헌금)이 쌓이면, 교인 수나 교회당 크기가 교인들의 신앙 실천보다 중요시되면, 이단과 사교가 생겨나 기독교인들을 미혹한단다. 그 결과 멸망의 날이 가까이 다가온다. 코로나19 사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저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라고 하시는 징조라고 나는 믿는다. 그 누구보다 우리 기독인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징조라고.

우리는 모두 자신의 신앙생활이 옥합을 깨뜨린 무명의 여인 같은지, 아니면 가룟 유다와 같은지 성찰해야 할 시대를 살아간다. 그렇기에 지금은 우리의 기도가 주기도문이어야 할 때란다. 나 한 사람의 신앙이 내가 속한 가정과 교회와 학교의 문화를 구하고, 나아가 우리나라와 아시아와 온 인류를 구하는, 과부의 동전 한 닢, 이름 없는 여인의 향유가 되기를 기도해야 할 때란다. 

 

2020년 3월 9일 새벽,
거창에서 시골 할아버지가.

 

   
 

 

전성은
서울대 농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1965년 거창고 교사를 시작으로 2006년 교직에서 물러나기까지 41년간 지방 읍내의 학교에서 ‘지천명(知天命)의 교육’에 일생을 쏟았다. 샛별중학교 교장, 거창고등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으며, 참여정부 시절 대통령 직속 교육혁신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한 바 있다. 퇴직 후에도 교육 정책 및 교사 교육에 관한 저술과 강연 활동을 활발히 이어오고 있으며, 국제성서연합회 세계성경번역센터 한국 편집인으로 성경 번역에도 매진해왔다. 지은 책으로는 ‘교육론’ 3부작인 《왜 학교는 불행한가》 《왜 교육은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가》 《왜 교육정책은 역사를 불행하게 하는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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