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호 심에스더의 독서일기]

   
▲ 수전 팔루디 지음 / 손희정 옮김
아르테 펴냄

20대 초, 당시 청년부 목사님이 진행하는 영성 훈련에 참여했다. 이때만 해도 ‘아무나’ 갈 수 없었던, 소수만이 면접을 통과해서 최종적으로 뽑혀야 받을 수 있는 특별(하게 여겨진) 훈련이었다. 먼저 경험한 선배(?)들은 거기서 뭘 하는지 절대로 알려주지 않으면서 정말 좋았더라는 말을 흘리며 예비 지원자들을 매혹했다. 나도 매혹당한 이들 중 하나였다. 10대 때 겪지 못한 질풍노도의 시기를 20대에 와서 지독히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가장 골몰해 있던 것은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었다. ‘정체성’을 둘러싼 고민의 실마리를 이 영성 훈련에서 발견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누군가 심어주었던 것 같다. 여차저차 심장 쫄깃한 절차를 거쳐 기회가 주어졌다. 기대되면서도 두려운 마음으로 4박 5일의 짐을 싸던 전날 밤의 감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꽤 좋았는데, 특히 기억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빛이 뭉근한 방에 참가자들이 동그랗게 모여 앉아 눈을 감고 진행자(목사님)가 던지는 질문에 돌아가며 답했다. 모두가 하나의 ‘정답 아닌 정답’을 찾아가는 시간이었다. 이날 진행자가 던진 질문은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합니까?”였다. 우리는 시계(혹은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며 대답했다.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저는 심에스더입니다.” “그건 당신의 이름입니다. (다음 사람에게)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저는 한국 사람입니다.” “그건 당신의 국적입니다. (다음 사람에게) 당신을 누구라고…” 

이렇게 질문과 대답이 계속 이어지며 진행자가 유도하는, 어떤 답을 향해 모두가 함께 생각을 모았다. 이 질문이 유도한 답은 ‘누구라고도 할 수 없는 나’였다. 재밌었던 점은 처음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 끊임없는 질문과 서로의 다양한 대답에 의지해 답을 찾아감과 동시에 ‘정답 아닌 정답’, 즉 물리적 답은 같아도 그 의미는 대답하는 사람마다 다르게 느낀다는 점이었다. 이날 경험한 끈질긴 질문과 그로부터 도달한 ‘누구라고도 할 수 없는 나’라는 답은 ‘정체성’ 문제로 고민하던 나에게 적어도 다음 질문으로 나아갈 발판이 되었다.
 

삶과 죽음 외에 이분법은 없다 
수전 팔루디의 《다크룸》은 약 30년간 연락 없이 지내던 아버지가 40대 딸에게 보낸 메일로부터 시작된다. ‘변화들’이라는 제목의 메일에는 태국에서 성별 재지정 수술을 받아 여성이 되었다는 아버지, 스티븐 팔루디가 스테파니 팔루디의 모습으로 찍은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아버지를 만나러 헝가리로 간 팔루디는 아버지로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 볼 것을 제안 받는다. 호기심이라고만 할 수 없는 복잡한 마음과 궁금증을 가지고 그녀는 ‘헝가리 유대인’으로 태어난 이슈트반 프리드먼이 ‘순수한 헝가리인’ 이슈트반 팔루디를 거쳐 ‘미국 남성’ 스티븐 팔루디로 살다가 76세에 스테파니 팔루디가 된 삶의 과정을 끈기 있게 추적한다. 무려 10년 동안. 

이 과정에서 수전은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로서, 트렌스젠더리즘을 전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를 거부하는 페미니스트로서, 때로는 내밀하게 때로는 냉정하게 거리를 오가며, 끊임없이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또한 이슈트반 프리드먼이 스테파니이기까지, 그 후에도 계속 단언하기 어려웠던 그녀의 정체성에 얽힌 다양한 연결고리(홀로코스트를 비롯한 사회, 문화, 젠더, 종교, 인종주의 등)를 촘촘하고 깊이 있게 탐구한다. 아울러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아프고도 지겹게, 거부할 수 없도록 ‘보여 준다’. 스테파니의 정체성에 대해 탐구하고 많은 정보를 알아갈수록 수전은 스테파니가 떠올렸을 괴리된 질문들에 공감한다. 그리고 스테파니의 죽음 앞에서 그녀는 하나의 사실을 깨닫는다.

살아있는 동안,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유대교도인가 기독교도인가? 헝가리인인가 미국인인가? 여자인가 남자인가? 너무 많은 상반되는 것들이 함께 존재했다. 하지만 그녀의 누워있는 몸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 우주에는 단 하나의 구분, 단 하나의 진정한 이분법이 있구나. 삶과 죽음, 다른 모든 것들은 그저 녹아 없어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623쪽)


단정 대신 질문이 필요하다 
스테파니 팔루디의 삶에서 얼마 전 한 여대에서 벌어진 혐오와 배제 사건이 자연스레 연상되었다. 약자와 소수자가 함께 연대하고 서로를 살리는 ‘가치관’의 이름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페미니스트로서 저자가 6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실 중 하나는 성별 하나로 우리의 정체성을 설명할 수 없고, 타인의 정체성 역시, 보이는 단편적인 이미지로만 판단하고 결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삶은 그들이 처한 다양한 상황과 조건들에 의해 유기적이고 복잡하게 구성된다. 우리는 ‘누구라고도 할 수 없는 나’로서 살고 있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페미니스트든, 트렌스젠더든, 피해자든, 가해자든. 그 모든 것이든 아니든. 누구도 무엇이기‘만’ 하지 않다. 

때문에 ‘지금’의 나의 옮음이 나와 다름을 찌그러뜨리고 늘리고 잘라내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나그네를 꾀어 쇠침대에 눕힌 채 침대 길이에 맞춰 늘이거나 잘랐다는, 그리스 신화의 괴수 이야기 ―편집자)가 되지 않도록 우리는 계속 질문해야 하지 않을까? 단정은 최대한 뒤로 미루고.

수전은 아버지를 더 잘 알기 위해, 그녀에 대해 쉽게 단정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했다. 그리고 들었다. 

“이봐, 리스너!!” 아버지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진심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내 이야기를 들어 주는 사람이지.” 

 

 


심에스더
성을 사랑하고 성 이야기를 즐겨하는 프리랜서 성과 성평등 강사이자 의외로 책 팟캐스트 〈복팟〉 진행자. SNS 중독자. 최근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썼다. 

 

저작권자 © 복음과상황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