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호 우종학 교수의 과신문답]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며 높은 권위를 부여합니다. 그런데 정작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고민하거나 제대로 배운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는다’는 건, 하나님이 우리 귀에 대고 속삭여 주는 일이 아닙니다. 성경은 문자로 기록된 글이며 모든 글은 나름으로 읽는 방법이 있습니다.

창세기 1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양한 문학적 표현들이 들어 있고 고대 근동의 상식과 세계관이 담겨 있습니다. 바다에 둘러싸인 편평한 지구, 해와 달과 별들이 들어 있는 궁창, 궁창 위에 물층, 그리고 그 위에 신의 자리가 있다는 당대의 상식은 창세기 1장에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하지만 이런 고대의 우주관은 성경이 가르치려는 지식이 아닙니다. 그런 내용들은 단지 성경이 계시하는 내용을 담는 그릇에 불과합니다. 

창세기 1장을 과학 교과서처럼 읽지 말라는 구약학자들의 조언을 들려주면, 다음과 같이 되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럼 창세기 1장은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기록한 것이 아니고 단지 소설에 불과한 것인가?”

창세기에는 비유나 과장법, 혹은 문학적 표현이 담겨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오래전에 폐기처분한 고대 근동의 상식과 우주관도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창세기를 그저 소설에 불과하다고 결론 내린다면 참 어이없는 일입니다. 성경을 과학 교과서처럼 읽는 것도 문제지만, 반대로 성경을 소설이나 허구로 읽는 것도 올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비유는 사실을 허구로 만들지 않는다
비유는 사실을 허구로 만들지 않습니다. 예화를 들어볼까요? 

옆집 친구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듣고 온 다섯 살짜리 아이가 엄마와 대화를 나눕니다. “엄마, 누가 그러는데 엄마는 내 친엄마가 아니래. 엄마가 나를 낳은 거 맞아?” “그럼, 내가 너를 낳았지. 그러니까 당연히 친엄마지!” “진짜로 낳은 거 맞아? 어떻게 낳았어?” 잠시 고민하던 엄마는 이렇게 답합니다. “엄마가 너를 배꼽에서 낳았단다.” 이 말을 들은 아이는 안도의 숨을 쉬고 의심을 거둡니다. 

도킨스와 창조과학자가 이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도킨스가 먼저 아이에게 말합니다. “얘야, 아기는 절대 배꼽에서 나올 수가 없단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는 걸 보니 이 여인은 분명 네 친엄마가 아니야.” 이어서 창조과학자도 아이에게 말합니다. “얘야, 저 말에 흔들리지 마라. 엄마가 거짓말을 할 리가 있겠니? 배꼽으로 너를 낳았다는 말이 믿기 힘들 수도 있겠지만, 엄마를 신뢰하고 그대로 믿어야 한단다.”

여기서, 엄마가 아이에게 들려준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아기를 낳는 방법일까요? 배꼽의 중요성일까요? 아닙니다. 내가 너를 낳았다는, 내가 너의 친엄마라는 사실입니다.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 수준에 맞게 문학적 표현을 썼을 뿐입니다. 배꼽으로 아기를 낳았다는 표현이 과학적으로 옳지 않다고 해서, 엄마가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의심해야 할까요? 반대로, 배꼽으로 낳았다는 문학적 표현을 받아들이면 친엄마라는 사실도 허구로 전락하는 걸까요? 아이가 성장하여 아기가 배꼽에서 태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친엄마가 맞다는 엄마의 말을 더 이상 믿지 않고 폐기처분해야 할까요?

배꼽 때문에 생모 버리는 격
창세기 1장은 고대 근동의 문화적 배경을 가진 히브리인들이 이해할 수 있게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어휘를 사용하여 그들에게 익숙한 상식과 지식을 전합니다. 고대 근동의 히브리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주이심을 알려주는 것이 창세기 1장의 목적입니다. 다시 말해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누가 창조주이며 인간의 정체성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이 목적이라면, 비유를 비롯한 다양한 문학적 표현과 더불어 현대과학과는 맞지 않는 고대 근동의 상식과 세계관이 담기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따라서 현대과학과 배치된다고 하여, 창세기 1장을 허구라고 판단한다면 배꼽 때문에 생모를 버리는 격입니다. 

비유와 같은 문학적 장치나 고대 근동의 상식은 하나의 도구일 뿐입니다. 구체적인 시공간 안에서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과연 누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제한된 세계관과 이해를 가진 고대 근동 히브리인들에게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알려주는 텍스트가 바로 창세기 1장입니다. 

비유 때문에 사실을 버리거나 비유를 사실로 여기는 두 가지 실수를 모두 경계해야 합니다. 비유는 사실을 허구로 만들지 않습니다. 

 

 

■ 더 읽기
 

과학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
우종학 지음 / 새물결플러스 펴냄

‘6장. 성경 해석의 역사’와 ‘14장. 과학의 발전과 성경 해석의 변화’를 보면, 과학의 발전에 따라 성경 해석이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 그 역사를 간단히 살펴볼 수 있다.

 

 

 

 

 

 

오리진 : 창조, 진화, 지적설계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들
데보라&로렌 D. 하스마 지음 / 한국기독과학자회(KCiS) 옮김 / IVP 펴냄

‘4장. 하나님의 세계는 하나님의 말씀과 모순되는가?’ ‘5장. 창세기: 일치론적 해석’ ‘6장. 창세기: 비일치론적 해석’ 부분은 성경 해석과 과학에 관련된 좋은 설명을 제공한다.

 

 

 

 



우종학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교수이며 거대 블랙홀과 은하 진화를 연구하는 천문학자. 예일 대학교에서 박사학위 취득 후 캘리포니아 대학교와 UCLA에서 연구원으로 일했고, 미 항공우주국(NASA) 허블 펠로십(Hubble Fellowship), 한국천문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천체물리학 저널> 등 국제학술지에 100여 편의 논문을 게재했으며, 대중을 위한 과학 강연과 저술에도 적극적이다. 과학과 신앙의 관계를 새롭게 연구하고 교육하는 단체인 ‘과학과 신학의 대화’(과신대)를 설립해 대표를 맡고 있으며, 블로그 ‘별아저씨의 집’을 운영 중이다. 《우종학 교수의 블랙홀 강의》 《과학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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