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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치유’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은 시점은 2013년 어간이었다. 남은 일생을 아픈 몸으로 살아내야 함을, 2002년 진단 이후 11년 만에 ‘다시’ 명백하게 받아들였다. ‘치유 사역자’를 만나고 일련의 과정을 거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2022년 7월·380호). 고등학생 때 예수를 영접한 후로 몸을 ‘치유’하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투철했기에 적잖은 충격이 남았다. 그동안 내가 예수만 믿으면 만사형통이라고 여기는 신앙인은 아니었다. 고지론과 번영신학을 미워했으며,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신앙생활
장애와 신앙의 교차로에서
강동석
389호 (2023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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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안 좋아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관계가 끊긴 한 지인의 인사말에 저렇게 답하고 싶은 충동을 여러 번 느꼈다. 그는 내게 장애가 있음을 알게 된 후, 매번 ‘몸은 좀 어떠냐’고 물어왔다. “그냥 그래요.” 나는 아무렇지 않은 양 대꾸했다. 이따금 시니컬한 태도를 드러냈지만 담아둔 말은 꺼내지 못했다. 마주침이 잦은 사이였다. 다른 얘길 하다가도, 공백이 생기면 그는 꼭 내 ‘몸’으로 화제를 돌렸다. 먹는 약은 없는지, 얼마큼 불편한지, 정확히 어떤 증상인지…. 듣거나 답하다 보면 짜증이 밀려왔다. 당시에는 선의로 해석해서 참고
장애와 신앙의 교차로에서
강동석
388호 (2023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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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이 시간이 지나가길, 몇 번이나 간절히 바랐다. 학창 시절 체력장, 특히 단거리 달리기 기록을 측정하는 순서. 내 차례가 오면 어김없이 심장은 크게 뛰었다. 달음질할 때의 어색한 몸짓이 창피했고, 뛰고 난 뒤에 허벅지나 장딴지를 타고 흐르는 저릿한 느낌과 약간의 근육통도 싫었다. 단거리 최고 기록은 뒤에서 두 번째. 달리기로 인한 스트레스에 진저리가 나서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딱 한 번이었다. 그 외 꼴찌 자리는 내 몫이었고, 나도 두 살 터울인 형과 마찬가지로 ‘거북이’라고 놀림을 받았다. 중학교 이후로
장애와 신앙의 교차로에서
강동석
387호 (2023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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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몸을 갖고 사는 일이 부쩍 버겁다. 옷을 벗어 내팽개치듯 몸뚱이도 벗어던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싶다. 몸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삶 자체가 때론 번잡스럽고 귀찮은 것이다. 이는 단순히 내가 장애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통증이나 제약이 있을 때 몸은 더욱 선명하게 의식된다. 몸을 가진 인간인 이상, 감기나 몸살이 찾아와서, 혹은 편두통 때문에, 아니면 복통·설사·변비 등으로 하루 일상을 통째로 내줘야 하는 날을 언제고 맞닥뜨리게 된다. 빈도의 차이만 있을 따름이다. 이때 몸의 습관이나 생활 환경으로 인한 고생도 있지만, 잔병과의
장애와 신앙의 교차로에서
강동석
385호 (2022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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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터. 수골실 철판 위에 흩어진 뼛가루들 사이, 철심 한 덩어리 널브러져 있었다. 여전히 뜨거워 보여서, 건드리면 델 것 같다는 생각이 반사적으로 들었다가, 침묵은 불현듯 찾아왔다. 십수 년 동안 고관절 자리에 박혀있던 것이다. 뼈가 괴사할 정도로 알코올을 들이부은 시간이 철심과 함께 발굴되었다. 술과 담배가 일상이던 삶. 평소 아버지는 책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셨다. 마른오징어 다리 하나로도 한 시간 넘게 자작하며 마셔댈 정도였으니, 강소주에 가까웠다. 쉰넷에 세상을 뜬 아버지에게 ‘늙어감’의 시작점이 있다면, 철심을 박아넣은
장애와 신앙의 교차로에서
강동석
384호 (2022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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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1)를 앓았던 할머니는 마루에 앉아, 하루에도 몇 번씩 똑같은 노래를 부르곤 하셨다. 일본어로. 일제강점기 학교에서 배웠다는 말을 매번 덧붙이셨다. 가사를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소학교 저학년 아이들이 줄지어 소풍 가는 장면이 연상되었다. 간혹 집안이나 자식에 대한 자랑거리를 한참 늘어놓는 등 철 지난 이야기도 세트메뉴처럼 따라붙었다. 늘 비슷한 레퍼토리. 어렸을 적부터 그런 할머니를 자주 보았다.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무렵, 부모님이 보증을 잘못 서서 우리 가족은 아파트를 내놔야 했다. 결국 할머니·할아버지 댁으로 이사하게
장애와 신앙의 교차로에서
강동석
383호 (202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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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버스를 마지막으로 탔던 날은 5년 전 주일이었다. 3년간의 가나안 성도 생활을 청산하고자 교회를 알아보고 다녔다. 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합동·고신, 기독교한국침례회 소속 교회에 등록한 전력이 있었다. 이명(移名) 절차는 밟지 않았다. 말하자면, 이중교적을 넘어 사중교적이었다. 교단별 차이를 별로 실감하지는 못했는데, 죄다 엇비슷하게 보수적이었던 탓이다. 이사·진학 등으로 옮긴 경우가 대부분이고, 확실한 의지를 갖고 바꾼 적은 두어 번이었던가. 대한예수교장로회 대신, 한국기독교장로회,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교회를 등록 없이
장애와 신앙의 교차로에서
강동석
381호 (2022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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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대한 첫 기억이 아닐까 싶다. 요즘도 어쩌다 이른 시간에 길을 나서면, 대여섯 살 무렵 자주 맡았던 촉촉하고 산뜻한 새벽 공기 냄새가 느껴지곤 한다. 아스라한 기억 속 어머니는 반쯤 잠이 든 나를 업고서 교회로 향했다. 내 자리는 새벽기도회가 열리는 1층 소예배실 뒤쪽이었다. 늘 그렇듯 어머니 곁에 누워 쏟아지는 졸음에 몸을 맡겼다. 감은 눈 위를 오가던 차가운 새벽의 기운, 귓가를 적시던 찬송과 기도 소리가 불편하지 않았다. 방석을 베고 깔깔한 이불보에 감싸여 새근거리던 날들은 아련하게 평온했다.아주 어렸을 때부터 교회와
장애와 신앙의 교차로에서
강동석
380호 (2022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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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태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계획된 임신이 아니었고, 아버지는 태중에 있는 아기를 지우라고 했다. 정확한 이유는 12년 전 봄을 기점으로 영영 알 수 없게 되었는데, 아버지가 심근경색으로 급작스럽게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지금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임신중절 권유가 내가 가진 병 때문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보인자’인 어머니가 남자아이를 낳았을 때 병을 안고 태어날 확률은 50%였다. 당시 부모님은 이 사실을 몰랐고, 근이영양증의 가능성을 알게 된 시점은 내가 태어난 뒤였다.출산에 영향을 준 변수 하나는 ‘점’(占)이었다.
장애와 신앙의 교차로에서
강동석
379호 (2022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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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본당으로 가는 층계참 위에서내가 어렸을 적에 다녔던 삼천포의 모교회 예배당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2층 본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생각난다. 지은 지 수십 년 된 건물이었으나 상태는 양호했다. 설계하면서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든 사람들을 얼마큼 배려했을지 모르겠다. 다만 어렸던 내가 느끼기로 마냥 가파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난간을 짚으면 크게 불편하지 않게 오를 수 있었다. 병이 덜 진행된 시점이라서 이 길이 ‘장애’로 인식되지 않았고, 건물 이곳저곳에 계단이 많다는 점도 크게 의식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생
장애와 신앙의 교차로에서
강동석
377호 (2022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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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생이 끝났으면, 목숨이 끊어졌으면, 하고 바랐던 때가 있었다. 중학교 3학년이던 나는 중간고사를 앞두고 터진 사건 이후로,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베개에 얼굴을 파묻는 일이 일상이었다.서있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진다“우리 반만 55점 먹고 들어간다.” 중간고사 한 주 전, 국어 수업이 끝나고 반장은 교실 앞문과 뒷문을 걸어 잠그게 한 후, 분필을 들어 칠판에 1번부터 11번까지 객관식 답안을 적어 내려갔다. 나는 그 과정을 보며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교실 안에서 권력을 지닌 아이들은 모든 문제의 답안이 적힌
장애와 신앙의 교차로에서
강동석
376호 (2022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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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여름날을 잊지 못한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은 채 유난히 많은 말을 늘어놓았고, 일직선으로 내려오던 짱짱한 햇빛을 보았으며, 아지랑이 피워 올리며 약동하던 아스팔트의 뜨거운 기운을 느꼈다. 여름의 열기가 지끈대는 머리와 함께 호흡하는 것만 같았다.열세 살 여름방학, 근이영양증을 진단받다급작스러운 서울행이었다. 어머니는 병원에 가야 한다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차로 대여섯 시간은 걸리는 거리였다. 초등학교 6학년 여름방학이 한창이었고, 친척 몇 분이 동
장애와 신앙의 교차로에서
강동석
375호 (2022년 0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