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들의 이상한 죄책감먹고, 죄책감 느끼기. 최근 살이 찐 이후 겪는 일상이다. 마른 편이던 내 몸에 살이 붙기 시작한 건, 경구피임약을 복용하면서부터였다. 다낭성난소증후군을 진단받고 먹기 시작한 이 약은 렌틸콩 크기밖에 안 되는 아주 작은 호르몬제다. 이후 생리를 아주 규칙적으로 하게 되었지만 여러 부작용이 (특히 복용 첫 달에) 찾아왔다. 그중 가장 당혹스러운 건, 생전 처음 경험하는 식욕. 배가 고프지 않은데 허기가 졌고,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받으면 뭔가를 입에 넣고 있었다. 채식을 지향한 후 입에 대지도 않던 과자와 빵을
독서일기
김다혜
364호 (2021년 03월호)
-
새해 첫 성이야기는 어느 중학교에서 이뤄졌다. 학교는 주로 학년별 단체교육을 공식적으로 의뢰한다. 이번엔 조금 달랐는데, 학교 상담실을 통해 살짝 조심스럽게 중2, 중3 남학생 각각 한 명씩과 그들의 양육자를 함께 교육 및 상담해달라고 했다. 사정인 즉 한 학생은 또래 친구에게 지속적인 음란문자를 보내다 신고를 당했고, 다른 학생은 같은 반 학생 몇몇의 얼굴을 성적인 사진에 합성하는 이른바 ‘지인능욕’ 의뢰를 했다가 사이버 교도소의 덫에 걸려 학교에 일파만파 소문이 퍼진 상태였다. 시끄럽고 정신없는 시간들이 어느 정도 지나간 후 학
독서일기
심에스더
363호 (2021년 02월호)
-
‘다시’ 읽는 일에 관한 글을 계속 쓰고 있다. 다시 나온 책을 읽는 독자의 경험에 대하며(3월호), 리뷰를 쓰는 일에 대하여(6·9월호) 등. 라임을 맞추듯 ‘다시’에 방점을 찍고 이야기를 이어가 본다. 이번에는 책방에 관한 이야기다. 책방과 ‘다시’는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책방에서 세상을 ‘다시’ 만나는 경험며칠 전 일이다. 한 손님이 입구에서 한참 쭈뼛쭈뼛하더니 손잡이를 힘껏 밀고 서점에 들어왔다. 갓난아이를 안고, 세탁소를 들렀는지 옷 짐이 잔뜩이다. 그동안 오며 가며 책방을 눈여겨 보았는데, 들어온 건 처음이라고 했다.
독서일기
박용희
361호 (2020년 12월호)
-
채식을 하는 인스타그램 유저라면, 한번쯤 ‘#비건’이라는 키워드를 검색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연관 검색어로는 ‘비건빵’ ‘비건맛집’ 등이 뜨는데, 대부분 건강한 음식보다는 사진을 찍음직한 ‘예쁜’ 디저트 빵과 파스타 류가 화면을 채운다. 부끄럽지만 한때 이런 인스타그램 피드에 자극 받아 비건 빵에 빠져 있었음을 고백한다. 1년 전 ‘돼지를 생각하다’(본지 2019년 12월호 커버스토리) 이후 채식을 시작했다. 지금도 이어가고 있지만 깨달은 게 있다. 채식이 곧 윤리적이고, 지속가능하며, 건강하게 먹는다는 뜻이 아닐 수 있다는 것.
독서일기
김다혜
360호 (2020년 11월호)
-
'윗니 여섯 개’의 미소 어렸을 때 “여자는 웃을 때 윗니가 여섯 개만 보여야 한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웃을 때마다 목젖이 보이도록 입을 크게 벌리고 하하하 웃어젖히는 딸에게 엄마가 타박하며 했던 말이다. 딸이 ‘여자답게’ 자라기를 바라는 엄마가 나에게 했던 말들 중에서도 가장 인상에 남은 말. 그런데 왜 두 개나 네 개도 아니고 하필 ‘여섯 개’여야 할까? 아니 이는 애초에 왜 보여야 할까? 타박을 받은 당시에는 짜증이 나서 들은 체도 안하고 더 크게 입을 벌리고 웃었더랬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혼자 있을 때 거울 앞에서
독서일기
심에스더
359호 (2020년 10월호)
-
모르고 고르면 생기는 일들얼마 전 SNS에 글을 쓰며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을 인용해서 넣었다.“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몇몇은 공감되는 문장이라고 댓글을 달았지만, 또 다른 댓글은 그 문장이 유명한 ‘오역’이라고 알려주었다. 다들 익숙하게 사용하지만, 사실 원문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잘못된’ 문장이었다.더 오래전, 군 복무 시절에 요양원으로 위문 공연을 간 적이 있었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는데, 공연의 피날레를 장식할 곡으로 ‘무시로’를 골랐다. 기타 전주가 흐르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앞자리에 앉은 어르
독서일기
박용희
358호 (2020년 09월호)
-
“긴 침묵의 시간, 홀로 많이 힘들고 아팠습니다. 더 좋은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꿉니다.”지난 7월 13일, 한 여성단체 사무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성추행 피해자가 쓴 글이 대독되었다. 서울시장의 자살과 성폭력 피해 고소 및 피해자에 대한 언급이 없는 유서 내용이 보도되자 시민들의 반응은 극과 극으로 나뉘었다. 한쪽에서는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다른 쪽에서는 애도와 추모를 정치적 입장에서 거부했다. 세상에는 흠결 없는 사람은 없고, 따라서 누군가를 평가
독서일기
김다혜 기자
357호 (2020년 08월호)
-
저는 구술 형식의 글이 좋으면서 싫어요. 말하는 이의 고유한 언어와 뉘앙스가 그 사람을 생생하고 선명하게 보여줘서 그래요. 나랑 가까이 있는 거 같은 존재감이랄지. 이 책 《나, 조선소 노동자》도 구술집이에요. 거제 삼성조선소 크레인 사고를 겪고 살아남은 9명의 노동자 이야기가 각각 실려 있어요. 처음 책 제목만 보고는 배 만드는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다루는 에세이인 줄 알았죠. 부끄럽지만 2017년 5월 1일에 이런 일이 있었는지 몰랐어요. 누군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는 게 더 정확한 말일 거예요.당시 뉴
독서일기
심에스더
356호 (2020년 07월호)
-
책을 판매하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그런 순간을 더 자주 경험하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책에 관한 이야기는 의외로 제한적이다. 출판사의 의뢰를 받은 한두 건의 전문가 리뷰와 소수의 애독자 리뷰를 제외하면, 그 이상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좀처럼 보기 힘들다. 꽤 책을 읽는다는 분들도 “제가 감히 어떻게 리뷰를 하나요”라며 발을 뺀다. ‘감히’라는 수식어가 독자들의 이야기를 막고 있는 것이다. (박용희)
독서일기
박용희
355호 (2020년 06월호)
-
이 이야기에서 ‘낯선’ 것은 무엇인가? ‘천사’라는 존재, 이를 숭배하고 ‘정화의식’을 벌이는 사이비 종교, 적도수렴대 부근에서 전염되는 페미사이드를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낯섦 속에 어딘가 ‘익숙한’ 것이 있다. 여성 성범죄를 교리로 정당화하는 일부 종교집단, 여성혐오를 옹호하는 문자적 성경 읽기, 만연한 성범죄와 끊임없는 여성 살해,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봉쇄조치가 내려진 국가에서 급증하는 가정 폭력이 그렇다. 또한 국내 바이러스 확진자보다 더 많은 수의 n번방 이용자들이 불법촬영물을 구경하고 그보다 더 많은 이들에게 공유했음에도 국가적 ‘재난’이 되지 않는 우리 사회 모습과도 겹친다. (김다혜)
독서일기
김다혜
354호 (2020년 05월호)
-
스테파니 팔루디의 삶에서 얼마 전 한 여대에서 벌어진 혐오와 배제 사건이 자연스레 연상되었다. 약자와 소수자가 함께 연대하고 서로를 살리는 ‘가치관’의 이름으로 벌어진 일이었다.페미니스트로서 저자가 6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실 중 하나는 성별 하나로 우리의 정체성을 설명할 수 없고, 타인의 정체성 역시, 보이는 단편적인 이미지로만 판단하고 결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삶은 그들이 처한 다양한 상황과 조건들에 의해 유기적이고 복잡하게 구성된다. (심에스더)
독서일기
심에스더
353호 (2020년 04월호)
-
내용에 관한 측면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에 관한 책이 넘치도록 많지만(온라인 서점에 검색어로 ‘예수’를 넣으니 7,373개의 결과물이 나온다.) 대부분 주석서, 설교집, 혹은 교리서다. 이 책은 그와 결이 조금 다른데, 저자가 서문에 밝힌 것처럼 ‘사람들이 (예수를) 어떠한 의미로 받아들였나’ 하는 부분에 초점을 맞춘다. 시대별로 예수의 ‘상’을 어떻게 그렸느냐에 따라 얼마나 큰 변화가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책에서 언급되는 저명한 인물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쁠 지경이다. 이런 화수분 같은 책이 절판되어 묻힐 뻔 했다니! (박용희)
독서일기
박용희
352호 (2020년 03월호)
-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들의 일상은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이 겪는 각종 불평등한 현실과도 연결된다. “세상에 성소수자이기만 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콜센터 직원인 마늘이 겪는 일상은, 감정 노동을 해야 하는 여성들이 겪는 일상이기도 하다. ‘꾸밈 노동’을 강요당하고, ‘어린 여자’라서 무시당하는 여성 성소수자의 현실은, 우리 주변에 널리고 널린 성차별적 상황과도 연결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 질이 낮고 불안정한 노동을 해야 하는 성소수자 청년의 얼굴은 모든 청년의 얼굴이기도 하다. 즉, 성소수자를 노동자로 소환하는 일은 별스러운 게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바로 우리, 우리 곁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누군가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음란하고 문란한 영’을 땅의 존재로 소환하여 우리 옆에 앉힌다. 우리 옆에서 매일 노동하고, 사랑하고, 살아가는 인간/시민 말이다. 그 시민들과 우리는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오수경)
독서일기
오수경
351호 (2020년 02월호)
-
수치심의 기억학창시절, 공부를 못했다. 안 했다고 말하는 걸 더 선호하지만 결과 중심으로 볼 때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선배들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성적에 의해 인간의 존재 가치가 결정되는 경험들을 종종 할 수 있었다. 나는 선생님들을 종종 혼란에 빠뜨리는 학생이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평소 나의 유머와 재치(…), 혹
독서일기
심에스더
349호 (2019년 12월호)
-
‘연대’에의 강요?서초동과 광화문에 모인 사람들이 몸을 잔뜩 부풀린 복어 같았다. 한 쪽이 백만 명을 주장하자 다른 한 쪽은 천만을 외치기 시작했다. 내가 조국이냐 아니냐를 논하며 만 단위의 사람들이 모였다 흩어지던 그 시간, 200여 명의 톨게이트 수납원들은 경상북도 어딘가에 있는 도로공사 로비에 앉아 몇 주간의 외로운 시간을 보내고
독서일기
여정훈
348호 (2019년 11월호)
-
이 책은 무심코 뱉었을 이산화탄소와 같은 차별적 생각과 말을 돌아보게 한다. 이주민에게 “한국인이 다 되었네요”라고 하는 것은 차별일까 아닐까. 장애인을 향해 “희망을 가지세요”라고 말하는 건 왜 차별일까? 딸만 둘인 여성에게 “이제 아들 하나 더 낳으면 되겠네”라거나 결혼 안 한 사람에게 “결혼해야 어른이 되는 거야”라고 말하는 건 어떨까?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하는 생각과 말이 누군가에게는 모욕일 수 있다.
독서일기
오수경
347호 (2019년 10월호)
-
강의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며 우리는 저자와 비슷한 의문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도대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설파하는 교회 공동체에서 왜 싱글(비혼)을 배려하지도 존중하지도 않는가?” 그리고 왜 변화하는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공부하지 않는가? 비혼이 단순한 트렌드가 아니라, 다양한 이유로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의 방식이라면 이제 기독교 공동체도 변화되어야 할 때다. (심에스더)
독서일기
심에스더
346호 (2019년 09월호)
-
우리 예배의 경쟁 상대는 누구인가?요즘 나는 하루에도 두세 번씩 유튜브로 유명 교회의 예배 영상을 본다. 사실 본다기보다는 틀어 놓고 업무 BGM(배경음악)으로 깔아 놓는다. 이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요즘 영어권에서 제일 사랑받는 노래를 만들어내는 베델교회도, 한때 최고였던 힐송도, 미국 성공회의 중심인 워싱턴 대성당도, 세계 어디를 가든 수만 명의 인파를 모으는 교황청도 자신들의 예배를 유튜브로 중계한다. 예배를 정교하게 기획하고, 잘 믹싱된 음향을 뽐내고, 다양한 앵글에 카메라를 배치해서 시청자가 현장에서보다 더 박진감을 느끼
독서일기
여정훈
345호 (2019년 08월호)
-
사무실이 종로로 이전한 후 걷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전 사무실이 있는 신촌으로 출근할 때는 평균 1,000보 정도면 사무실에 도착했는데 종로로 출근하게 되면서부터는 3배 정도는 더 걸어야 도착할 수 있다. 게다가 신촌에서는 사무실에서 점심을 먹었기 때문에 바쁜 날이면 하루에 3,000보가 채 안 되는 걸음 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한낮 날씨가 어땠는지 알지도 못한 상태로 하루를 마감하곤 했다.종로에서는 점심을 바깥에서 해결해야 해서 일단, 걸어야 한다. 맛집을 찾느라, 밥을 먹고 나면 소화를 시키기 위해, 때론 날씨가 너
독서일기
오수경
344호 (2019년 07월호)
-
처음 글 요청을 받았을 때 ‘1년쯤 쓰겠구나’ 예상했는데 어느새 1년 하고도 반 바퀴를 더 돌아왔다. 좋아하는 책을 열두 권쯤 소개하려 했던 계획도 바뀌어 여섯 권이나 더 소개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큰 도전이었다.
독서일기
여정훈
343호 (2019년 0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