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9호 심에스더의 독서일기]

뷰티풀 젠더         아이리스 고틀립 지음 / 노지양 옮김 / 까치 펴냄
뷰티풀 젠더         아이리스 고틀립 지음 / 노지양 옮김 / 까치 펴냄

'윗니 여섯 개의 미소
어렸을 때 여자는 웃을 때 윗니가 여섯 개만 보여야 한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웃을 때마다 목젖이 보이도록 입을 크게 벌리고 하하하 웃어젖히는 딸에게 엄마가 타박하며 했던 말이다. 딸이 여자답게자라기를 바라는 엄마가 나에게 했던 말들 중에서도 가장 인상에 남은 말.

그런데 왜 두 개나 네 개도 아니고 하필 여섯 개여야 할까? 아니 이는 애초에 왜 보여야 할까? 타박을 받은 당시에는 짜증이 나서 들은 체도 안하고 더 크게 입을 벌리고 웃었더랬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혼자 있을 때 거울 앞에서 연습을 해보았다. , 해보니 역시 두 개는 토끼 같고 네 개는 어정쩡하다. 아예 입을 다물고 웃어보니 겉으로는 친절하지만 속은 알 수 없는 소설 속 인물 같았다.

인정하긴 싫지만 여섯 개가 적절했다. 상냥하고 차분해 보이는, 엄마가 선호하는 여자다운얼굴이었다. 이래서 어른들 말을 들어야 하는아니 아니! 그게 아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엄마의 그 윗니 여섯 개의 미소는 어디선가 본 승무원 언니들의 인터뷰 내용 중에 있었다고 한다. 승무원은 그 당시 직업적으로도 외모적으로도 많은 여성이 동경하는 대상이었다. 엄마는 딸이 그런 여성이 되길 바랐던 듯하다. 하지만 나는 그때도 지금도 하하하 웃는다. 이 말고 목젖이 보이게!

 

찰떡 같은 젠더 입문서, 뷰티풀 젠더
나다운 게 뭔데!” 지금은 보기 힘들지만 예전에는 고뇌에 찬 드라마 주인공들이 한번쯤 꼭 하던 대사다. 늘 밝고 야무지거나, 역경 속에서도 꿋꿋했던 주인공이 남들 보기에 갑자기 삐딱선을 타면 친구가 안타깝다는 듯이 말한다. “너답지 않게 왜 그래?” 바로 그때, 주인공이 저 대사를 외치는 거다. 화를 내면서.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주인공은 왜 화가 났을까? 사람들이 말하는 나다움이 아주 지긋지긋한 거다. 다는 아니겠지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보다 남들이 원하는 모습대로 살아온 자신과, 정해진 틀대로 살기를 요구하는 타인과 사회에 화가 나는 거다. 좀 과장해서 해석하자면 나다운 게 뭔데!”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물어보지도 않고 왜 너희 맘대로 결정하고 그렇게 살라고 강요하는데!”의 의미 아닐까? 물론 드라마에서는 주인공이 이내 좋은 사람으로 돌아오는데 그게 안심이 되는 동시에 불편했다. ‘그래, 그냥 안전하게 가자라는 마음과 남이 실망할까 봐 나다움을 충분히 고민하지도 못하는 거 아냐?’ 하는 양가감정이 들었다.

어쨌든 업혀가자면, 나 역시 윗니 여섯 개의 미소 대신 목젖이 보이도록 웃는 걸 선택한 건 단순한 반항을 넘어선 정체성의 싸움이었다. 내가 되고 싶은 나를 지키기 위해 엄마뿐 아니라 통념적 여자다움을 요구하는 사회를 향해 화난 목소리로 외친 거다. “여자다운 게 뭔데!”

강요되는 정체성에 저항하며 나다움을 찾는 외침은 여전히 유효하다. 특히 성별에 따라 정확한 역할과 태도가 요구되는 젠더 정체성 문제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여전히 이분법적으로 성별을 나누고 그 틀을 바탕으로 정상과 비정상을 판단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복잡한 정체성과 그 정체성에 영향을 미치는 역시나 복잡한 젠더를 자꾸 단순하게 만들어버리려 한다. 이런 사회에서 나답게살아가기 위해서는 약간의 반항기와 도움이 필요하다. 아이리스 고틀립의 뷰티풀 젠더는 그 모두에 딱 부합하는 책이다. 이 책은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아마추어 과학자인 저자가 자신의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읽기 쉽게 만든 젠더 입문서이다. 고틀립은 한 사람의 정체성에는 젠더와 계급 등의 요소들이 씨실과 날실처럼 얽혀 있다고 말하는데, 이런 복잡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젠더와 정체성 문제는 접근하기가 꽤 어렵다. 이에 저자는 인간이 정체성과 젠더의 복잡성을 자꾸 단순화하는 이유를 인간은 참으로 분류를 사랑하는 종족이다. 우리는 항상 종류를 나눈다. 그러면 질서가 있다는 느낌이 들고 생각이 단순해지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한다. 찰떡 같다.

 

우리 모두 변신의 귀재
기본적으로 이 책은 모든 젠더 역할은 사회적 산물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일례로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인 규정에서 벗어나 이탈리아의 일 페미니엘로’, 태국의 카토이등의 제3, 4의 성을 소개한다. 또한 젠더와 정체성 이야기가 낯선 독자들을 위해 동성애, 드래그 퀸/, 무성애, 부치, 성별 불쾌감, 시스젠더, LGBTQ+ 등의 알쏭달쏭한 용어들을 한 그림과 함께 알기 쉽게 정리했다. 저자는 미투운동, 임금격차와 낙태 문제 등의 성차별 문제와 흑인 남성의 높은 투옥률 등의 인종차별 문제도 다룬다. 이를 통해 한 사람 안에 공존하는 다양한 정체성(인종, 계급, 젠더, 성적 지향, 정신 건강)이 더 큰 사회 구조 안에서 젠더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보여준다. 또한 나와 타인의 경험에 대해서 연민과 이해심을 가지며, 교차성의 속성을 숙고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우리에게 낯설고 생소한 것들은 나쁘거나 고쳐야 하거나 징그럽게 여겨진다. 남성/여성/이성애 등의 이분법적 구분에서 벗어난 젠더와 정체성 문제가 지금 그렇다. 작게는 웃는 모습에서부터 크게는 존재 전체에 이르기까지 규정한다. 젠더가 정체성의 전부는 아니지만 직접적이고 깊은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모두 나다움을 누리기 위해서는 정체성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인정하고 공부도 해야 한다. 익숙한 자리에만 머무르기보다 낯선 자리로 나아가 생소한 것들을 편견 없이 바라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처음엔 어려워도 노력의 시간이 쌓일수록 낯설어서 징그러웠던 것들이 뷰티풀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니 남들 때문에 매번 포기하지 말고 남들이 포기하게 만들지도 말자.

고틀립은 말한다. “항상 유연한 태도와 열린 마음으로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의 내적, 외적 변화를 허락하자. 모든 단계에서의 모든 변화가 유효하다. 우리 모두가 변신의 귀재들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오랜만에 외쳐본다! “도대체 나/여자/남자/이성애/어른/부모다운 게 뭔데?”

 

 

심에스더
성을 사랑하고 성 이야기를 즐겨하는 성과 성평등강사이자 의외로 책 팟캐스트 복팟진행자. SNS 중독자. 최근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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