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드라마’(사극)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이미지가 있다. 어린 시절에 본 〈조선왕조 500년〉(1983-1990)처럼 왕실 서사이거나, 장보고나 이순신 등이 나라를 구하는 영웅 서사이거나, 태조 왕건 혹은 정도전이 주인공인 건국 서사. 주로 남성-승자 중심 서사였다. ‘사극’은 이름 그대로 역사에 기반해 시대적 한계를 드러내는 정형화된 장르이기에 이러한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현대사회를 재현한 드라마 못지않게 사극은 시대적 한계를 뚫고 미래의 거울로 존재하며 사회 변화를 가늠하기에 유의미한 텍스트이기도 하다. 당대
편애하는 리뷰
오수경
375호 (2022년 02월호)
-
코로나 백신이 개발되었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이 지겨운 ‘마스크’에서 벗어날 날이 오긴 오는구나 싶어 설렜다. 오랜 기다림 끝에 백신을 맞게 되었을 때 ‘코로나 지나면’이라는 마음속 상자에 넣어두었던 ‘일상’과 ‘미래’를 조심스레 열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바이러스가 변이되었다는 소식이 들릴 때마다 간신히 열어본 상자는 다시 봉인되기를 반복했다. 희망은 곧 두려운 질문으로 바뀌었다. 코로나는 과연 끝이 날까? 더 강력한 바이러스가 들이닥치면 어쩌지?‘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우리는tvN 드라마 〈해피니스〉는 이 두려운 질문이 현실이 된
편애하는 리뷰
오수경
374호 (2022년 01월호)
-
어린 시절 나에게 동네 골목과 학교 운동장은 날마다 새로운 놀이가 펼쳐지는 흥미로운 세계였다. 골목에 굴러다니는 빨간 벽돌과 담장 아래 수줍게 핀 이름 모를 풀들도 우리에게는 놀잇감이었고, 어제 싸운 친구일지라도 오늘은 같은 편이 되어 골목과 운동장을 누빌 수 있었다. 물론 모든 놀이가 재밌지는 않았다. 나는 특히 ‘얼음땡’처럼 쫓고 쫓기는 놀이나 과하게 경쟁하는 놀이에는 약했다. 그중 최악은 오징어 게임이었다. 오징어 게임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놀이 중 가장 복잡하고 거칠어 나에게는 버거웠다. 나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에게도 그랬다
편애하는 리뷰
오수경
372호 (2021년 11월호)
-
꽤 오래전 일이다. 남성 A와 군대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자신이 겪은 부당한 일을 풀어놓으며 군대가 얼마나 불합리하고 폭력적인 곳인지 설명했다. 비록 군 복무 경험은 없었지만, 그의 경험과 주장에 공감하며 이야기를 들었다. 한참 이어지던 대화가 ‘어떻게 해야 군대가 바뀔까’에 관한 주제로 옮겨가려던 순간, 그는 선을 그었다. 군대도 안 다녀온 네가 무얼 알겠냐며 군대는 그렇게 쉽게 변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했다. 그가 원했던 것은 불합리하고 폭력적인 군대 문화 개선에 관한 진지한 대화가 아닌 자신의 (억울한) 경험에 관한 공감과
편애하는 리뷰
오수경
371호 (2021년 10월호)
-
고백하자면, 월드컵이나 올림픽 같은 국제 대회를 챙겨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 기간 동안 즐겨 보던 드라마나 예능이 줄줄이 ‘결방’되는 일에 소심하게 분노하는 편에 속한다. 축구팬과 야구팬들이 주변에 많지만 그들의 희로애락에 부화뇌동하지도 않는다. 한때는 농구 직관을 즐긴 적도 있었으나 그것과 무관하게 된 지 오래다. 그런 내가 올림픽 경기를 챙겨 보다니! 그것도 울면서 보다니! 나라 전체가 들끓었던 ‘2002년 월드컵’ 때도 경기를 보며 “대한~민국!”을 외치는 대신 조용히 드라마를 봤던 내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판’을 바꾸는
편애하는 리뷰
오수경
370호 (2021년 09월호)
-
병원에서 겪은 안 좋은 기억을 말하라면, 침을 튀겨가며 격정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특히 모 대학병원 실험실 같은 진료실에서 인턴·레지던트들이 우르르 몰려와 내 몸을 관찰하며 실험 대상 다루듯 여기저기 찔러보던 일은 오랫동안 병원 가기를 두려워하게 만들 정도로 강렬한 경험이었다. 대형 병원 시스템은 또 어떤가. 예약하고 가도 오래 기다리는 건 보통이고, 긴 기다림 끝에 의사를 만나도 진료 시간이 5분을 넘기는 경우가 드물었다.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의사 앞에서 잔뜩 준비해간 내 몸에 관한 질문을 삼켜야 했다. 나에게 병원은 tvN
편애하는 리뷰
오수경
369호 (2021년 08월호)
-
‘상류사회’ 이야기는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여 사랑받는 드라마 소재다. 압축적으로 성장한 신자유주의 사회답게 한국 드라마에서는 상류사회가 ‘재벌가’로 표상되곤 한다. 재벌가를 중심으로 한 드라마는 언제나 흥미롭다. ‘막장 드라마’와 같이 주로 치정에 의한 갈등, 출생의 비밀, 음모와 배신 등 자극적 설정으로 점철되기에 관음증적 재미를 유발한다. 동시에 인간과 사회의 단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모형으로 기능하기도 한다.tvN 드라마 〈마인〉은 ‘효원가(家)’의 대저택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입구에서부터 건물까지 차를 타고 가야 할 정도로
편애하는 리뷰
오수경
368호 (2021년 07월호)
-
“‘법원권근(法遠拳近)’. 법은 멀고 권력은 가까운 현실에서 위기에 빠진 힘없는 약자에게 법이 해결해줄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는 건,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SBS 드라마 〈모범택시〉 속 강하나 검사의 말이다. 법을 집행하는 입장에서는 위험한 말이지만, 법과 정의보다 권력과 주먹이 훨씬 가까운 상황을 한 번이라도 겪어봤을 이들에게는 공감되는 말일 것이다. 이런 상황을 겪는다면 어떤 이는 법적 테두리 안에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신뢰를 상실한 누군가는 ‘나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것이다. 〈모범택시〉는 후자의
편애하는 리뷰
오수경
367호 (2021년 06월호)
-
누군가 내게 ‘길티 플레져’(guilty pleasure)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 ‘막장 드라마 보기’라고 대답하곤 한다. 최근 시즌2가 막을 내린 SBS 〈펜트하우스〉는 ‘길티’의 궁극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매회 상식의 한계를 넘어섰다. ‘얼굴에 점 하나 찍고 부활’하는 수준을 넘어, 필요 이상으로 자극적이어서 막장 드라마에 단련되어 항'막'력 높은 나조차도 눈을 질끈 감을 때가 많았다. 〈펜트하우스〉뿐 아니라 최근 몇 년 사이 소위 ‘막장’으로 분류될 만한 드라마가 부쩍 늘었다. 이런 막장 드라마는 왜 죽지도 않고 되살아나는 것일
편애하는 리뷰
오수경
366호 (2021년 05월호)
-
“저희 영화 〈윤희에게〉는 퀴어 영화입니다. 보시다시피 지금은 LGBTQ 콘텐츠가 자연스러운 2021년입니다. 그게 정말 기쁘고요. 앞으로 더 고민해서 좋은 영화 찍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월 9일 제41회 청룡영화상 각본상과 감독상을 받은 〈윤희에게〉 임대형 감독의 수상 소감 중 일부다. 대한민국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영화제에서 ‘퀴어 영화’인 〈윤희에게〉가 상을 받은 건 정말 “LGBTQ 콘텐츠가 자연스러운 2021년”이 되었기 때문일까? 그의 말은 며칠 후 반박당하고 만다.2월 13일 SBS에서는 그룹 ‘Queen’의
편애하는 리뷰
오수경
365호 (2021년 04월호)
-
₩
명절이 지나면 친구들과 모여 서로를 위로하곤 한다. ‘고통 올림픽’이라도 하듯 서로가 겪은 일과 느낀 바를 토로하기 바빠 늘 시간이 부족했다. “명절에 행복한 사람은 도대체 누구야?”라는 친구의 한탄이나 “우리의 결혼 생활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힘겹다”는 〈며느라기〉 속 민사린의 독백처럼, 기혼이든 비혼이든 명절은 저마다의 이유로 힘겨웠다. 어디 ‘명절’뿐일까? 태어나는 순간부터 ‘개인’으로 살 수 없는 한국 사회에서 누군가의 자식들은 필연적으로 가부장 사회가 부여한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야 했다.특히 여성은 결혼하게 되면 ‘며느
편애하는 리뷰
오수경
364호 (2021년 03월호)
-
2020년 창궐한 코로나19 바이러스는 그동안 병증처럼 가지고 있던 문제들이 심화한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인간을 기계처럼 부리는 자본과 권력, 혐오와 배제를 바이러스처럼 전파하는 종교, ‘영끌’하여 각자도생하기를 권면하는 사회는 ‘코로나 시대’ 이전에도 우리를 지속해서 황폐하게 만들어왔다. 인간의 얼굴을 가졌지만, 사실 ‘좀비’와 다를 바 없고, ‘악귀’가 빙의했다고 믿고 싶은 사람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마주하는 순간이 잦아졌다.그래서일까? 최근 몇 년 동안 넷플릭스 〈킹덤〉을 비롯하여 〈스위트홈〉에 이르기까지 괴물화
편애하는 리뷰
오수경
363호 (2021년 02월호)
-
S는 제왕절개 수술로 아들을 낳았다. 출산 진통을 겪고 싶지 않아 남편과 상의하여 선택한 방법이었다. 그런 그에게 병원에서는 ‘남편 부모’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남편도 아닌, 남편 부모의 동의라니. S는 그 이야기를 친정엄마와 함께 들어야 했다. 자신이 한 결정을 무시당한 것도 황당한데 자신을 낳은 엄마조차 투명 인간으로 만든 ‘시부모’는 과연 그의 몸에 관해 무슨 권리가 있기에 병원은 남편도 아닌, 남편 부모의 동의를 요구했던 걸까? C는 출산 후 틈만 나면 나에게 출산과 모유 수유가 자신의 몸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증
편애하는 리뷰
오수경
361호 (2020년 12월호)
-
자신에게 관심이 없고 밥도 차려주지 않는다며, 자고 있던 아내를 나무 빗자루로 때려 숨지게 한 90대 남성이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다. 재판부는 남성이 고령에 치매를 앓는 상황에서 우발적으로 범행했고, 진지하게 뉘우치고 있으며, 자녀들이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여 집행유예를 선고했다고 한다. 이 기사를 읽으며 분노를 넘어 슬픔이 몰려왔다. 88세에 세상을 떠난 피해자는 살면서 몇 번의 밥을 짓고, 상을 차려야 했을까?누군가는 이 사건을 두고 ‘참 별일도 다 있다’고 여길 수도 있겠으나, 사실 밥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죽는
편애하는 리뷰
오수경
360호 (2020년 11월호)
-
“독일 아이들에게 총리는 당연히 여성이에요.” 어느 게시물에 달린 댓글이 반짝였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메르켈이 2005년부터 현재까지 독일 총리로 재직 중이니 그즈음 태어난 아이들은 벌써 청소년이 되었고, 그 이후 태어난 아이들이 경험한 총리는 여성 총리, 메르켈뿐이니 ‘총리=여성’이라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메르켈 총리뿐 아니라 시대의 변화에 맞게 ‘밀레니얼’ 세대 여성 정치인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지난해 핀란드에서는 34세 여성 산나 마린이 총리가 되었다. 최근 자신에게 성차별적 발언을 한 미국 공화당 하원 의원을 품격
편애하는 리뷰
오수경
359호 (2020년 10월호)
-
1893년, 우리나라 최초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의 3대 학장으로 부임한 조세핀 페인(J. O. Paine)은 의료 시설이 부족하여 영아 사망률이 높은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건강한 신체를 단련할 ‘체조’ 수업을 도입했다. 이 평범한 수업으로 조용한 조선 사회가 발칵 뒤집힌다. 양반댁 규수가 팔을 위로 쭉 뻗고, 다리를 활짝 벌리는 건 유교적 사고가 지배하는 당시 사회에서는 망측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딸이 가문에 먹칠하고, 혼인을 못 할까 두려워한 부모들은 학교에 거세게 항의하거나 딸의 등교를 막았다. 한성부는 이화학당에 체조 과목을
편애하는 리뷰
오수경
358호 (2020년 09월호)
-
₩
가족은 나에 관해 모르는 게 많다. 나도 가족을 잘 모른다. 사실 ‘가족’ 사이에 뭘 더 알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서로 잘 안다고 착각하면서 무심하게 방치하거나 무례하게 침범하는 게 ‘가족’이니까. 누군가는 가족의 사랑을 표현할 때 ‘찐한’이라고 표현하지만, 나에게 가족은 ‘찐득찐득한’ 상태에 가깝다. 사랑하지만, 사랑 외의 복잡한 감정이 들러붙은 상태랄까. 그래서일까. tvN 에서 둘째 딸 은희의 독백이 반가웠다. “가족인데, 우리는 가족인데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이렇게 가족에 관해
편애하는 리뷰
오수경
357호 (2020년 08월호)
-
₩
성교육을 제대로 받은 기억이 없다. 조그만 식당을 운영하던 부모는 성에 관해 솟구치는 내 질문을 감당하기엔 너무 바빴고, 보수적이었다. 가정 바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학교에서 받은 성교육이라곤 낙태 당하지 않으려 몸부림치는 태아(로 추정되는)의 동영상이 전부였을 정도로 부실했다. 또래들끼리 은밀하게 교환하는 성 지식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었다. 미용실 구석에 앉아 보았던 여성 잡지 뒷부분에 나오는 섹스 칼럼이나 한껏 미화된 할리퀸 소설 속 묘사처럼 ‘책으로 배운’ 내용이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성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그렇게 성에
편애하는 리뷰
오수경
356호 (2020년 07월호)
-
₩
〈부부의 세계〉는 마치 ‘가부장제가 전쟁터 같지? 바깥은 지옥이야’라는 점을 주입하려는 듯 드라마 속 여성들을 그 세계 안에 머물도록 주문을 건다. 민현서(심은우)가 애인에게 지속적인 데이트 폭력을 당하면서도 관계를 유지하는 이유를 ‘사랑’이라 믿게 만들고, 지속적인 남편의 외도에 지쳐 마침내 이혼을 선언하고 탈출하려는 고애림(박선영)에게 남편에게 한 번 더 속을 이유를 만들고, 최 회장의 아내처럼 남편의 외도를 눈감는 대신 재력과 권력을 누릴 수 있게 만든다. 그리고 지선우에게는 ‘모성’이라는 주문을 건다. 실제로 가족 관계를 깨트리고 아들 이준영(전진서)을 방황하게 만든 주범은 아버지인 이태오인데도 지선우의 모성에 모든 책임을 전가한다. 남성들은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 류의 근자감을 보이며 뻔뻔하게 자기 삶을 영위하는 사이, 여성들은 ‘가족’이라는 세계에서 벗어나면 끝이라는 메시지를 교환하며 서로 적대적 관계를 형성한다는 면에서 지극히 현실적이지만, 한편으로는 퇴행적 ‘가스라이팅’ 드라마다. (오수경)
편애하는 리뷰
오수경
355호 (2020년 06월호)
-
₩
텔레그램에 있는 n개의 방 중 가장 악랄하다고 소문난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이 검거되어 얼굴을 공개한 채 포토라인에 섰을 때 세상은 그의 입에 주목했다. 그는 한껏 자신을 부풀리며 말했다. “멈출 수 없었던 악마의 삶을 멈춰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피해자를 향한 사과 따윈 없었다. 잘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영화 속 주인공이 수상 소감을 밝히는 자리인 줄 알았을 것이다. 미디어는 빠르게 그에게 ‘서사’를 부여했다. 우리가 왜 범죄자의 성격과 학점과 교우관계를 알아야 하는가. 그런 서사가 범죄의 심각성을 드러내는 데 무슨 도움이 되는가. (오수경)
편애하는 리뷰
오수경
354호 (2020년 0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