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8호 편애하는 리뷰]

1893년, 우리나라 최초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의 3대 학장으로 부임한 조세핀 페인(J. O. Paine)은 의료 시설이 부족하여 영아 사망률이 높은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건강한 신체를 단련할 ‘체조’ 수업을 도입했다. 이 평범한 수업으로 조용한 조선 사회가 발칵 뒤집힌다. 양반댁 규수가 팔을 위로 쭉 뻗고, 다리를 활짝 벌리는 건 유교적 사고가 지배하는 당시 사회에서는 망측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딸이 가문에 먹칠하고, 혼인을 못 할까 두려워한 부모들은 학교에 거세게 항의하거나 딸의 등교를 막았다. 한성부는 이화학당에 체조 과목을 없애라는 공문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체조 수업은 지속되었고, 페인의 판단대로 학생들은 점점 건강해졌다.

권김현영의 책 《다시는 그 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휴머니스트)에는 달리기를 좋아하던 소녀(저자)가 “가슴이 흔들린다고” 놀림받았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그전까지는 있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한 내 가슴이 세차게 흔들리는” 걸 감각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저자의 경험은 많은 여성의 경험이기도 하다. 여성이 체육활동을 하는 건, 이화학당의 학생들에게도, 21세기를 사는 여성들에게도 중력을 거스르는 저항이 필요한 일이다. 저자의 지적처럼 “여성의 몸은 아직도 전쟁터”다.

대중문화는 그 전쟁터 한복판이다. 여성 연예인의 몸은 수시로 ‘전시’되고, 뚱뚱하고 못생긴 여성은 쉽게 개그 소재가 된다. 못생기고 뚱뚱한 여성은 자기 관리에 실패한 문제적 인간으로 분류된다. 여성에게 운동이란 그저 ‘몸매’를 위한 것일 뿐이다. 그런 대중문화에 새로운 여성들이 등장하고 있다.

웹예능 〈오늘부터 운동뚱〉 화면 갈무리
웹예능 〈오늘부터 운동뚱〉 화면 갈무리

‘운동 천재’ 김민경의 발견
MBC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하여 20kg이 넘는 물건을 망설임 없이 들고, 남성의 영역으로 취급되던 일도 척척 해내며 부지런히 몸을 쓰는 배구 김연경 선수와 골프 박세리 선수가 대표적이다. 그들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여성상을 보여준다. 그동안 운동하는 ‘오빠’들은 TV에서 많이 볼 수 있었지만 운동하는 ‘언니’들이 등장해 건강한 육체와 재력을 담백하고 솔직하게 뽐내는 걸 본 적이 있던가!

유튜브 콘텐츠 〈시켜서 한다! 오늘부터 운동뚱〉(이하 ‘운동뚱’)의 김민경은 아예 ‘운동’을 한다. <운동뚱>은 코미디TV <맛있는 녀석들>의 출연자 4명 중 책상 위에 놓인 아령을 들지 못한 한 명이 운동하는 콘셉트인데 김민경은 아예 아령이 고정된 책상을 들어버리는 괴력을 발휘하며 당첨된다.

숨쉬기 운동 외의 운동을 처음 해봤다는 김민경은 헬스 트레이닝 첫날부터 모든 과제를 척척 해내 ‘근수저’ ‘로보캅’ 등의 별명을 얻으며 ‘운동 천재’로 거듭난다. 뜻밖의 인기에 운동 종목은 헬스에서 종합격투기와 필라테스로 이어졌고, 김민경은 마치 오래 준비한 것처럼 그 운동들마저 ‘또’ 잘해버리고 만다. 〈운동뚱〉은 그동안 ‘뚱뚱하고 웃긴’ 코미디언으로만 여겨지던 김민경을 뛰어난 힘, 타고난 신체적 조건, 운동을 이해하는 지성에 성실성까지 갖춘 인재로 재발견하게 했다.

‘몸매’ 아닌 ‘몸’을 위해 운동하는 여성들
김민경의 재발견은 여성의 몸에 관한 재발견이기도 하다. 김민경이 운동하는 이유는 ‘체중 감량’이나 ‘날씬한 몸’을 위해서가 아니다. 더 잘 먹기 위해서다. 그래서 김민경은 매회 열심히 운동하고, 좋아하는 고기를 탐스럽게 먹는다. 그동안 여성의 운동을 ‘몸매 관리’ 영역에 가둔 시선을 전복한 것이다.

김민경이 주로 날씬한 여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레깅스를 입고, 어려운 필라테스 동작을 유연하고 정확하게 구현할 때 여성들은 환호한다. 김민경을 보고 운동할 용기를 내기 시작했고, 날씬해지기보다는 건강해지기 위해 운동하게 되었다는 여성들의 간증이 쏟아지고 있다. 예쁜 얼굴과 날씬한 몸매를 가진 수동적 여성상을 미덕으로 여기던 문화에서 김민경은 ‘몸매’와 상관없이 운동하는 여성의 몸은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여성을 ‘운동하는’ 존재로 인식했을 때 우리는 얼마나 입체적인 여성들을 발견할 수 있을까!

E채널 예능 〈노는 언니 〉 화면 갈무리
E채널 예능 〈노는 언니 〉 화면 갈무리

이런 변화는 더 많은 ‘운동하는’ 여성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E채널 〈노는 언니〉는 박세리를 비롯하여 펜싱 남현희, 배구 이재영·이다영, 피겨스케이팅 곽민정, 수영 정유인 등 여성 운동 선수들이 목적 없이 여행을 떠나는 예능이다. 〈노는 언니〉 속 여성 운동 선수들이 함께 ‘모닝 갈비’를 뜯고, 마트를 털며 무거운 물건을 척척 들고, 목젖이 보이도록 신나게 웃고, 몸매가 아닌 근육을 자랑하고 부러워하는 걸 보고 있으면 쾌감이 몰려온다. 특히 정유인이 보여준 ‘날개’ 근육은 탄탄하고 단단한 아름다움을 느낌과 동시에 여성의 ‘몸’을 다르게 사유할 기회를 준다.

물론 대중문화에서 운동하는 여성들이 대세라고 보기는 ‘아직’ 어렵다. 그러나 흐름은 변화하고 있다. 《운동하는 여자》(호밀밭)를 쓴 양민경의 지적처럼 ‘애플힙’ ‘황금 골반’ ‘꿀벅지’ 등 여성의 몸을 부위별로 전시하고 소비하는 문화가 더 집요해진 사회에서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운동이 아닌, 자신만의 호흡을 가지고, 건강한 신체와 단단한 일상을 위해 근력을 다지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더 많아지길 기대한다.

 

 

오수경
낮에는 청어람ARMC에서 일하고 퇴근 후에는 드라마를 보거나 글을 쓴다.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에 관심이 많고 이웃들의 희로애락에 참견하고 싶은 오지라퍼다. 함께 쓴 책으로 《을들의 당나귀 귀》 《불편할 준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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