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9호 오수경의 편애하는 리뷰]

독일 아이들에게 총리는 당연히 여성이에요.”
어느 게시물에 달린 댓글이 반짝였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메르켈이 2005년부터 현재까지 독일 총리로 재직 중이니 그즈음 태어난 아이들은 벌써 청소년이 되었고, 그 이후 태어난 아이들이 경험한 총리는 여성 총리, 메르켈뿐이니 총리=여성이라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메르켈 총리뿐 아니라 시대의 변화에 맞게 밀레니얼세대 여성 정치인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지난해 핀란드에서는 34세 여성 산나 마린이 총리가 되었다. 최근 자신에게 성차별적 발언을 한 미국 공화당 하원 의원을 품격 있게 비판한 연설로 주목을 받은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AOC) 의원도 주목해야 할 여성 정치인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해외에서는 가능하지만, 국내에서는 어려운
해외 사례만 언급해서 미안하니 우리나라 이야기도 해볼까? 우리나라에도 (당연히) 여성 정치인이 있다. 그러나 가업으로서의 정치를 한 박근혜 씨의 사례를 보듯,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성 정치인의 정치적 역량이나 지향에 섣불리 기대를 걸 수는 없다. 오히려 명예 남성에 가깝거나 세대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여성 정치인이 많다. 이게 어디 그들만의 문제일까. ‘남초집단인 정치 영역에서 여성이 제 역량을 발휘하며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산나 마린 총리의 탄생은 핀란드가 1907년부터 10% 여성할당제를 실시하는 등 성평등적 가치를 중요한 정치 의제로 삼고, 제도를 구축했기에 가능했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제도는 고사하고 여성 정치인을 상상하며 받아들이는 것조차도 익숙하지 않다.

지난여름, 난데없이 여성 국회의원의 원피스가 사회적 논란이 되었다. 그의 복장을 지적한 것도 모자라 어떤 이들은 성희롱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의 원피스에 주목하는 만큼, 그가 국회의원으로서 어떤 입법 활동을 하는지, 산업자원중소통상벤처위원회(산자위) 소속 의원으로서 무엇을 하는지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에게 정의당 류호정 의원은 국회의원이기보다는, 실력과 무관하게 특혜를 입고 운 좋게 국회위원이 된 미성숙한여성·청년에 불과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김은희 연구원은 이를 공간 침입자개념으로 설명한다. ‘남초인 정치 공간에서 여성은 비가시화되어 왔고, 존재하더라도 규범에서 벗어난 이탈자로 소비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여성 정치인은 역량을 보이기도 전에 외모나 복장을 평가당하고, 태도를 지적받는 자리로 내몰린다.

이런 현실은 대중문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중요 정치 현안을 다루는 공간에는 어김없이 중년·남성이 마이크를 잡는다. 신년 토론회에서도, 코로나19 상황에 관한 긴급 토론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어쩌다 여성이 초대되기도 하지만 공간 침입자이상의 역할을 부여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재현은 여성 정치인혹은 여성 전문가·지식인을 상상하기 힘든 사회·문화적 조건을 만든다. 독일 어린이들의 인식과는 정반대 경우인 것이다.

 

마원구 구의원 구세라가 이룬 성취
“90일 출근에 연봉이 5천만 원이라는 말에 혹해 취업 대신 출마를 선언하며 마원구 구의원 보궐 선거에 도전했다가 덜컥 당선된 KBS 2TV 드라마 출사표속 구세라도 비슷한 처지다. 구세라는 정치인이 되기 전부터 지역 정치 현안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활발하게 의견을 제시해 온 민원 왕이었지만, 정작 제도 정치 세계에 입성하고서는 공간 침입자의 처지가 된다. ‘마원구 29년 산이라는 경력(?) 외에는 학력도, 집안도, 정당 기반도 변변치 않은 그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는 자신을 장기판의 정도로 취급하며 쥐락펴락하는 권력과, 끝까지 자신을 구 양이라고 부르며 인정하지 않는 무례한 정치인들과, 너무 빨리 기성 정치 영역에 포섭되어 자신을 견제하는 또래 엘리트 정치인들에 의해 왕따를 당하거나 실직위기에 놓이기도 한다.

드라마 〈출사표〉 스틸컷. (이미지: KBS2TV 홈페이지)
드라마 〈출사표〉 스틸컷. (이미지: KBS2TV 홈페이지)

출사표는 그런 낡은 정치의 기세에 눌리지 않고 구의원으로서 성과를 내는 구세라에게 초점을 맞추면서도 그간 주목하지 않았던 생활 정치현장인 구의회 활동을 보여주며 좋은 정치란 무엇인가?’에 관해 생각할 단서를 제공한다. 구세라는 대의 정치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은 영민함과 진취적 성실함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정치 공간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뿐 아니라 다양한 여성 정치인의 존재를 가시화하는 데 기여한다.

예를 들어, 온갖 비리를 저지른 채 불명예 퇴진한 여성 구청장의 한계도 보여주지만, 훌륭한 안목과 지향을 가진 차기 여성 구청장이라는 대안도 제시한다. 엘리트 여성 정치인으로서 구세라의 라이벌이었던 구의원 윤희수는 자신의 정치적 욕망에 충실하지만, 배우며 진화하는 여성 정치인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구세라라는 여성 정치인의 등장은 구세라의 친구이자 워킹맘인 권우영의 구의회 입성으로 이어진다. 권우영은 유모차를 끌고, 아기띠를 매고 의정 활동을 펼친다. 우리에게는 여성정치인도 중요하지만, 그 여성 정치인이 어떤사회적 가치를 만드는지에 관해 고민하며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걸 구세라 의원이 알려준 것이다.

이들은 더는 공간 침입자가 아니다. 정치라는 공간을 확장하는 사람들이다. “저 이모 방금 수상하게 눈을 반짝였어.” 구의회 출마를 결심하는 권우영을 본 동네 꼬마의 말처럼 수상하게 눈을 반짝이는 여성 정치인이 더 많아지길!

 

 

오수경
낮에는 청어람ARMC에서 일하고 퇴근 후에는 드라마를 보거나 글을 쓴다.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에 관심이 많고 이웃들의 희로애락에 참견하고 싶은 오지라퍼다. 함께 쓴 책으로 을들의 당나귀 귀》 《불편할 준비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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