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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와 한국교회, 그 불편한 닮은꼴

기사승인 [295호] 2015.05.26  16: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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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5호 커버스토리]

“사람을 죽이는 것이 어떻게 애국이에요?” 
“이거, 완전히 빨갱이 사상에 물들었구먼!” 


요즘 청년들 표현으로 진정한 ‘기승전병(병맛)’ 구조를 가진 독립영화 <이상한 나라의 김민수>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인도네시아에서 13년을 살다가 고향에 돌아온 고등학생 ‘민수’가 바라보는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을 그리고 있는 청(소)년 영화다. 상상 속 나라도 아니고, 저 멀리 타국도 아닌, 실은 가장 익숙하고 이해 가능해야 하는 ‘모국’이 민수에게는 가장 ‘낯선’ 공간이 되어 있었다. 

이 ‘이상한 나라’ 사람들은 인간을 항상 ‘적대적인 둘’로 나눈다. 일베 아니면 종북, 애국자 아니면 빨갱이, 한국인 아니면 이주노동자, 개념녀 아니면 김치녀…. 도대체 이 이름들이 어떻게 양 극단으로 배치되어야 하는지도 의문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서로 제일 반대편 끝에 놓여 결코 함께 만날 수 없는 이 이름들 사이에 ‘중간’이나 ‘사이’ 지점이 없다는 것에, 민수는 놀란다. 기호나 취향에 따른 다양하고 자유로운 답을 원치 않는 사회, 둘 중 하나로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라고 강요하는 사회, 이것이 오늘날의 한국사회라는 한 ‘고등학생’의 고발이었는데, 그 관찰이 잘못되었다고 반박할 수가 없는 현실이라 어른인 나는 슬펐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적대적인 둘’이라는 분류방식을 가장 열정적으로 생산하고 실천하는 집단은 어디일까? 일간베스트저장소(일명 ‘일베’)와 한국교회를 ‘와’로 연결하여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이 질문을 묻고 보니 어라? 슬프게도 이 두 집단이 얼른 머릿속에서 떠오른다. 분명 기원이 다르고 추구하는 바가 다르며 구성원들이 다른데도, 세상을 보는 시각을 비롯하여 그들이 신념에 사로잡혀 적대감을 가지고 싸우는 ‘대상’까지 닮아있다는 생각에 미치니, 그 ‘닮음’ 때문에 당혹스럽다. 

물론 ‘일베’나 ‘한국교회’라는 집합적 이름을 하나로 싸잡아 평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여 ‘일베는 다 그렇다’거나 ‘한국교회가 모두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에서 두 집단의 이름으로 드러나는 사건들이 ‘흡사’한 지형을 그리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안타깝지만 외면하면 안 되는 ‘친화성’(affinity)이다.

‘우리 대 그들’, 일베 커뮤니티의 혐오와 배제
2010년, 한 기존 사이트의 삭제된 글들을 모아두는 일종의 ‘저장소’ 개념으로 시작된 이래, ‘일베 사이트’는 보통의 시민 정서를 가진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일이 잦았다. 삭제된 글의 특성상 부적절한 표현이나 내용이 많기 마련이고, 무엇보다 회원들의 추천을 받아 일간‘베스트’로 뽑히는 작동방식이라, 더욱 강렬하고 자극적이며 엽기적인 글들이 올라왔다. 

가장 최근에 논란이 된 것은 단원고 교복을 입고 세월호 희생자들을 ‘어묵’에 비유하여 이를 먹고 있는 인증샷 게시글이었다. “나 오늘 친구 먹었다”라는 텍스트와 더불어 올라온 사진을 SNS에서 보는 순간, 나는 심장이 멎을 뻔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세월호 희생자를 두고 ‘희화’가 가당키나 한가? 무엇보다 저런 폭력적 상상력이 어찌 가능할까? 기억을 더듬으니 5·18 희생자의 관 사진을 올려놓고 “햇빛에 잘 삭혀진 홍어”라는 표현을 썼던 것도 이 사이트 이용자였다. 이 게시글의 폭력적 상상력이 낳은 ‘홍어’라는 단어에 회원들은 열광했다. 아들의 관을 부여잡고 우는 엄마의 사진 속 모습을 보고 “엄마, 택배 왔어요”라는 반응은 눈으로 읽고도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다.

일베 회원들은 아무나 조롱하고 혐오하는 것이 아니다. 일베 회원들에게 ‘그들’로 분류되고 타자화되어 ‘우리’ 커뮤니티에서 배제시켜야 하는 범주의 사람들은, ‘여성’ ‘좌파·진보’ ‘공산주의자(종북)’ ‘이주노동자(불법체류자로 응시)’ ‘호남인’이다. 전혀 다른 범주의 사람들임에도, 일베 회원들의 눈에 ‘그들’로 분류된 이들은 ‘결국은 다 같은 존재’이다. 하여 아주 쉽게 ‘동류’로 호명된다. 정부정책에 의문을 제기하고 반정부시위를 한다는 점에서 세월호 유가족이나 종북·좌파는 모두 똑같은 ‘그들’이다. 이런 분류와 응시가 세월호 유가족을 ‘종북·좌빨’과 동일시하고 세월호 희생자들을 혐오와 조롱의 대상으로 삼게 만들었다.

일베의 패륜적 언행에 시민적 분노가 들끓자, 보수 성향의 한 사회학자는 ‘일베’를 향한 혐오감을 ‘이중잣대’라며 비판했다. ‘오늘의 유머’(일명 ‘오유’) 사이트에서 보여주는 좌파적 성향에 대해서는 왜 시민적 분노가 없느냐고 말이다. 마치 ‘축구 좋아하냐 야구 좋아하냐’하는 기호(嗜好)의 문제인데 왜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느냐는 그의 말을 들으며, 난 분노했다. 이건 기호의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 인간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상처를 입은 사람은 치유해주고, 연약한 사람은 일으켜주며, 애통하는 사람 곁에서 위로하며, 희망을 버리려는 사람들에게 연대의 따듯한 손을 내미는 것, 그것은 개인의 기호나 성향과 상관없는 ‘공동체의 원리’ 즉 윤리(倫理)이기 때문이다. 

생때같은 자식을 어이없이 잃고서 영문이라도 알자며 차디 찬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 곡기를 끊은 아비·어미들 앞에서 피자와 치킨 파티를 하는 것은, 다양성도 기호도 아니다. 그러나 인간을 둘로 나누어 유가족들을 좌파·빨갱이 범주로 분류한 일베 회원들은, 금세라도 뒤집혀 침몰할 것만 같은 ‘대한민국호’를 지키겠다는 열정에 사로잡혔다. 100여 명의 젊은 일베 회원들은 ‘너희들이 대한민국의 중심이다. 부디 나라를 지켜다오’ 격려하는 한 50대 사업가의 호명에 열렬히 반응하며 광화문 광장에 모여 앉아 비장한 자세로 폭식 투쟁을 했다. 

일베 회원들은 ‘지켜야’ 할 것들이 많다. 무엇보다 오늘의 ‘부강한’ 대한민국을 있게 한 시장자본주의, 민족주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 2012년 대선을 계기로 급격하게 정치적 목소리를 낸 일베 회원들의 보수 여당을 향한 열정적인 응원은 이 때문이었다. 집권하면 무상복지를 실천하겠다는 진보세력으로부터 ‘중산층의 성실한 노동의 결실’을 지켜내야 했다. 때문에 사회주의적 상상력을 가진 진보세력을 모두 ‘종북·좌빨’로 명명하여 적대시하고, 이들의 상징적 인물인 고 노무현 대통령을 ‘노알라’로 희화하여 조롱했다. 이들은 또한 ‘남자들이 일군 세상에 무임승차하려는 김치녀’들과 ‘남자 위에 올라서려는 페미년’들로부터 가부장적 지배권을 지켜내야 했다. 때문에 여성들을 비하하는 게시글을 열정적으로 생산하다가 급기야 일방향의 마초적 힘을 과시하는 ‘강간 노하우’를 알려주고 관련 정보나 성공담을 공유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일베 회원들은 대한민국 근대화를 이룩한 산업일꾼을 ‘영남인’으로 호명하면서, 이제 와서 권리를 나누자고 주장하는 ‘호남인’들이나 글로벌 노동 환경 속에서 급속하게 유입된 이주노동자들을 거의 ‘악의 무리’로 간주했다. 일베 커뮤니티 회원들은 자신들이 규정한 ‘사회악’이 대한민국을 좀먹기 전에 ‘적’들과 대항하여 싸우고 ‘보수적’ 가치들을 지켜내야 할 절체절명의 사명감으로 똘똘 뭉쳐 있다.

보수적 열정의 닮은꼴, 한국교회의 배타적 응시
이런 ‘패륜적’ 커뮤니티와 한국교회를 어찌 감히 ‘와’로 연결하려 하는가? 그러나 생각해보자. ‘보수적’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열정에 사로잡혀 적대적 언행으로 한국사회를 양분한 것은 한국교회가 먼저였다. 사실 교회의 이항대립적 사고방식은 역사적 뿌리가 매우 깊다. 기독교 교리를 체계화하던 헬라 세계에서 이미 선과 악, 빛과 어둠, 영과 육의 이원론적 사고와 행동방식이 주류로 자리 잡은 마당이다. 선, 빛, 영의 집단인 교회가 악, 어둠, 육의 집단에 대해 적대적이고 배타적인 자세를 가지는 것은 오랜 응시의 습관이었다. 

이러한 이항대립적 응시에 더해 우리나라 개신교의 경우는, 신앙 주류가 ‘미국발’이다보니 서구의 특수한 역사적 정황에서 결합된 ‘애국=부국강병=자유·자본주의 수호=반공주의=기독교신앙’이라는 공식이 따라왔다. 서구적 콘텍스트에서 발생한 우연하고 비본질적인 결합이란 것을 인식할 능력도, 무엇이 본질적인 기독신앙인가를 분석하여 떼어낼 생각도 없이, 그저 ‘아멘’으로 받아들인 이 공식은 한국교회가 신앙의 이름으로 수호해야 하는 가치의 목록이 되어버렸다. 때문에 (주류)한국교회는, ‘공공성’이나 ‘복지’를 논하면 곧바로 공산주의자·빨갱이로 분류하고, 성소수자 인권에 대한 소신발언을 하면 곧바로 이단이나 사탄으로 분류하며, ‘돕는 배필’의 위치 이상을 넘보는 여신도나 여목회자들을 ‘창조질서에 불순종하는’, 한 교단신학교 이사장의 표현으로는 ‘왈왈 짖는 불독’으로 분류하고 적대시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계명은 어디다 따로 숨겨두었는지, 한국교회가 ‘그들’로 분류하고 혐오적 혹은 차별적 시선으로 대하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다. 가장 눈에 띄는 분류 집단은 ‘좌파·사회주의자’(‘종북’이라 부르는)이다. 이미 미국에서부터 반공산주의적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 패키지가 들어온 마당에, 동족상잔의 전쟁을 통해 극심한 핍박을 받았던 서북 출신의 교회 지도자들이 한국교회에서의 영향력이 커지는 과정에서 교회의 ‘진보 알러지’는 극에 달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비전은 오히려 사회민주주의적 공공성과 더 친화성을 가질 만한데, 이런 내용적 고민 없이 발산하는 좌파·진보 집단을 향한 적대감은 한국교회를 보수화해왔다.

성서를 꿰뚫는 사랑의 명령에는 소극적 자세를 가진 한국교회가, 몇 군데뿐인 성서구절을 근거 삼아 마치 지상명령이나 된 것처럼 열정적으로 적대감을 표시하는 또 다른 ‘그들’은 동성애자이다. 게이퍼레이드나 소수자인권법제화 모임, 혹은 인권단체 주변에는 언제나 호전적인 문구들로 가득한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기독교인들이 있다. 성소수자들을 마치 사탄의 영에 사로잡힌 음란마귀쯤으로 묘사하며 선량하고 순진무구한 청소년들에게 악한 영향을 끼칠 존재들로 응시하는 기독교인들의 시선은 폭력적 언어가 가득한 피켓 문구와 적대의 몸짓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놀라운 것은 이들의 표현에 ‘종북게이’라는 합성어가 버젓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전혀 다른 범주의 두 단어는 한국교회가 혐오하고 적대시하는 ‘그들’이라는 점에서, 일베 커뮤니티의 방식과 마찬가지로, 생각도 분석도 없이 쉽게 한 단어로 묶여 호명되는 것이다.

또한 여성에 대한 한국교회의 인식은 현재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가장 보수적일 것이다. 물론 개신교의 경우는 ‘온건한 가부장제’라고 부르는 바, ‘존재론적으로는 평등하나 기능에 있어서 위계적’이라는 현대의 성별분업적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기능적 위계’를 고수함에 있어 1세기적 질서를 그대로 차용하여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든지, 심지어 ‘돕는 배필’을 창조질서의 맥락에서 해석하며 여성의 위치를 보조적 역할로만 제한하는 한국교회의 담론과 실천은, 21세기 양성평등적 사회에서 남성들과 똑같이(때로는 더 우월하게) 자신의 사회적 역량을 길러온 수많은 ‘신실한 여성 청년들’에게 신앙의 갈등을 유발시킨다. 최근 한 보수 교단이 여성들이 목회자가 되는 길 자체를 차단하는 남성 중심의 신학 교육 학제를 개편한 사례를 비롯해, 오히려 시대에 역행하는 한국교회의 실천들은 ‘우리가 건설하고 지켜온 영역을 빼앗길 수 없다’는 보수적 마인드의 발현이라는 점에서 일베 코드와 의미를 같이 한다.

관계적 혁명, ‘나’로서 ‘너’를 마주하라!
지난 5년간 급작스레 부상한 젊은 보수층의 일베 문화에 대하여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키워드로 접근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점점 증가하는 청년실업문제나 일상이 되어버린 비정규직·알바 노동에 가장 직접적으로 노출된 청년층의 분노와 좌절이, ‘너희들 때문’이라는 적개심으로 표출되었다는 것이다. 여자들이 집안 구석에나 있지 ‘기어 나와서’, 더 싼 값에 일하겠다고 들어온 외국인노동자들 때문에, 일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복지 운운하며 내게 돌아올 파이를 자꾸 더 작아지게 만드는 ‘불온한 사상’의 좌·빨 때문에, 자신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가 박탈되었다고 인식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십분 설득력이 있는 분석이나, 나는 작년에 일베를 연구한 김학준이 석사학위 논문에서 지적한 ‘아버지의 의견을 그대로 답습한 아이들’이라는 주장에 더 공감한다. 심층인터뷰를 위해 일베 이용자들을 만나본 소감을 밝히며 김학준은 “첫째로 굉장히 착하다. ‘키보드 워리어’라서 현실에서 주눅이 든 것도 아니고, 할 말 다 하면서도 아주 예의바른 청년들이 줄줄이 나오더라. 둘째로, 다들 아버지 이야기를 많이 한다. 10대 때부터 아버지를 존경하고 영향을 받은 이야기가 많다. 전반적으로 삶의 태도가 참 순응적이다”(<시사인> 2014년 9월 29일자 인터넷판)라고 말한바 있다. 이 아이들은 자신들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주역이라고 믿고 있는 아버지 세대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그대로 따라하고 내면화해온 까닭에, 나이와 시절에 맞지 않는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이며 중산층의 가치를 대변하는 집단이 되었다는 분석이다. 

가부장적, 그리고 중산층의 가치! 여기에 한국교회와 중첩되는 사회학적 배치가 놓여 있다. 대한민국 근대화의 전개과정에서 소위 ‘산업일꾼’이면서 ‘개신교도’라는 중첩성은 17~18세기 유럽이나 미국동부만큼이나 강렬했기 때문이다. 개신교 신앙과 함께 유입된 근대 제도이다 보니 ‘개신교도가 된다는 것’은 곧 ‘근현대인(modern man)이 된다는 것’과 다분히 겹치는 사회 상황이었다. 도시 중심, 직업이동 중심의 현대사회로 재편되면서 핵가족의 ‘영적 리더’요 ‘생산 담당자’가 된 아버지들, 가족을 일군 아버지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답을 수동적으로 따라하는 아이들, 일베 코드를 이 한 가지 분석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한국교회가 현재 안고 있는 배타적 응시와 실천의 문제를 짚어보는 데 있어서는 시사점이 크다. 

기독교는 한마디로 ‘아버지’의 종교이다. 조금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과정에서 어느덧 세상 아버지들이 ‘하나님’이 되어버린 종교가 기독교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신 것은 율법의 심판 아래 벌벌 떨지 말고 자유혼을 가진 ‘아들’(은유이니 ‘딸’도 포함한다)로서 성령의 인도 아래 스스로 선택하며 살라 하신 것이었지, 세상 아버지들이 하나님과 같은 권위를 독점하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면서까지 우리에게 부여해주신 자유를, ‘교회 아버지들’(교부들과 사제들, 그리고 목사들)이 다시 빼앗았다. 인간-왕이, 사제가, 아버지가 다스리던 전통사회에서는 그들의 답이 정답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 신민(臣民)으로서 그들 앞에 꿇어 복종하고 그들의 답을 내면화하여 심지어 그것이 원래부터 자신들의 욕망이었던 듯 그리 살아야 했다. 그거 하지 말라고, 자유혼의 한 단독자로 하나님 앞에 서라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 그 뜻대로 사는 선택을 하라고 ‘아버지들의 답’에 프로테스트한 것이 개신교의 출발 아니었나? ‘아버지가 그러셨다’는 고백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 아버지 세대가 사는 동안 하나의 패키지로 엮어 ‘그들’로 분류하고 적대와 혐오로 응시한 사람들을 ‘따라서’ 적대할 필요도, 이유도, 정당성도 없다.

일베나 한국교회가 ‘그들’로 분류하여 혐오하고 적대시하는 응시와 행동 속에서 발견할 수 없는 것은 바로 ‘너’로서의 관계적 응시다. 여성도, 진보도, 이주노동자도, 호남인도, 세월호 유가족도 하나의 분류 코드로 추상화될 수 없는 살아 숨쉬는 ‘너’이다. 그건 남성도, 보수도, 한국인도, 영남인도 마찬가지다. 사실 ‘여성’은 하나로 포착되지 않는다(운동성을 갖기 위해 전략적으로 연대한 ‘여성’에 대한 논의는 이 글에서 다루지 않는다). 그건 추상적 집합 명사이고 여성을 ‘그들’로 응시하는 사람들의 관념 속에서 마음껏 조작될 수 있는 이미지이다.(이렇게 여성을 머릿속에서만 그려온 사람들 중에 변태가 많은 법이다. 이 점에 있어서도 일베나 한국교회 목회자 다수가 매우 닮아 있다.) 그러나 개개의 여성을 ‘너’로 만날 때, 아버지들이 만들었고 아들들이 내면화한 ‘닫힌 답들’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관계는 언제나 혁명적이기 때문이다. 그 모든 진지한 관계 안에서는 ‘너’의 의미가 ‘나’에게로 전달되고 그래서 ‘내’가 바뀌기 때문이다. 그 힘을 알았는지, 하다못해 일베 회원들도 사이트에서 철저하게 관계성을 금지하고 익명성을 확보하는 소통을 진행한다 한다. 한국교회가 대통령의 눈물에는 가슴 아파하면서 세월호 유가족의 눈물에는 ‘음모’가 있다고 의심하고, 사학법 논쟁을 두고는 순교의 각오로 삭발을 해놓고서 삭발을 하는 유가족의 모습에는 ‘의심’의 시선을 보낸다면, 스스로 깨달을 일이다. 우리도 ‘일베’와 다르지 않다고, 일베조차도 자신들의 회원이 어려움에 처하면 “계좌번호 불러라~” 십시일반 도우며 의리를 보인다 한다. 오직 ‘우리’ 집단에게만 호의와 사랑을 베푸는 자들을 예수께서는 옳다 하지 않으셨다. 악인도 제 자식은 사랑하는 법이다. 예수의 조언은 ‘원수도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배타적 ‘그들’을 가진 집단은 그래서 실은 스스로가 ‘왕따’임을 입증하는 거다. 한 번도 진지하게 자유혼을 가진 ‘나’로서 ‘너’를 마주해보지 못했음을 세상 만천하에 알리는 거다. 생각해보라,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니! 그런 단어조합이 ‘선입견’을 가진 유대인들에게 가당키나 했을까? 종교적으로도 인종적으로도 유대인의 정통성을 버린 악하고 열등한 ‘그들’ 집단으로 분류된 사마리아인 앞에 어찌 ‘선하다’는 수식이 붙을 수 있을까? 그러나 예수께서는 누가 우리의 이웃인지를 그 비유에서 너무나 명백하게 설명해주셨다. 내 앞에 마주한 ‘너’의 필요에 응답하는 ‘내’가 너의 이웃이다. ‘나’의 의미에 눈맞춰주고 존재의 속삭임에 귀기울여주는 ‘너’ 역시 나의 이웃이다. 여성, 진보·좌빨, 이주노동자, 호남인, 세월호 유가족, 이교도들로 호명될 이들은 없다. 물론 남성, 보수, 한국인, 영남인, 기독교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획일적 집단으로는 ‘너’를 만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파당을 만들고 선긋기를 하려면 정치인은 될지언정 교회는 아니다. 

예수께서 그의 생애 사역 내내 그러하셨듯이, 하나님의 뜻대로 선한 삶을 살려하는 ‘나’로서 언제나 내 앞에 온 존재로 의미를 보내오는 ‘너’를 개별자로 마주하자. 그래야만 ‘세상 아버지들’이 만들어 놓은 차별과 적대의 기호들을 넘어, ‘하늘 아버지’가 뜻하시는 포함과 사랑의 응시와 실천이 가능할 것이다. 


백소영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와 미국 보스턴대학교에서 기독교사회윤리학을 공부했다. 이화인문과학원 연구교수를 역임했으며, (후기)근대성, 개신교, 교회·공동체, 여성·청(소)년을 키워드로 강의, 연구,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헤아려본 세월》 《세상을 욕망하는 경건한 신자들》 《엄마되기, 힐링과 킬링 사이》 《교회를 교회되게》 《인터뷰On예수》 《우리의 사랑이 의롭기 위하여》 등의 저서가 있다.

백소영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외래교수 goscon@gosc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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