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setNet1_2

구원과 심판에 관한 논쟁 뒤에는…

기사승인 [0호] 2019.03.27  17:35:04

공유
default_news_ad1

- 〔독자서평〕 최후 심판에서 행위의 역할 논쟁 / 제임스 던 外 지음 / 김귀탁 옮김 / 새물결플러스 펴냄

   
▲ 로버트 N. 윌킨, 토머스 R. 슈라이너, 제임스 D. G. 던, 마이클 B. 바버 지음 / 앨런 P. 스탠리 엮음 / 김귀탁 옮김 / 새물결플러스 / 원제 : Four Views on the Role of Works at the Final Judgment

우리는 옛글이 언제나 헷갈린다. 이 말 같기도 하고 저 말 같기도 하다. 게다가 저자가 각기 다른 글들이 모여져 한 텍스트로 같이 읽힌다면 이해는 먼 구름 잡기가 될 수 있겠다. 바로 성서가 그렇다.

어쩌면 우리는 끝끝내 성서 언어들에 접근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성서 언어와 그 언어 사용에서 일관된 명증함이 존재하지 않는 듯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해석의 풍성함보다 첨예한 갈등들이 더 많이 목격된다.

예수의 말씀이 그러하며, 예수와 바울이 그러하며, 바울과 야고보가 그러하다. 성서 해석은 통일성보다는 다양성이 눈앞에 드러난다. 이 책에 담긴 구원과 심판에 대한 이해와 해석도 그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네 가지 관점 - 행위와 심판

먼저 이 책의 네 가지 관점을 간략하게 짚어 본다. 로버트 N. 윌킨의 주장은 심플하고 명확하다. 불신자와 신자는 운명이 갈린다. 불신자는 최후 심판인 크고 흰 보좌 심판에 처해지지만, 신자는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상을 받느냐 못 받느냐만 확인될 뿐이다. 그리스도인의 인내는 최종적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영원한 상을 얻느냐(43쪽)는 것일 뿐이다. 윌킨의 이러한 주장은 ‘요한복음’의 여러 말씀이 증거 본문으로 사용된다. 그리고 그는 한편으로는 므나 비유(45-50쪽), 신실하지 못한 종들의 운명(55-59쪽), 양과 염소 비유(60-62쪽) 등의 예수들의 비유들의 해석으로 한편으로는 갈라디아서, 골로새서 등과 같은 바울 서신들, 히브리서, 요한계시록에 대한 반증 및 해석으로 자신의 논지를 강화하려고 보인다. 마지막으로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최후의 심판에 설 것이라는 문제점을 석의적으로, 실천적으로 반박한다.

이러한 윌킨의 주장과 다르게 나머지 세 의견은 행위를 심판과 연계 짓는다.

먼저 토머스 R. 슈라이너는 우리가 행위에 의해 구원을 받거나 의롭다 함을 받지 않지만(110쪽) ‘선한 행위’(110쪽)가 칭의에 필수적이라고 한다. 즉, 행위는 최종적 구원에 필수적이다(124쪽). 그는 바울 서신과 야고보서로 자료를 제한한다. 그리고 전반부에서는 바울 서신에 나타난 행위와 상관없는 칭의를 갈라디아서와 로마서 등과 같은 바울 서신을 가지고 설명한다. 다음으로 행위에 의한 칭의를 로마서 2장, 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와 빌립보서를 가지고 증명한다. 이와 함께 야고보서를 살펴본 후 ‘선한 행위’를 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할 것(140쪽)이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변화된 삶’이 수반되지 않는 ‘믿음’은 한낱 가식일 뿐(142쪽)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삶의 방식’인 사랑을 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144쪽).

다음으로, 제임스 D. G. 던은 바울에게서 구원이 ‘하나의 과정’(191쪽)이라는 사실을 끄집어낸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받는(과정에 있는) 자’(191쪽)다. 그러고 나서 샌더스의 주장인 유대교의 ‘언약적 율법주의’를 끌어들여 바울의 구원 신학이 여기에 터하는 것으로 암시한다. 바울도 회심한 자들은 ‘믿음의 순종’(195-196쪽)에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던은 ‘믿음’은 ‘증명’이 필요하다고 본다(198-199쪽). 그리고 이러한 증명을 하기 위해서는 신의 힘만 의지하는 신 단동설보다는 신인협력설이 더 가깝다고 본다(202쪽). 그러면서도 그는 이 문제에 관해 바울이 독자에 따라 강조점이 달랐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마이클 P. 바버는 칭의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오지만 선한 행위에 따른 심판이 따른다고 주장한다. 구원은 행위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지만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면 공로적 가치가 있는 행위를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275쪽). 결국, 선한 행위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의 결과이다(282쪽).

 

그렇다면, 구원 후에는 어떤 행위를 해야 하는가?

윌킨의 의견은 보수적인 교단에서 환영받을 만한 주장처럼 보인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든가 기도문 읽고 영생 얻는 ‘사영리’를 기억나게 할 정도다. 윌킨에 의하면 예수를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 또한 우리 신자들에게는 상을 받지 못하는 부끄러운 심판이 있을지언정 지옥과 같은 멸망에 처해지지는 않는다.

다만, 이런 윌킨에게 아쉬운 점은 인내가 요구되지 않고 믿음만 강조되는 ‘요한복음’에서 주요한 근거 말씀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는 증거 본문의 편향이다. 또한 비유들의 해석이 보편적이지 않고 억지스럽게 자신의 논지에 맞추어 해석하는 것으로 보였다. 게다가 어느 성경, 어느 구절을 중심에 두고 해석하는 이유도 설명이 부족해 보였다.

슈라이너, 던, 바버는 공통적으로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구원과 심판에서의 행위의 필요성을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 행위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구체적이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다. 율법과 같은 행위가 아니다. 자선과 같은 행위가 아니다. 그러나 이 세 사람의 논지를 따른다면, ‘이미’ 와 ‘아직’ 사이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면 어떤 행위를 해야 한다.

이 행위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인가? 김세윤이 말한 ‘새로운 윤리’(김세윤, 《구원이란 무엇인가》, 1995, 80-85쪽)인가? 바버가 말한 ‘자선’인가? 희년과 함께 논의되는 ‘공의’와 ‘정의’인가? 아니면 ‘십계명’인가? 예수의 ‘산상수훈’인가? 이게 명확하지 않다. 우리는 어떻게 타인을 사랑하고 착한 행위를 해야 하는가?

우리는 구원 받았고, 받고 있으며, 받으리라는 것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이 책은 그 구원의 전 과정을 숙고할 수 있도록 돕는다. 아울러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길 위에서 걸어야 하는 우리에게,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부러웠던 점은 논평이 주는 학문의 재미였다. 슈라이너가 윌킨에게 이렇게 논평한다. “그의 주석 작업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78쪽) 윌킨이 슈라이너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슈라이너의 해석이 바로 이 세 가지 모순에 빠져 있다고 말하고 싶다.”(152쪽) 얼마나 등골 오싹한가! 그러나 이러한 솔직함이 이 시리즈의 매력인데 이러한 매력이 영미권 신학자들만 누리고 있는 점이 아쉬웠다. 우리도 중요한 주제를 놓고 다른 시각을 가진 여러 신학자들이 논평을 겸한 책을 출간한다거나 강연을 한다면!

* 125쪽 아래에서 5번째 줄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얻어지는 것임을 강조한다”의 오역으로 보인다. 다음 쇄에 교정하기 바란다.

성하춘 @

<저작권자 © 복음과상황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책과 함께

1 2 3 4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