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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정점을 향하는 교회, 그 빛과 그림자

기사승인 [341호] 2019.03.29  15: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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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1호 역사에 길을 묻다] 제3차 라테란 공의회

   
▲ 베네딕트 수도회 창설자 '누르시아의 베네딕트' (사진: 위키미디어 코먼스/CC BY 4.0 Livioandronico2013)

1. ‘장기 12세기’, 유럽을 만들다  

서로마제국 멸망(476) 이후 서유럽은 가톨릭 교회를 중심으로 게르만 이민족들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갔습니다. 이 문화는 지중해와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이미 확립되어 있던 헬레니즘 문명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서유럽의 형성기(5-11세기)는 말 그대로 척박한 곳에서 새로운 문명을 생성해내는 고단한 기간이었습니다. 그 정신적 지주 역할을 교회에서, 수도사들이 감당했습니다.

그 중심에 서 있던 것이 베네딕트 수도회였습니다. 누르시아의 베네딕트(480-543)가 창설한 이 수도회는 청빈과 순결, 순명(順命)을 서약하며, 노동과 기도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서유럽 형성기에 이들이 끼친 영향을 고려할 때 베네딕트 수도회는 그저 단순히 하나의 수도회에 머물지 않습니다. 성 베네딕트를 ‘유럽의 수호성인’이라 칭하고, 6-11세기를 ‘베네딕트 수도회의 세기’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영향력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 시기 수많은 왕후장상이 나타나고 사라졌지만, 역사가 주목하던 이들은 무명의 수도사들이었던 셈이지요. 

이렇듯 기독교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유럽을 형성해가는 데에는 거의 다섯 세기가 걸렸습니다. 유럽이 안으로 만들어갔던 문명은 봉건제도가 정착함으로써 완성 단계에 들어갑니다. 유럽 내부에 평화의 시기가 도래한 것입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운동이 11세기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확산된 ‘신의 평화’(Peace of God)입니다. 호전성과 폭력성으로 상징되는 게르만 이민족들이 이제는 안정된 정치·사회·경제 구조를 만들어가게 되면서, 사적인 제재나 폭력을 기반으로 한 질서 유지보다 정당한 공권력을 중심으로 한 질서를 지향한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신의 평화’ 운동을 통해 무법적인 약탈과 폭력을 금지하는 일종의 전투와 폭력에 관한 규칙을 만들어 내부 평화와 사회 개혁을 이끌었습니다.

유럽의 사회 구조에 큰 영향을 준 장자상속제, 봉건제도 정착, 신의 평화 운동이 도래한 시점은 10-11세기였습니다. 1095년부터 시작된 십자군 운동은 예루살렘 회복이라는 대의명분과는 별개로, 고착되어가는 유럽의 사회 구조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하는 현실적인 목표가 있었습니다. 십자군 원정은 유럽의 호전성과 폭력성을 ‘성전’(聖戰)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측면으로는, 유럽이 십자군을 결성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했다는 것은 유럽이 내부에서 쌓아 올린 자신감의 표출이기도 합니다.

유럽은 1050년에서 1250년 사이에 전에 없는 확장을 경험했습니다. 인구 증가와 도시 생성, 무역 증대를 통한 화폐경제 활성화는 경제, 기술, 과학 등 거의 모든 분야의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서유럽 역사에서는 장기간 지속된 이 발전과 변화의 시기를 ‘장기 12세기’라고 표현합니다. 흥미롭게도 이 장기 12세기의 변혁과 발전을 주도한 세력은 교황청으로 대표되는 가톨릭이었습니다. 사회의 폭력적인 질서를 신의 평화라는 개념으로 완화하거나, 불합리하게 이루어지던 신명재판(神明裁判, 중세 유럽 당시 피고발인에게 육체적 고통을 가해 죄의 유무를 판단하던 재판으로 주로 마녀재판에서 행해졌음-편집자)이나 사적 제재 등을 금지하고 정당한 재판을 통해 정의를 추구하려는 목적으로 도입된 종교재판 제도 등은 가톨릭 교회가 주도한 사회 변화였습니다.

2. 교황 중심제의 정점을 향하여 

이제 이러한 유럽 사회의 장기적인 변화를 교회가 어떠한 방식으로 견인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가톨릭 교회 역사로 국한해 보자면 최초의 가톨릭 주도 공의회인 869년의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이래 1,300년간 열네 차례의 공의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이렇게 백 년에 한 번 꼴로 개최된 공의회가 ‘장기 12세기’ 동안에는 제1차(1123)에서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까지 무려 네 차례 열렸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가톨릭 공의회가 유럽의 사회적·정치적 안정과 확장의 시기를 견인한 중요한 동력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적어도 중세 유럽에서 교회사와 사회사는 분리될 수 없는 성격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교리의 결정이나 선포가 교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선포였던 것입니다. 지난 호에서 살펴본 대로 제1, 2차 라테란 공의회는 교회가 윤리적·도덕적 개혁을 추구하여 사회 전반의 질서를 확립하고자 하는, 위로부터 이루어진 하향식 개혁이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서유럽 역사의 ‘장기 12세기’는 제4차 라테란 공의회를 통해 ‘완성’되었다고 평가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장기 12세기는 교황 중심의 체제가 유럽 사회에 안착되는 흐름과도 연결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유럽 사회에 교황 중심의 강력한 정치 체제를 완성해나가는 데 기여한 세력은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요? 앞서 유럽의 형성기에 베네딕트 수도회의 역할이 주목받았다면 교황 중심의 유럽을 완성하는 데 실질적인 기여를 한 세력은 12세기 말엽 등장하여 제4차 라테란 공의회 전후로 정식 수도회로 인정받은 도미니크 수도회와 프란체스코 수도회입니다. 이들은 기도와 노동의 가치를 강조하며 수도원 내 생활을 지향하던 베네딕트 수도회와는 무척 결이 다릅니다. 사유재산을 소유하지 않는 청빈을 강조하며, 세속의 터에 내려와 탁발(托鉢)을 하며 생활했기에 탁발 수도회라고 부릅니다. 그들이 추구한 ‘사도적 청빈’(apostolic poverty)의 신선한 삶은 성직매매와 성직자의 축첩과 같은 제도교회와 성직자의 타락에 염증이 난 대중들을 매료시켰습니다. 이들은 12세기말부터 13세기초 유럽 사회에서 대중을 대상으로 한 사목 활동과 더불어 교육 활동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냅니다.

그러나 모든 대안적 운동들이 가톨릭 제도 안으로 수렴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든 권력이 교황을 중심으로 모아지는 중앙집권의 이면에서는, 그에 인정받지 못하는 세력에 대한 탄압이 이루어졌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장기 12세기는 탁발 수도회와 같은 공인된 대안운동뿐 아니라 알비파와 왈도파 등과 같은 집단적인 이단 운동들이 생겨난 시기이기도 합니다.

1150-1170년 사이에 프랑스에서 생겨난 카타리파와 왈도파는 기성교회의 제도와 권력을 비판하며, 순결한 삶을 추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프랑스 남부 알비 지방을 중심으로 생겨나 알비파라고도 알려진 카타리파는 당대 가톨릭 제도교회를 부정하였습니다. 그들은 당대 가톨릭 교회를 반대하고 독자적인 교회 직제를 만드는 등 파격적으로 세력을 확산해 나갔습니다. 이들은 직접적으로 제도교회에 도전하는 등 위협 세력이 되었습니다.

반면, 왈도파는 성격상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프랑스 리용의 상인이었던 왈도는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추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었습니다. 그는 청빈한 삶을 추구하고 빈자들을 구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리용의 빈자들’로 알려진 이들의 모습은 제도권으로 수용되었던 프란체스코회의 모습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프란체스코회는 교황으로부터 수도회로 허가를 받았지만, 이들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중세 유럽 역사에서 카타리파와 왈도파는 최초로 대중들의 지지를 얻어 세력을 확장한 이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이단으로 지목된 세력들을 저지하기 위하여 십자군을 파견하거나 종교재판을 통해 처벌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습니다. 본래 예루살렘 성지 회복을 위해 결성되었던 십자군이 이제는 유럽 내부의 ‘다름’을 몰아내기 위하여 소집된 것입니다. 유럽이 장기 12세기라는 번영의 세기를 맞이한 이면에는, 유럽 내부에 존재하던 관용이 사라지고 차이와 다름에 대한 제도 권력의 탄압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었습니다. 카타리파 십자군(1209-1255)에게 정복당한 많은 수의 카타리파 추종자들이 종교재판을 거쳐 화형을 당했습니다.

제3차 라테란 공의회(1179)는 중세 유럽에서 벌어진 일련의 긴박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개최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공의회는 그로부터 37년 후 유럽사의 한 사건이 되는 제4차 라테란 공의회의 길을 준비하는 공의회로 기억할 수 있습니다.

3. 제3차 라테란 공의회

소집과 의제들
1159년 교황 하드리아누스 4세 사망 후 추기경단이 양분되어 2명의 교황이 대립하는 상황을 또 다시 맞게 되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 3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지지를 받은 대립 교황 빅토르 4세가 충돌하여 가톨릭 교회는 분열되었습니다. 빅토르 4세가 1164년 사망했지만 분열은 이어졌고 그 후에도 2인의 대립 교황이 더 선출되어 알렉산드로스 3세와 대립했습니다. 이 교회 분열은 1177년 교황 알렉산드로스 3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베네치아에서 만나 평화협정(Peace of Venice)을 체결하고 알렉산드로스 3세를 교황으로 인정함으로써 종식되었습니다. 이 협정은 또 다른 의미에서 세속 권력에 앞서는 교황의 권력을 확인시키는 상징이었습니다. 이 협정에서 약속한 대로 교황은 공의회를 소집합니다. 서유럽 전역에서 300명 이상의 주교를 포함하여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1179년 3월 라테란 궁전에서 공의회가 열렸습니다.

일차적인 소집 목적은 20년 가까이 이어진 가톨릭 교회의 분열이 종료되었음을 공식화하는 것이었습니다. 분열의 일차적 원인이 세속군주인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개입에 있었던 만큼 이 공의회에서는 최우선으로 교황 선출 규정을 세부적으로 정했습니다. 아울러, 이 공의회에서 결정되어 가장 항구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학교 설립 및 교육과 관련된 내용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공의회에서는 유럽 사회에서 다름에 대한 타자화의 길이 공식적으로 열리게 되었습니다. 바로 유대인과 이슬람, 이단에 대한 조치였습니다. 

교황제의 정점을 향한 걸음
이미 8세기 중반 라테란 시노드에서 교황 선출 과정에 세속 군주 등 속인의 참여를 금지한 바 있지만, 교황 선출에 대한 세속 군주의 영향력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1139년의 제2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교황 선출에서 하위 성직자 및 속인의 동의 조항을 삭제함으로써 세속의 영향력을 제한했습니다. 그럼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세속 군주들의 시도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1159년부터 1177년까지 이어진 교회 분열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3차 라테란 공의회의 결정문 가장 첫 번째는 교황 선출로 인한 교회 분열을 막기 위해 세부적인 조치를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황 선출권은 오직 추기경들에게만 주어졌습니다. 교황으로 선출되기 위해서는 추기경단 3분의 2의 동의를 얻는 것을 조건으로 했습니다(캐논 1). 그리고 이 3분의 2 동의 조건은 오늘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조항이 세속 군주의 간섭을 배제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장기 12세기가 지속되는 동안 마련된 이 장치는 교황권의 극성기를 향해 가는 상징적인 결과물로 볼 수 있습니다. 

12세기 르네상스: 성당 부속학교 교사 배치
제3차 라테란 공의회에서는 장기 12세기의 발전에 부합하는 혁신적인 결정을 내립니다. 모든 성당 학교에 문법 교사를 배치하여 성직자와 가난한 학생들을 가르치게 한 것입니다(캐논 18). 흔히 유럽의 장기 12세기가 낳은 최고의 가시적인 결과물을 고딕 건축과 대학(universitas)의 탄생이라고 부릅니다. 신을 향한 중세인들의 열망을 성당 건축을 통해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고딕 건축입니다. 하늘을 향해 높이 솟은 첨탑과 천정의 하중을 아치형 교차 궁륭(vault)이 떠받쳐 내부의 두꺼운 기둥을 없앤 고딕 건축은 당대 중세인의 수학, 기하학, 건축술의 총화를 보여줍니다.

장기 12세기의 유형의 성취가 고딕 성당이라면 중세의 경계를 넘어 오늘까지 영속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 지적 혁명은 바로 대학의 탄생입니다. 형성 시기가 13세기로 대체적으로 합의되는 대학 제도는 중세 수도원 교육과 성당 부속학교가 진화한 것입니다. 그 진화의 가장 중심적이고 상징적인 조치가 제3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정한 성당 부속학교에 교사를 배치하는 법령이었습니다.

중세 연구자들은 고딕건축과 스콜라학을 가르치는 대학의 탄생으로 나타난 이 중세의 성취를 조각과 회화, 인문주의로 대표되는 15세기 르네상스와 비교하여 12세기 르네상스라고 부릅니다. 장기 12세기의 결과를 12세기 르네상스라고 표현한다면 그 핵심은 지적 성취입니다. 전통을 ‘전수’하는 것이 목표인 수도원 교육에서 이제는 토론과 논쟁, 회의와 질문이 제기되는 스콜라학이 등장한 것입니다.
재속(在俗)을 벗어나 존재하던 수도원 중심의 교육이 제3차 라테란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재속 성당 부속학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성직자를 양성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던 교육이 정부 기관 등에서 관료로 일할 수 있는 법률가 및 행정가를 양성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중 일부 성당 부속학교가 한 세기 후 중세 대학으로 발전합니다. 이 중세의 교육제도는 당대에 등장한 도미니크회 수도사들과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이 대학에 참여하면서 스콜라학을 발전시킵니다.

수도원에 갇힌 전통을 전수하는 대상으로서의 지식이 아니라 진보와 발전을 위한 매개로서 지식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들어왔습니다. 따라서 성당학교에서는 교육 받은 이들이 전문 분야에 종사하는 데 유익이 되는 실용적인 학문이 교육되었습니다. 이러한 체제는 후에 대학에서 문법, 수사학, 논리학, 기하학, 산수, 천문학, 음악 등을 포괄하는 3학4과로 발전합니다. 중세인들의 진보에 대한 인식은 1124년까지 샤르트르 대성당 부속학교 교사를 지낸 ‘샤르트르의 베르나르’(Bernard of Chartres)의 “거인의 어깨위에 앉은 소인”이라는 표현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납니다. 제3차 라테란 공의회는 이 시대 변화를 읽어내고 독려함으로써, 중세의 지적 혁명에 중요한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탄압 사회’의 형성
끊임없는 확장으로 불리는 장기 12세기, 그 정점을 향해 가는 시기에 열렸던 제3차 라테란 공의회는 그 성취만큼이나 깊은 그림자를 남겼습니다. 전에 열렸던 공의회와 마찬가지로 이 공의회에서도 성직자들과 교회 개혁을 위한 구체적인 조치들이 마련되었습니다. 성직자가 부정직하게 장례식이나 혼인식, 성례전을 베풀며 부정직하게 돈을 청구하는 일이 금지되었습니다(캐논 7). 또한 수도사나 성직자들이 정당한 이유 없이 수녀원에 방문하는 것도 금했습니다(캐논 11).

교회 내부적인 규율 강화와 더불어 제3차 공의회는 이전 공의회에서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주제들이 제기되었습니다. 동성애가 발각된 사제는 사제직에서 축출되고 만약 속인이 동성애를 행하는 경우 파문에 처하게 했습니다. 고리대금업에 종사하다 발각될 경우에도 파문되었습니다. 성직자의 성직매매 및 혼인을 금지하는 동시에 사회의 가장 기초단위인 가정을 이루는 결혼제도를 통제하고 규율하려는 시도가 진행되었습니다. 이는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성직 서임식과 혼인식을 성사로 규정하는 것을 통해 확정되었습니다. 동성애는 이 흐름 속에서 교회의 도덕 윤리에 거스르는 행위로 처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더불어 제3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주목할 것은, 가톨릭의 범위를 넘어선 타자에 대한 명시적인 차별이 확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럽 내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과 무슬림들이 그리스도교도인 하인을 보유하는 일을 금지하였습니다. 또한 유대인과 그리스도교도 사이에 분쟁이 생길 경우 그리스도교도가 제시하는 증거가 항상 받아들여지도록 하였습니다(캐논 26). 무슬림들의 선박 건조에 자재를 제공하는 일을 금하는 결정도 통과되었습니다(캐논 24). 십자군 원정으로부터 생겨난 서유럽의 타자화 흐름이 유럽 내에 거주하는 유대인과 무슬림 공동체에 대한 구체적인 제약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장기 12세기에 등장한 또 하나의 특징적인 집단인 카타리파와 왈도파 등 대중 이단 운동에 대한 압박도 제시되었는데, 세속 군주들에게 이단을 억제할 의무를 부과했습니다(캐논 27). 교황제의 강화와 권력 집중은 유럽을 하나의 효과적인 그리스도교 공화국으로 만들어갈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흐름의 이면에는 그에 동조하지 않는 대중 이단의 등장, 이단에 대한 십자군 및 종교재판소의 설치 등과 같은 어두움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장기 12세기는 ‘12세기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한편, 서유럽에서 ‘탄압 사회의 형성기’라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 시기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무 자르듯 명확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중세 대학 형성의 한 축으로 스콜라학을 발전시켜 나가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도미니크회는 그 신학적 지식과 교리를 통해 이단을 만들고 처벌하는 데 앞장선 종교재판의 핵심을 담당했습니다.

4. 제도화, 그 빛과 그림자 

제3차 라테란 공의회와 그 시기를 어떻게 규정하든 간에 장기 12세기의 혁신적인 변화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여전히 실체에 대한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15세기 르네상스와 비교될 만한 독자적인 라틴 그리스도교 르네상스를 만들었으니까요. 이 변화의 중심에 가톨릭 교회가 있었습니다. 당대 세속 군주들과의 세력 갈등 속에서도 안정적인 변화를 추동했다는 점에서 그 공은 충분히 인정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이 시기는 제도교회의 세력이 포괄할 수 없는 다양성이 생성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지나치게 부유해지고 종교적 가치가 타협된 당대 교회에 맞서는 대안 흐름들이 등장했습니다. 그 흐름들은 대체적으로 시대가 포용하기에는 급진적인 형태를 띠었습니다. 프란체스코회나 왈도파가 주창한 사도적 청빈이라는 이상은 본질적인 가치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제도권으로 수렴되기는 어려웠습니다. 심지어 프란체스코회 내에서도 타협 없는 급진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온건파는 제도권 내에 들어왔지만 급진파는 탄압을 받았습니다.

제도화는 명확한 규정을 지향합니다. 그만큼 그 규정 안에 포괄되지 못하는 것은 항상 그림자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도화되고 집중된 권력은 사회의 안정을 추구하지만 동시에 효율적인 통제를 지향하기도 합니다. 중세 서유럽 교황제의 정점을 향해 가는 과정이 타자에 대한 제도적이고 공식적인 탄압과 처벌을 강화하는 것과 연동되었다는 점은 여러 가지를 시사합니다.

제도화의 완성, 교리 체계의 정밀함이 반드시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습니다. 자칫 한 집단의 정체성을 명분으로 제도와 교리를 강제할 경우 다양성은 억압됩니다. 진보와 발전의 이면에 자리하는 그림자를 보는 것이 역사를 읽는 지혜입니다. 장기 12세기가 정점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 열린 제3차 라테란 공의회는 우리에게 잠시 멈추어 서서 침묵하며 성찰하기를 촉구하는지 모릅니다. 12세기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지적 혁명의 다른 얼굴은 ‘탄압 사회의 형성’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무겁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의 과거 경험을 보더라도 그렇지 않은지요. 한국의 산업화, 근대화가 이루어지던 그 이면에 다양성의 가치는 손쉽게 무시되던 날들이 길었습니다. 성장, 발전, 효율이라는 추상의 개념에 개인의 인권, 다른 생각, 다른 목소리는 효과적으로 묻혔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단이라는 규정은 때로 종교적 개념이기보다는 정치적 판단에 가까울 수밖에 없습니다.

제3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결정된 법령에서 오늘 우리의 현실에도 낯설지 않은 용어들이 유독 눈에 많이 들어옵니다. 동성애, 유대인, 무슬림, 이단 등이 그것입니다. 당대의 가톨릭 교회는 사회의 도덕과 윤리, 기강을 바로잡는다는 지극히 정당한 목적을 내세웠습니다. 이를 위해 구체적인 불이익을 주고 처벌을 시행했습니다. 그러나 이 흐름을 가리켜 역사는 중세 ‘탄압 사회’의 형성이라고 평가합니다.

시대착오적 적용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으나, 장기 12세기의 지적 진보와 변화의 흐름 속에 생겨난 타자화의 그림자와 언뜻 오늘 한국교회 현실이 겹칩니다. 한국 사회와 교회, 신학계의 다양한 학문의 발전과 담론의 소개가, 우리 사회에 증폭되는 낯선 타자에 대한 배제와 혐오의 움직임 앞에 무력하게 비춰집니다. 종교적 확신을 앞세우며 다름에 대한 증오를 정당화하는 한국교회의 오늘을 후대 역사는 탄압 사회의 형성기라고 이름 붙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 연재 순서
1. 왜 지금 ‘공의회’인가? : 사회사 관점으로 교회사를 읽어야 하는 이유
2. 동서교회 분열의 서막인가, 확장인가 :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3. 위로부터 이뤄지는 교회 개혁의 전형 : 제1, 2차 라테란 공의회
4. 권력의 정점을 향하는 교회, 그 빛과 그림자 : 제3차 라테란 공의회

 

최종원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에서 교회사와 지성사를 강의한다. 인문주의 정신의 존중이 교회 갱신의 핵심이라고 믿고,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교회사 재구성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최종원 goscon@gosc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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