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setNet1_2

〔백소영〕4차 산업혁명시대, ‘4세대 그리스도인’의 소명

기사승인 [347호] 2019.09.20  11:21:24

공유
default_news_ad1

- [347호 커버스토리]

누구든 결국엔 ‘기성세대’가 된다. 아무리 젊게 살려고 애써도 시간은 흘러가고 ‘다음세대’는 태어나기 마련이니까. 삶의 자리는 계속 바뀌고 세대가 갖고 있는 집단적 사고방식도 달라진다. 때문에, 젊은 세대를 걱정하는 건 오늘날 기성세대만의 일이 아니다. 기원전 3,000년쯤 전 수메르 문명의 진흙 토판에도 어른들의 걱정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요즘 애들은 도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시각은 인류 보편의 문제이지 싶다.

   
 

이는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다른 피조물들은 생명의 순환 속에서 저마다 자신의 운명을 살아간다. 고대의 사자나 오늘의 사자나 사는 방식은 똑같다. 고대에는 육식을 하다가 오늘날엔 피흘림을 회개하고 채식주의자가 된 사자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억울하게 당하는 것이 서러워 제도적 연대를 이루어 저항하는 토끼도 없다. 오직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인간만이 문명과 제도, 즉 하나님의 창조질서 이외의 것들을 만든다. 그러나 유한한 인간이 만들어 낸 것들은 불완전하고 상대적이다. 다음세대에게는 더 이상 의미 있지 않을 수 있다. 그럴 때 소위 ‘세대 차이’를 느끼게 되는 것이고, 그러니 다음세대가 기성세대와 충돌을 일으키고 저항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1세대 그리스도인’으로부터 ‘3세대 그리스도인’까지
흔히 그리스도인들은 신앙 고백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시대에 따라 강조점이 바뀌어 왔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신앙 고백이야 늘 한결같지 않으냐고 쉽게 믿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 변동과 역사적 정황에 따라 그리스도인들도 ‘세대 차이’가 있었다. 나는 그리스도인들을 1세대부터 4세대로 구분한다. 소위 말하는 요즘 세대를 이해하려면 우선 이 시대에 따른 강조점을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우선, ‘1세대 그리스도인’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약속하셨다. “내가 곧 다시 올 텐데 내가 다시 오는 것을 너희 중에 살아서 볼 자가 있다.” 예수님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한 세대 안에 오시겠구나’ 생각했을 일이고, 그래서 초대교회 사람들은 임박한 종말을 믿었다. 그러니 세상 제도를 개혁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을 거다. 설상가상 유대인들과 로마제국이 핍박하던 시절이었던지라, 교회가 하나의 제도로서 사회에서 자리 잡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예수님은 공생애 전반을 통해 이 땅 위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거듭 말씀하셨지만, 순교의 피를 흘려야 했던 초대교회 교인들로서는 ‘영혼 구원’ 차원이 더 절박했다. “악한 세상 권세가 우리를 핍박하고 육체를 죽이나, 우리 영혼만큼은 아무도 못 건드린다. 우리 영혼은 오직 하나님 나라에 거하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저 천국’이었다.

성경에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의 차원과 미래의 차원이 모두 나온다. 그러나 1세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정황은 죽어서 가는 미래적 차원의 하나님 나라를 더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들은 ‘교회’로 모여 살았다. 그리고 교회의 질서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 질서를 적용했다. 권위를 나누고 소유를 나누는 삶이었다. 주인과 노예가 같이 있어도 서로 형제님 자매님이라 부르고 남편과 아내가 수평 관계가 되는 하나님 나라였다. 그러나 교회 밖으로 나가면 주종관계의 신분제 사회, 가부장제를 그대로 수용했다. 견뎠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곧 사라질 질서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2세대 그리스도인’은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어 유럽을 장악하게 된 이후의 세대를 가리킨다. 박해와 순교의 시절에는 ‘감히’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기독교인인 것이 살아가는 데 유리한 세상이 된 것이다. 교황이 세속 왕을 임명하고 공식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불이익을 넘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던 시절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과 세상 사람이 되는 것 사이에 긴장감을 느낄 수 없었다. 기독교는 주류 문화였고 기독교인이 권력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권력이 집중된 곳에는 타락이 있기 마련이다. 이를 보며 신앙을 지키고자 사막이나 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생겨났는데, 이들은 수도자가 되어 금욕적 삶에 매진했다. 이러다보니 2세대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양분되어 버렸다. 세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사람들과, 세상으로부터 유리되어 ‘저 세상적’(otherworldly)으로 신앙을 지키려는 사람들로!

‘3세대 그리스도인’은 개신교도(Protestant)들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 ‘기성세대’는 대개가 여기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세대에 태어나 자란 덕분에 개신교 윤리를 ‘당연’이고 불변의 ‘진리’로 알고 있지만, 사실 3세대는 3세대만의 사회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3세대 그리스도인들은 근현대 세계의 진행 과정에서 주체, 시간, 장소를 함께 공유했다. 신분제와 가산제(家産制, 확대가족 단위로 집안의 재산이 대물림되던 제도)로 유지되던 중세 사회가 붕괴되면서 시작된 근현대 사회와 함께 태동한 것이 프로테스탄티즘이다. 루터는 신자들이 모두 다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가르쳤고, 칼뱅은 신자들이 세상 가운에서 ‘소명’으로서 자기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다고 했다. 독립도시의 중산층 신자들이 이들의 가르침을 반겼다. 막스 베버가 “이 세상적 금욕주의”(thisworldly asceticism)라고 부른 윤리적 삶이었다. 이는 세상에서 금욕적으로 살아가자는 의미인데, 사실 세상 한가운데서 세속적인 일을 하고 살면서 정작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서 수도생활을 하면 적어도 내적 갈등은 없다. 세상에서 살면서 질서와 타협하면 기독신앙의 정수는 잃되 승승장구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살면서 금욕적으로 살라니, 덕분에 개신교 신자들은 늘 ‘갈등’하며 살아야 했다. 3세대 그리스도인들은 주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 직업 영역에서 ‘금욕적’으로 살아내라는 얘기를 듣고 자랐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경건한 개신교도요 목사였던 아버지께서도 늘 강조하셨다. “네가 공부를 잘하고 좋은 성적을 받으면 그건 너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지표가 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귀한 모범이 된다.” 개신교 담론의 주된 내용이 그랬다. 근현대 사회의 ‘경쟁적 개인’의 기독교 버전인 셈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신앙적 동기에서 정말 열심히 뛰었다. 일찍 뛰었고 열심을 다해 뛰었기 때문에 개신교인들은 근대 사회에서 높고 안정적인 자리(bureau)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인간은 살기에 유리한 방식으로 제도를 만들고 그 제도에 적응하기 좋은 방식으로 자기 삶을 기획하기 마련이다. 개별경쟁으로 자리를 차지하는 관료제 사회에서는 혼자 뛰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 그러니 근대적 기획으로 볼 때, 가족은 근현대 사회에는 잘 맞지 않는 제도이다. 전근대 사회에서 확대가족은 노동력을 제공받기에도 가산을 유지하는 면에서도 유리한 제도였다. 가장의 직업경로를 따라 이동하게 된 근현대 사회는 그 규모가 점차 핵가족으로 재편되는 듯했다. 하긴 200-250년 정도 그 과정이 진행되었으니, 그 즈음을 살아간 구성원들에게 핵가족은 ‘당연’이고 나아가 ‘하나님의 창조질서’로 여겨졌을 일이다.

하지만, 사회학적으로 말해서 핵가족 형태는 근현대 사회의 작동 방식과 맞지 않다. 왜냐하면 만인이 다 하나님 앞에 제사장인 것처럼, 근대의 개인은 모두 법 앞에 평등하고 자기 재능대로 살면서 일용할 양식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게 근현대 사회를 연 가장 핵심적인 합의였기 때문이다. 이는 남자만 해당되지 않는다. 물론 근대 초기와 중기까지는 오랜 기간 지속되어온 문화 제도적 관성에 따라 남자들이 주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을 했지만, 근대적 주체는 원칙적으로 성별과 관계가 없다. 기회의 평등과 과정의 공평함은 남자에게만 해당하지 않으니까. 결국 오늘날 ‘요즘 애들’이 결혼을 자기 삶의 선택지로 여기지 않는 이유는 개인적 이기심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제도가 ‘드디어’ 원칙대로 작동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 제도적 관성이 힘을 발휘하는 근현대 사회의 초기와 중기 동안 3세대 가정과 교회는 근현대적 ‘칸막이화’(compartmentalization)를 신앙적으로 해석했다. 근현대 사회에서 일터와 가정은 성별에 따라 배치되었다. 안정적인 생계노동에 종사하는 아버지들이 근로소득을 월급봉투째 갖다 주면, 어머니들은 알뜰살뜰 가계를 운영하면서 내조와 양육을 전담하는 ‘낭만적’ 가족 형태가 그것이다. 생산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중산층 전업주부의 경우 비교적 여유로운 시간과 자원을 교회 봉사에 열심히 쏟아 부었던 시절이기도 하다. 이들은 교회의 동력이었고, 이 시절 여전도회(여선교회)가 활성화되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사람은 ‘인정 욕구’를 지닌 사회적 동물이고, 칸막이화된 배치에서 전업주부들이 자신의 이름을 찾고 유의미하게 공적 활동을 할 수 있는 주요한 무대가 교회였다.

그런데 3세대 후기에 들어서자 가정이라는 공동체적 작동 방식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1997년이 터닝포인트가 되는 상징적인 해다. ‘남편은 생계노동, 아내는 가사노동’ 공식이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일하는 남편, 내조하는 아내’의 배치가 바뀌자 이를 정당화하는 윤리관도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다. ‘당연한 제도’였던 가정과 결혼에 대한 의문이 시작된 시기이다. 결혼은 꼭 해야 하는 건가? 아이는 반드시 낳아야 할까? 과연 무엇이 성경적인가? 오늘날 20-30대들은 이런 질문들을 많이 던지며 살 아간다. 비혼이 경쟁력 있는 세상이 왔으니 이를 정당화할 성경적 근거를 찾자는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 아니다. 성경의 핵심적 신앙 고백과 사회 제도를 해석하기 위한 신앙적 정당화를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가 다음세대를 향해 기성세대의 ‘제도’를 강요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하여 50대 이후의 부모세대가 자녀세대에게 결혼을 압박하거나 결혼하지 않는다고 심란해하는 것은, 지나가는 제도의 관성 속에서 다음세대의 의미 추구를 막는 행위일 수 있다.

4차 산업혁명과 4세대 그리스도인
‘4세대 그리스도인’은 내가 전망하고 바라는 ‘미래형 그리스도인’이다. 4차 산업혁명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이 치열하게 ‘생각’하고 ‘기도’하며 만들어가야 할 새로운 그리스도인인 셈이다. 도대체 신앙과 4차 산업혁명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알고 보면 매우 ‘심각하게’ 상관이 있다.

   
 

산업혁명은 “무생물 동력자원에 의한 기계제 생산”을 의미한다. 1차 동력은 증기였고 2차는 전기였다. 영국의 역사가 웰스는 이 변화가 인간의 사는 방식을 혁명적으로 바꾸었다고 평가했다. 단순히 물리적 동력은 기계가 감당할 것이다. 이제 인간의 경쟁력은 기계적 동력을 어떤 방식으로 배치할 것인가 생각하고 선택하고 판단하는 ‘지성’이다. 지성으로 승부하는 세계가 열렸고 근현대 사회의 구성원들은 저마다 ‘전문 지식’을 가지기 위해 경쟁하게 되었다. 그런데 정보혁명 혹은 디지털 혁명이라고 평가되는 3차(인터넷)를 거쳐 도래한 4차(AI) 산업혁명은 우리의 경쟁력이라는 ‘지성’에 도전하고 있다. 인공지능, 딥러닝, 전공자가 아니라도 익히 들었을 과학기술은 한마디로 ‘생각하는 기계’의 시대를 의미한다. 1, 2차 산업혁명이 단순한 물리적 노동력만을 제공하던 사람들을 어떻게 배치했는지 기억한다면, 웬만한 전문가보다 더 빨리 더 정확하게 그리고 쉼 없이 분석하고 선택하고 처리하는 ‘도구적 지성’을 가진 기계의 도래가 지성‘만’이 경쟁력인 줄 알고 달렸던 우리를 어떻게 배치할지는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열심히 일하는데 월급은 점점 내려가고 있지 않나? ‘잉여’로 여겨지는 인간 노동력은 저평가되고 결국은 버려질 것이다.

잉여란 여분, 불필요함, 무용함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들은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당신 없이도 잘 할 수 있고, 당신이 없으면 더 잘 할 수 있다. 당신이 거기 있어야 할 어떤 자명한 이유도 없고, 당신이 거기 있어야 한다고 주장할 만한 어떤 뚜렷한 정당성도 없다. 잉여로 규정된다는 것은 버려져도 무방하기 때문에 버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환불해주지 않는 빈 플라스틱 병이나 일회용 주사기,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아 아무도 사지 않는 상품, 조립 라인에서 품질 검사관이 버리는 바람에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기준 미달제품이나 불량품처럼 말이다. (지그문트 바우만, 정일준 옮김, 《쓰레기가 되는 삶들》, 새물결, 32쪽)

그러니 AI가 웬만한 도구적 이성 영역을 커버할 4차 산업혁명시대에 버려질 사람들은 누구인가? 조만간 ‘지식도 경쟁력이 없다면 대체 우리 아이들은 뭘 시켜야 하나’ 하는 부모들의 고민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사회학적으로 볼 때, 모든 제도의 끝물이 되면 현 제도에서 경쟁력 있는 영역에 전 구성원이 달려든다. 우리나라도 조선 말기에 모두 양반이 되겠다고 돈 주고 족보를 사들이지 않았나. 허나 그건 모두 쓸데없는 짓이었다. 곧 사라질 것이었으니까. 지금도 마찬가지다. 다들 좋다고 여겨서 90%가 달려가는 분야가 있다면 그건 조만간 사라질 것이다. 지식이 경쟁력이라고 여겨 빚내고 패물 팔아서 학원비 내며 한 길로 달려가지만, 머지않아 도래할 미래엔 소용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후기근대를 살아가는 3세대 엄마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전문엄마’가 된다. 가사와 내조가 덕목이던 전업주부는 옛말이다. 무한경쟁, 적자생존, 정글의 법칙이 일상이 된 세상에서 육아를 담당하는 전업주부들에게도 모성의 전문성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AI 시대에 발맞춰 코딩이나 수학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진행하는 선행학습 중에는 임신부 미분적분반도 있다. 임신 6개월부터 막달까지 임신부들이 가는 학원인데, 내 아이를 수학 잘하는 아이로 길러주겠다고 수학문제 풀면서 태교하는 모임이다.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10명씩 둥그렇게 모여 앉아서 자기가 고등학교 다닐 때도 안 풀던 미적분을 풀고 있다. 내가 3세대 엄마들(3G맘)이라고 부르는 엄마들이다. 이들은 ‘삼위일체맘’ ‘전문엄마’ ‘관리자맘’이다. 삼위일체란 3G맘의 기독교적 이름으로 내가 붙여본 닉네임인데, ‘내가 너를 낳았노라(하나님), 너는 나를 통해서만 무언가를 할 수 있다(예수님), 네가 어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가겠다(성령님)’는 마인드로 살아가는 이들이다. 아이와 혼연일체가 되어 함께 다니고 곁을 지키다 보니 자녀들은 물론 엄마들도 교회 모임에 갈 시간이 없다.

이런 세상이 되다 보니 자녀들을 향한 3G맘의 열정은 교회 공동체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우선 아이들이 주일학교에 나오기 어렵다. 교회에서 지식교육을 하는 건 아니니까. 한 시간이라도 덜 재우고 공부를 시켜야 하는 마당에 어떻게 주일 성수를 하느냐, 주일학교는 3세대적으로 말하면 경쟁력이 떨어지지 않나, 일단 최고가 되고 나면 그 다음에 주님께 영광 돌릴 길이 있을 거야…. 이런 생각을 가진 엄마들을 설득해서 다음세대를 모으자니, ‘영어 여름성경학교’를 열어 신앙과 경쟁력을 함께 챙겨주겠다고 홍보하는 교회도 등장했다. 세상에서 필요한 지식을 얻는 데 유리한 방식으로 주일학교를 운영하겠다는 거다. 

이러한 후기근대적 육아 전쟁 상황에서 3세대 아빠들은 소외당한다. 엄마와 아이가 혼연일체로 학업 전쟁을 수행하는 곳에 아빠가 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아빠의 무책임이나 엄마의 이기심 때문이 아니다. 아빠는 계속해서 엄마와 아이가 이동할 수 있는 자원을 제공해야 하므로 신자유주의적 시스템에서 ‘유연한 해고’를 당하면 곤란하다. 당연히 퇴근은 늦어지기 마련이다. 근현대 초·중기의 아빠들이 퇴근할 때는 양손에 자녀들의 간식이 들려 있었는데, 3세대 후반인 지금은 강아지 간식이 들려 있다는 ‘웃픈’ 일화들도 빈번히 등장한다. 늦게 퇴근을 해서 문 열고 들어와 보면 아빠를 반기는 생명체, 관계적으로 마주보는 존재가 오직 강아지뿐인 상황인 것이다.

이렇다 보니 현재 육아기 세대보다 10년 이상 아래인 젊은 세대는 ‘저런 결혼을 왜 해야 하냐’고 묻는다. 캠퍼스에 가보면 결혼하지 않겠다는 대학생들이 1년 단위로 계속 늘어나는데, 요즘엔 70-80%가 결혼하지 않겠다고 손을 든다. 비혼을 선택하겠다는 남학생들이 가장 많이 하는 대답은 이렇다. “왜 뼈 빠지게 돈을 벌어서 남이랑 나눠 써요?” 아내와 아이들이 남이라니! 당연한 일이자 자부심으로 여겼던 2세대 아버지들이 망연자실할 대답이다. 하지만, 제도가 바뀌면 생각도 바뀐다. 그게 ‘문화적 당연’이다. 이전 세대 아버지들은 남자가 돈을 벌어서 월급은 아내에게 갖다주고 아내는 가사와 육아를 담당하는 거라고 당연히 생각했지만, 지금의 20-30대에게는 더 이상 당연이 아니다. 물론 ‘나’만 생각하는 젊은 세대의 경향과 삶의 선택을 그대로 인정하자는 말은 아니다. 제도는 바뀌지만 변하면 안 되는 핵심적인 인간의 능력은 지켜져야 하니까. 그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이를 다음세대에게 어떤 방식으로 건네주면서 새로운 제도를 유의미하게 짜게끔 도움을 줄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다음세대의 이름: ‘탈성적 전문가 개인’
후기근대를 살아가는 20-30대들을 나는 ‘탈성적 전문가 개인’이라고 부른다. 10대들도 곧 그렇게 자랄 것이다. ‘탈성적’(脫性的)이란 ‘성별 구분이 없는’ ‘성별을 벗어버린’이라는 뜻이다. 여성의 소명은 가정에서 남편을 내조하고 육아를 맡는 것이라고 고백하는 50대 어머니들도 자기 딸이 결혼해서 그렇게 살겠다고 하면 버럭 화를 낸다. 그건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다. 변치 않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라고 고백하지만 자신의 딸은 그렇게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스스로 물을 일이다. 만약 내조와 육아가 여성의 창조 질서라면 딸에게도 그 질서대로 살라고 가르치고 권면해야 하지 않는가. 오늘을 사는 엄마들은 굳이 분석하지 않아도 자신의 배치(시대적 자리매김)와 딸의 배치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니 딸은 전문가로서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자연스레 드러나는 것이다.

더 욕심 많은 경우는 둘 다 해내라는 요구이다. 내 경우는 문화 경험이 오늘날 엄마와 딸 사이에 끼어 있어서 더욱 힘겨웠다. 아버지는 설교강단에서 여성의 소명은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는 것이라고 늘 말씀하셨다. 이와 동시에, 우리가 다 만인제사장이니 신자들은 한 개인으로서 주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한다고도 하셨다. 의식하지 못하셨겠지만 ‘만인제사장’인 신자는 남자여야 했다. 그의 공적 성취를 내조하고 가정을 돌보는 자로서 여자는 ‘돕는 배필’로 함께하는 구성이 개신교적 가정 윤리였으니까. 문제는 내가 여자이면서 공적 성취의 길을 가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학위 과정 중간에 아이를 낳았는데, 칸막이화되어 공간이 분열되고 성별분업으로 나뉜 상태에서 두 가지를 다 하려니 그야말로 죽을 것만 같았다. 당시 전업주부 및 박사과정 후보생으로 살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이 《엄마 되기, 아프거나 미치거나》(2009)였다(2013년에 개정판 《엄마 되기, 힐링과 킬링 사이》가 나왔다). 많은 엄마들의 공감을 얻은 이 책을 아버지는 읽다가 세 번 집어던지셨다고 한다. 어느 누구보다 가정에 충실했고 그게 창조질서라고 여기며 사신 아버지로서는 중간중간 불편했을 이야기들이 담겨 있었을 거다. 하지만 마지막 결론까지 다 읽으시고는 인정해주셔서 기뻤다. “네가 성경적인 핵심을 잡았구나. 제도를 다시 새로 짜자고 초청하는 거구나.” 실은 그게 우리가 할 일이다. 낡은 제도의 비본질적 습속은 벗어버리되, 성경이 계시하는 본질적 메시지는 꼭 붙잡는 삶 말이다.

3세대 그리스도인들이 놓치고 있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결혼을 그리스도인의 필수요건으로 가르친 건 3세대에 와서라는 것이다. 1세대는 가능하다면 결혼하지 말라 했고, 2세대는 안 하는 것이 훨씬 더 경건한 선택이라고 가르쳤다. 성경에도 다양한 삶의 방식이 나온다. 다만 결혼유무와 상관없이 성경이 핵심적으로 강조하는 그리스도인의 공통된 삶의 원칙은, 공동체로 사는 것이다. 물론 결혼도 그중 하나의 선택이다. 하지만 엘리야나 엘리사, 바울, 심지어 예수님도 모두 결혼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과연 혼자 살았을까? 그들은 모두 ‘공동체’로 살았다. 그것이 교회로, 하나님 나라의 통치 질서로 사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후기근대인들이 놓치고 있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서바이벌을 위해 홀로 뛰다가 잃어버린 경험이고 능력이다. 후기근대인들은 물론 그리스도인들조차도 공동체로 사는 경험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하여 요즘 대학마다 ‘나눔 리더십’ ‘서번트 리더십’ 등을 교양필수 과목으로 개설하고 있다. 각자도생, 개인적 성취 등이 살아가는 데 유리한 제도 안에서는 나눔이나 봉사의 개념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회성은 길러야 하겠고 결국 급하니까 학교에서 필수로 가르치겠다는 것인데, 한두 학기 수업시간에 터득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요즘 대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면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자기초월적 사랑’ ‘나를 내어주는 헌신’ 등의 표현이다. 나만 챙기며 살다보니 사랑도 이기적이 되어버린 세대이다. 소위 ‘꼰대’처럼 요즘 세대를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현 제도 안에서 열심히 적응하다보니 잃게 된 너무나 소중한 인간 능력이 안타까워 이를 돌아보자는 초청이다.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는 21세기적 사랑을 ‘합류적 사랑’(confluent love)이라고 불렀다. ‘함께’(con-) ‘흘러가는’(fluent) 동안만 하는 사랑이라는 뜻이다. 사랑한다면 결혼하는 것이 당연하고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계속 함께 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20세기 ‘낭만적 사랑’(romantic love)과는 사회학적으로 구별되는 형태의 사랑 유형이다.

예를 들어, A와 B라는 사람이 각각 성장하여 대학생 때 서로 합류하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전문가요 경쟁적 개인이 되는 훈련을 수행중인 이들은 결혼을 제도적으로 유리하다고 여기지 않기에 결혼을 전제하지 않으며, 오히려 어느 시점에는 서로 헤어질 것을 ‘암묵적’으로 전제한다. 자녀양육을 위해 평생 협업할 필요도 없고 양가 부모님에게 효도할 의무도 없는 두 개인이 잠시 합류하는 동안 사랑한다면, 남녀 할 것 없이 상대를 끄는 매력적 경쟁력은 ‘섹시한’ 외모이다. 이 친구들에게 러브가 뭐냐 물어보면 성관계라는 답이 가장 많이 나온다. 한 고등학교 특강 시간에 사랑이 무엇인지 물었더니 “3년짜리 화학적 놀음”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다고 ‘요즘 젊은 애들’의 사고방식을 탓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이들은 오늘날의 제도가 부추기는 대로 사랑을 배우는 중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공동체로서 사랑을 해본 경험이 없고 그런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제도 안에 배치되어 있지도 않다. 단지 남녀 간의 사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고 깊은가. 후기근대인들에게 친구랑 같이 노는 건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짓이다.

시대나 제도의 한계를 넘어 보편적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능력으로서의 사랑을 정의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기꺼이 나의 경계를 초월하여 나의 시간과 에너지와 존재를 너에게 내어 주려는 마음과 행동. 사랑의 보편 조건은 나의 바운더리를 넘어서는 데 있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도, 제자를 향한 스승의 사랑도, 연인을 향한 사랑도 다 그러하다. 그런데 합류적 사랑에는 이게 없다. 합류 기간이나 방식의 문제가 아니다. 제도가 바뀌면서 달라지는 게 있기 마련이지만 변하지 않는 인간 공통의 능력은 지켜야 한다. 사랑에서 꼭 필요한 자기초월, 이게 없는 것이 합류적 사랑이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그것은 과연 사랑인가?

심지어 요즘엔 부모자식 사이에서도 ‘자기초월’로서의 사랑이 사라지고 있는 듯하다. 주변에 ‘삼위일체맘’이었던 지인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혼신을 다해 대입 준비를 기획적으로 잘했는데 결과가 실패로 나타나니까 엄청난 실망감을 쏟아내고 자녀에게 배제와 소외감을 느끼게 만들더라. 입시결과에 따라 자녀를 향한 태도가 달라진다면, 그들이 기울인 혼신의 에너지는 과연 사랑이었을까? 모든 사랑은 나보다 네가 더 중요한 법인데, 부모로서 나의 의미와 나의 기대가 져버려진 것에 대한 분노로 정작 소중한 ‘너’의 의미와 절망감을 살피지 못한다.

결국 후기근대의 합류하는 사랑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은 나 자신이다. 상대가 뚱뚱해져서, 더 이상 케미가 안 통해서, 나의 직업 기회가 더 좋아져서 헤어지는 이러한 이유들은 지극히 ‘나’ 중심이다. 그리스도인들도 별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을 포함하여 다음세대의 사랑 방식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사랑을 섹스로만 생각하면서 자기 기준과 감정에 따라 합류하고 흩어지고 합류하고 흩어지기를 반복한다는 점이다. 동성애나 다자연애(poly-amory)에 대한 논의가 사회적으로 공론화되는 이유도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제도 변화에 있다. 역사상 결혼·출산·육아와 연결되지 않는 사랑, 오직 나의 육적 감각과 정서적 만족을 채우는 동안만 합류하는 계산적 사랑은 그 상대가 반드시 이성일 필요도, 하나일 필요도 없는 세상이 된 것이다. 어른들이 들으면 놀랄 만한 이러한 변화를 목도하면서 오늘날 교회는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너희 삶의 방식을 무조건적으로 존중한다’ 얘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건 신적 소명이야’ 하고 강요할 수도 없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설명하고 인도하는 ‘새로운’ 기독교 윤리가 아직 나오지 않았고, 결국 그냥 흘러가는 대로 안타까워하기만 하는 상황이다.

회복이 시급한 3가지 인간성: 주체성, 관계성, 창조성
그럼 어찌해야 할까? 결국 ‘함께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경줄 잡기가 필요하다. ‘경(經)줄’이란 시대와 제도를 초월한 하나님의 계시를 표현하기 위해 최근 내가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경전의 ‘경’자가 바로 그런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중요한 능력이지만, 후기근대 사회가 잃어가는 인간성으로 나는 주체성, 관계성, 창조성을 꼽는다. 제도가 아무리 달라져도 포기할 수 없는 인간 능력이다. 따라서 다음세대를 위해 교회가 붙잡아야 할 핵심이기도 하다. 기획된 정보력 아래서 주입식으로 그것도 경쟁적으로 교육받는 과정에서 잃어버리게 된 주체성과 관계성, 창조성 말이다. 현재 공적 교과 과정과 제도가 가르치지 않는 것들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주체성과 관계성, 그리고 창조성은 4차 산업혁명시대에 인간이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핵심 역량이다. 1, 2차 산업혁명 이후 물리적인 노동력이 기계로 점점 대체되어 갔듯이, 이제 지식이 경쟁력인 시대는 점차 저물어간다.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가장 효율적으로 처리·선택·결정하는 ‘도구적 이성’은 이제 기계가 감당할 것이다. 그런데 곧 소용없어질 도구적 이성을 훈련시키고자 우리 아이들을 자기혐오, 자기파괴에 빠질 정도로 획일적으로 밀어붙이면서 주입식으로 가르쳐야 하는 일일까. 앞으로 곧 도래할 새로운 환경은 다음 세대로 하여금 새로운 제도를 만들도록 요구할 텐데, 지금 교회 바깥 어디에서도 그런 교육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외부 강의에서 이런 얘기를 하면, 꼭 듣는 제안이 있다. “그거 가르쳐주는 학원 없나요? 교수님이 그런 학원 한 번 만들어 보세요.”

하지만 이건 학원에서 되는 게 아니다. 실제 삶으로 부딪치면서 경험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평가받지 않는 상황에서 서로를 진심으로 마주보면서 만나는 가운데, 내 의미와 너의 의미가 부대끼고 갈등하고 좌절하고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전인격적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는 전근대 사회에서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던 일들이다. 그런데 다음세대는 이를 경험하는 공간이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이야말로 4세대 그리스도인, 4세대 교회가 꼭 붙잡아야 할 시대적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주체성, 창조성, 관계성이야말로 하나님 형상을 지닌 인간의 가장 핵심적 능력이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존재로서 인간의 생각은 지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서로를 건설하기 위한 관계적 사고를 하고, 공동체로 살아가는 방법과 새로운 제도를 짜내기 위한 창조적 사고를 하는 일도 ‘생각’에 포함된다. 이런 능력들이 3세대에서는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심지어 사라지고 있지만, 4차 산업혁명이 재편하는 세상에서는 곧 가장 필요한 인간의 능력이 될 것이다. 

이런 우려와 고민을 하던 시점에서 4세대적 발상을 하고 실험을 시작한 한 청년을 기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 2011년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4학년 때 자퇴를 했던 장혜영이라는 청년이다. 누가 시켜서도 등 떠밀려서도 아닌, 자신의 주체적 결단으로 학교를 그만둔 것이다. 이 얘기를 전하면 대치동 엄마들은 모두 다 안타까워한다. 4학년까지 버텼는데, 기왕이면 학사 학위는 땄어야 한다고 말이다. 자격증이 통치하는 지금의 세상에서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혜영 씨의 주체적 결단에는 관계적 힘이 더 크게 작동했다. 혜영 씨에게는 한 살 아래의 발달장애 여동생이 있었다. 어린 시절 둘은 항상 붙어 다녔다. 혜영이라는 이름보다 ‘혜정이 언니’라는 이름으로 자기 정체성을 형성했던 시절이다. 동생을 사랑하기에 기꺼이 스스로 받아들인 정체성이었다. 둘이 떨어지게 된 것은, 혜영 씨가 중학교를 가면서부터였다. 어른들은 말했다. 세상은 경쟁사회다. 네가 계속 동생을 돌보면 둘 다 망한다. 동생을 돌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솔루션은 네가 열심히 공부해서 자리를 잡은 뒤 동생을 데려오면 되는 거다. 이러한 어른들의 기획 속에서 동생은 시설로 보내졌다. 혜영 씨는 동생 몫까지 열심히 뛰었고 명문대를 갔지만 그 속에서 외롭고 힘들었다. 가끔 시간을 내어 찾아가 본 동생은 어른으로 성장하고 있지 않았다. 시설에 격리된 채 경쟁적 세상을 살아가는 데 부적절한 인간으로 분류되고 그저 먹여지고 생명이 지탱되는 형국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화가 나고 속상했던 혜영 씨는 결국 자퇴의 변을 대자보에 담아 붙인다. ‘새들에게 날개가 있어서 어디로 날아갈지 선택할 수 있다면, 인간에게는 사랑이라는 능력이 있어서 누구를 사랑할지 선택할 자유가 있다. 나는 연세가 아닌 다른 사랑을 향해 떠난다’는 내용이었다.

   
 

혜영 씨가 찾아 떠난 사랑은 여동생이었다. 동생을 데려온 언니는 동생과 함께 용감하게 사회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실험을 시작한다. 자기들의 프로젝트를 ‘어른이 되면’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하면서 유튜브 채널로 방영하고 최근에는 영화로도 만들었다. 혜영 씨가 동생 혜정 씨와 함께 부른 노래도 있다.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라는 곡인데, 이 노래를 나는 21세기 교회 바깥에서 들려오는 예언자적 외침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죽임 당하지 않고 죽이지도 않고서, 굶어죽지도 굶기지도 않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이 노래의 제목처럼, 우리의 ‘다음세대’는 자연사가 꿈이라 한다. 과로사, 아사, 사고사 등이 요즘 청년들이 직면해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 하고, 굶지 않기 위해 누군가를 굶겨야 하는 그런 세상을 ‘당연’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절규요 저항의 선언이다.

혜영 씨가 그리스도인인지 여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저 선언은 지극히 ‘성경적’이다. 21세기 후기근대를 살아가는 나에게 누군가 성경의 핵심 윤리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살아라’(존재명령)와 ‘살려라’(구원명령)로 요약하고 싶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당신이 주신 풍성한 생명을 그대로 잘 살아내라는 존재명령을 부여하셨다. 동시에 사람은 혼자만 잘 사는 게 아니라 더 연약한 생명을 살려낼 수 있는 능력도 갖고 있다고 얘기하셨다. ‘다스리라’는 말씀은 피라미드 꼭대기에 올라가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여하신 능력, 그러니까 창조 세계의 변형을 가져올 수도 있는 그 어마어마한 능력으로 약한 생명체들을 살려내는 선택을 하고 또 그런 제도를 만들면서 살아가라는 의미로 풀이한다. 혜영 씨의 노래에는 잘 살아내면서 살려내는 삶을 살고 싶다는 내용이 핵심적으로 들어 있다. 바로 이것이 3세대 끝자락에서 4세대로 넘어가는 이 상황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 아닐까. 바깥에선 3세대적 규칙대로 남을 밟아가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혼자만 잘 살다가 교회에 와서는 하나님 사랑과 희생을 이야기하면서 분열적으로 사는 삶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다. 그런 삶은 청산해야 한다. 1세대는 격리되어, 2세대는 타협하며, 3세대는 각개전투로 살았지만, 그건 하나님 나라 통치 질서의 온전한 모습이 아니었다. 바야흐로 4세대는 이 세상에서 혼자가 아닌 하나님 나라 비전대로 공동체로 살아낼 가능성이 있는 시절이다. 물론 낭만적이고 유리한 상황에서 전개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3세대적 제도가 흔들리고 그 안에서 사회 구성원들이 새로운 삶을 노래하고 있지 않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새로운 삶을 제도 안으로 불러올 원천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여전히 우리는 ‘희망’을 노래할 수 있다.

‘서로를 건설하는’ 공동체를 향하여
성경은 항상 공동체로 살아내라는 이야기를 한다. 구약성경 사사기 9장에 나오는 이스라엘 초기 공동체의 비전이 대표적이다.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한 기드온이 죽은 뒤 아들들 간의 권력 다툼이 있었다. 여호와께서 왕이시라는 이스라엘의 공동 신앙을 망각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중 아비멜렉이 자기 형제들을 한 날 한시에 모두 때려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 와중에 겨우 목숨을 건저 피했던 요담이 곧 돌아와 하나님 임재를 나타내는 그리심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외치는 내용이 사사기 9장이다. “하루는 나무들이 나가서 기름을 부어 자신들 위에 왕으로 삼으려 하여…”(삿 9:8)

여기서 ‘나무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한다는 것은 금세 파악이 가능하다. 풀어보면 이렇다. 사람들이 왕을 뽑으려고 공동체 안에서 잘나 보이는 인물을 찾아간다. 그런데 올리브 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로 비유된 인물들은 저마다 사람들 위에 올라가 우쭐거리는 것은 무의미하며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소명도 아니라는 이유에서 왕 되기를 거절한다. 각자가 받은 재능(talent), 즉 양질의 올리브기름, 달고 맛난 열매, 깊은 풍미의 포도주로 공동체를 이롭게 하는 것이 그들의 삶이라는 것이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원하셨던 공동체의 사는 방식이다. 즉 하나님 나라의 비전은 ‘재능사회(Meritocracy)’였다.

관료제 사회(Bureaucracy)는 자리, 지위가 통치하는 근현대(3세대) 사회를 의미한다. 그러나 많은 미래학자들이 예견하기를, 4세대는 자리보다는 재능이 통치하는 사회가 될 거라고 한다. 사회가 원하는 재능은 물론 돈이 되는 재능이겠지만, 하나님 나라 비전은 그렇지 않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재능을 주셨다는 전제로 출발하는 게 하나님 나라 공동체이다. 요담의 우화에서 이어지는 본문(14-15절)에 보면 가시나무가 왕이 되겠다면서 자기 그늘 아래 들어오지 않으면 불을 내서 모두 불살라 버리겠다고 위협한다. 이 우화에서 가시나무는 필시 아비멜렉일 것이다. 역사는 실제로 그리 슬프게 흘러갔다. 하지만 만약 가시나무도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이를 공동체를 위해 쓰겠다고 결심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하나님이 주신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어서 양들을 보호하겠다고 대답했다면 말이다. 하나님의 시선에서 열등한 재능은 없다. 가시는 올리브기름, 무화과 열매, 포도와 ‘다른’ 것이지 결코 열등한 것이 아니다.

물론 3세대 제도 속에서 더 높이 평가받고 재화로 환원되기에 유리한 재능이 따로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건 자본주의적 시선에서 응시하는 재능이다. 앞으로 오는 사회에서 재화가치가 없다고 판단되어 버려질,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에서 귀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게 될 것이다. 얼마나 많이 버려질까? ‘1대 99의 사회’라는 비판이 나온 지도 이미 오래다. 그렇다면, 앞으로 첨예하게 전개될 재능사회에서 ‘4세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로 부름 받은 교회에 부여된 소명은 무엇일까. 교회는 쓰레기로 여기고 버려진 사람들을 건져오는 곳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주신 재능을 서로 알아봄으로 인간적 존중과 사랑이 실현되는 곳이어야 한다. 각자 가진 재능이 연합하여 함께 살아가는 것이 가장 아름답고 건강한 공동체적 삶이라고 세상을 향해 삶으로, 존재로 선포하는 곳이어야 한다. 그것이 어느 시절이든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공동체가 가진 경줄적 삶이다. 사도 바울이 교회를 묘사하면서 가장 많이 쓴 표현도 ‘서로가 함께’(kai allelon)였다.

서로 앞장서서 남을 존경하고, 서로 합심하고, 서로 받아들이고, 서로 충고하고, 서로 기다리고, 서로를 위하여 같이 걱정하고, 서로 화목하고, 서로 선을 행하고, 서로 사랑으로 섬기고, 서로 남의 짐을 져주고, 서로 위로하고, 서로 사랑으로 참아주고,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용서하며,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서로 친교를 나누며, 서로를 건설하는(oikodomein) 사람들의 이름이 교회입니다. (게르하르트 로핑크, 정한교 옮김,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분도출판사, 170-171쪽 참조)

 여기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서로를 건설하는”이라는 표현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1절에 나온다. 우리 성경에서는 “덕을 세운다”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그리스어로 ‘오이코도메오’(oikodomeo) 동사를 사용했다. ‘건설한다’는 뜻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건물을 아니라 사람을 건설하라고 말한다. 왕궁, 성전, 도시성벽,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니다. 4차 산업혁명 이후의 세상에서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버려질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적어도 이 땅의 교회들은 버려진 사람들이 뛰어 들어올 수 있는 공동체, 물리적 생명도 인간으로서의 자존감도 살아나는 그런 ‘생존 공동체’가 되면 좋겠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가득해서 서로의 재능을 발견해주고 격려함으로써, 스스로 하나님의 귀한 피조물로 살아갈 뿐 아니라 누군가를 살리는 선택을 하는 사람들로 자라가는 그런 센터가 되면 좋겠다. 다음세대들이 이를 위한 주체적이고 관계적이고 창조적인 역량을 기를 수 있도록 물심양면 돕는 몫이 어른들에게 있을 것이다. 세상의 수직 서열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수평적 관계 안에서 자기를 인정하고 타자를 존중하고 서로 하나의 교회로 건설되어가기를 소망한다.


 

백소영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와 미국 보스턴대학교에서 기독교사회윤리학을 공부했다. 이화인문과학원 연구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는 강남대학교 기독교학과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교회 및 시민단체에서도 강연하며 기독교 세계관과 윤리의식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세상을 욕망하는 경건한 신자들》 《엄마되기, 힐링과 킬링 사이》 《교회를 교회되게》 《우리의 사랑이 의롭기 위하여》 《드라마 속 윤, 리》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 등이 있다.

백소영 goscon@goscon.co.kr

<저작권자 © 복음과상황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책과 함께

1 2 3 4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