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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 노동자’ 곁에 머물게 될 줄이야

기사승인 [341호] 2019.03.29  15:2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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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1호 이웃 곁으로 이웃 속으로]

   
▲ 앞에서는 사람들이 광고탑에 올라가 있고, 굴뚝 위에 올라가 있고, 밥을 굶고, 바닥을 기어서 행진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현실을 바라보고만 있었고, 누군가는 살아가고 있었다. (사진: 송기훈 제공)

# 낯섦  
학창시절에 정부 과천청사 근처로 등교하면서 데모하는 아저씨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어디서 구름떼같이 잔뜩 몰려와서는 시끄러운 노래를 하루 내내 틀어놓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머리에 띠 두른 아저씨들의 화난 모습 말고 기억나는 것은 들려오던 노래의 몇 소절 “너와 나~ 너와 나~~ ◯◯ 노동자”라는 부분이었는데, 훗날 〈철의 노동자〉라는 민중가요의 일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살짝 반가워 미소를 지었던 기억이 난다.   

# 반가움
영등포산업선교회. 이름부터 생소하다. ‘영등포’라는 지역은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었고, ‘산업’은 경험한 적 없으며 ‘선교’라는 말만 조금 알아들을 것 같다. 신학대학원의 필수 프로그램으로 교회 기관들 중 하나를 골라 탐방하고 실습해야 한다기에 추천을 받아 영등포산업선교회를 선택했다. 하지만 어색한 느낌이 드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영등포산업선교회는 과거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을 했다는 곳이라던데 그때만 해도 그런 운동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영등포산업선교회가 주최하는 ‘현장심방-발바닥으로 읽는 성서’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낡은 건물에서 며칠간 먹고 자면서, 이곳이 정녕 머리에 띠를 두른 괴수들이 사는 곳이 맞는가? 라는 질문이 들었다. 덩치와 목소리가 큰 아저씨들은 온데간데없고, 여성 실무자들이 분위기를 주도하며, 시종일관 웃음소리가 멈추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무서워서 피해만 다니던 농성 현장, 투쟁 현장, 시위 현장도 “심방”을 다녀왔다. 농성장 천막에 계시던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간단히 끼니를 때우는 데 사용하는 낡아빠진 조리도구, 주전자를 본다. 저 한쪽 구석에 보드게임도 있고, 책과 슬리퍼도 있다. 수건도 걸려 있고 두루마리 휴지도 있다. 매서운 겨울바람에 바람을 막으려 쳐놓은 비닐이 펄럭거리지만, 그 안에서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조금은 따뜻했다.
‘아 무서운 사람들이 아니구나. 다행이다.’

반갑다. 이 느낌은 무엇일까? 예전에 잠시 미국에 있는 한 노숙인 센터에서 인턴으로 일할 때 나를 챙겨주던 다정한 흑인 할아버지와 그 센터의 친구들이 생각난다. 편견과 선입견으로 가득 차 이 세상을 경계하던 나에게 먼저 내밀어 줬던 그들의 손길을 떠올렸다. 영등포산업선교회는 그렇게 내가 쳐놓은 ‘영등포-산업-선교회-노동운동’이라는 두터운 경계를 뚫고 넘어오는 환대와 반가움의 손길이 되어주었다.

# 균열
반가웠던 산업선교회와의 만남을 뒤로하고 제주도에 있는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2년간 전임 교역자로 사역하면서 많은 일을 했다. 새벽기도 인도부터 형광등 교체까지, 교회 사역의 알파와 오메가를 해냈다. 하지만 별일 없을 것 같은 나의 조용한 세상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진도 팽목항에서 제주항으로 오던 배가 침몰했다는 소식이었다.
알고 보니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전원 구조되었다는 소식에 안심하고 돌아갔지만 연이어 드러나는 사실과 감춰지는 진실 사이의 괴리를 마주해야만 했다.

제주항이 보이는 가까운 바다로 나가서 하염없이 서 있었다. 언론의 오보들과 실태조사를 외면하는 정부도 끔찍했지만, 특별히 한국의 교회들은 이 총체적인 고통 앞에서 어쩔 줄을 모르는 것 같았다. 며칠 지나지 않아 결국 “침몰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라는 익히 들어오던 방식의 설교가 결국 한 대형교회의 강단에서 흘러나왔다. 교회의 수준은 딱 그만큼이었다.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교회는 이렇게 제자리만 지키고 있으면 되는 것인가? 세상과 교회는 왜 이렇게 나뉘어 있는가?

대한민국의 일상은 균열이 났고, 그리스도의 몸은 산산이 부서진 것 같았다. 교회가 조금은 더 현실 세계와 밀접해질 수 없을까? 교회들은 ‘세상’이라 부르는 저 일반 세계와 친해질 수 없을까? 온갖 질문들이 균열된 마음의 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 매 순간 노동의 문제는 위치와 내용을 달리하며 변한다. 하지만 노동을 하는 사람은 변함이 없다. 여전히 우리는 노동하며 살아야 한다. (사진: 송기훈 제공)

# 아픔
제주에서의 사역을 마치게 될 무렵,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일해 보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받았다. 반가운 소식이었다. 조금은 더 교회와 세상(?)의 접점에 가까이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958년에 시작한 영등포산업선교회는 당시 사회 변혁 운동이 정권에 의해 탄압받던 시절 교회라는 이름으로 압제에 맞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던 곳이었다. 당시 도시에는 수많은 공단이 생겨나고 인력들이 대거 도시로 찾아 들어왔다. 저임금 고강도의 노동을 견디며 가족이 잘되기를 바라던 수많은 노동자의 땀과 눈물이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처음에 영등포산업선교회의 노동선교는 공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을 ‘전도’하여 교회로 데려가기 위해 출발했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마주하면서 그 방향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에게 노동법을 가르치고, 공장에서 학대받는 이야기들을 들어주고, 모임을 꾸려주는 곳이 되었다. 그것이 훗날 얼마나 큰 사회적인 힘을 가질지 모른 채 그렇게 영등포산업선교회는 산업선교의 요람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공장에서 일했던 사람들, 여공들의 수기를 찾아보면 정말 눈물 없이는 보기 힘든 내용들이 많다. 그들에게 영등포산업선교회는 말 그대로 교회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시절은 바뀌고 누구나 잘산다는 대한민국이 되었다. 풍요의 시대에 태어난 나는 어려울 것 없이 자랐다. 공장은 이미 도시를 벗어나 지역으로 흩어지고 있었고, 서비스 노동이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노동자의 권리와 이익을 대변하는 노동단체들이 생겨나기까지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하지만, 풍요의 시대에 부족함을 외치는 그들은 나에게는 늘 낯선 이들이었다. 내가 부족하지 않은 이상, 내가 아프지 않은 이상에야 남의 고통은 아무런 느낌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영등포산업선교회라는 존재는 아픔이 되었다. 도시의 슬픈 역사는 나에게 아픔이 되어 지난날의 무지함을 찔러댔다.

# 현장
지역 교회의 일과 기관 교회의 일은 또 달랐다. 주말보다는 평일에 주로 일을 하게 되었고, 현장을 조금 가깝게 마주할 수 있었다. 지역 노동단체들과 협력도 해야 했고, 해고 노동자들이나 위기에 있는 노동 현장에 함께해야 했다. 그뿐 아니라 산업선교회와 여러 측면으로 연결된 교회의 일, 사람의 일도 하다 보니 몸이 둘이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나마 지역 교회에서 일할 땐 교회 예배 처소가 주된 활동 공간이었지만, 여기서는 그 공간이 전국으로 확대되는 기분이었다. 새로운 일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보니, 살아오면서 강하게 다듬어질 필요가 없었던 온실 속 화초 같은 성정에 작은 생채기들이 나기 시작했다.

특별히 ‘투쟁’이라는 단어는 가장 아픈 상처다. 불의에 맞선다는 말을 입으로 내뱉기는 참 쉽다. 하지만 현장은 그렇지 않았다. 예전엔 길거리에서 구호를 외치고 시위만 해도 백골단과 구사대에 의해 몽둥이로 진압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현장은 법이라는 형식이 주는 그림자,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 기업들의 오만함 그리고 나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이 보내는 차가운 시선들이 길거리에 나앉은 노동자들을 둘러싸는 크고 강한 장벽이다. 본사 빌딩 앞에서, 길거리에서 아무리 기도회를 하고 소리를 쳐봐도 들려오는 메아리조차 없을 때가 많았다. 누군가는 목소리를 내서 싸워야 하는 일에 쉬이 지칠 때가 많았다. 매일 벽을 대하는 일이었다. 

많지는 않지만, 기도회나 집회로 투쟁과 농성 현장에 나갈 일이 종종 생긴다. 때로는 찬 바닥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있어야 하고, 어느 날엔 땡볕에 종일 서 있어야 했다. 앞에서는 사람들이 광고탑에 올라가 있고, 굴뚝 위에 올라가 있고, 밥을 굶고, 바닥을 기어서 행진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현실을 바라보고만 있었고, 누군가는 살아가고 있었다.

‘발바닥으로 읽는 성서’라고 했던가, 이제야 성서를 발로 읽는다는 표현을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었다. 고통의 얼굴을 마주하니 성경이 새롭게 보였다. ‘부자가 된 야곱’으로만 알고 있던 이야기는, 평생 형의 발목을 잡는 자로 낙인찍혔지만 형과 동등한 자식의 권리를 찾기 위해 투쟁했던 한 노동자의 이야기로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노조(노동조합)라는 저주받은 이름(발뒤꿈치를 잡는 자)을 달고 살아가는 노동자들, 일할 권리(장자의 권리, 자녀들이 누릴 동등한 권리)마저 박탈당한 요셉이지만, 그 힘센 형(자본가, 사측)을 상대로 어떻게든 자기도 아들이라고 외치던 야곱의 간절함이 느껴졌다. 그 처절한 야곱이 자신의 인생에서 도망쳐 나와 돌베개를 베고 농성할 때 꾸었던 하늘에 이어진 사닥다리의 꿈은, 굴뚝 농성을 하고 있는 이들이 꾸는 꿈처럼 느껴졌다.

현장을 마주하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다. 투쟁을 반복하는 것은 나약한 나에겐 고통이다. 약간의 우울증세도 덤으로 찾아왔다. 하지만 상처가 아문 틈으로 뽀얀 새 살이 나오듯 생명의 신비를 동시에 느낄 수도 있었다.

# 우연
내가 이곳에서 일하게 될 줄이야. 어떻게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일하게 되었는지를 스스로 돌아볼 때면 구레네 사람 시몬의 이야기를 떠올리곤 한다. 골고다 언덕을 오르던 예수의 십자가를 우연히 지게 된 사람, 십자가의 길을 마지막까지 함께해준 사람이 바로 구레네 사람 시몬이다. 그 후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로마서 마지막 장에 바울이 문안한 사람 중에 구레네 사람 시몬의 아들 루포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보아, 시몬과 그의 가족이 그 이후에 예수를 따른 것은 아닌지 추측할 따름이다. 어쨌든 나는 이곳에서 시몬이 우연히 지게 된 십자가를 본다. 이곳의 역사도, 노동도, 노동운동도 전혀 모르던 철부지가 우연히 역사가 지고 간 십자가의 길들을 며칠 걷고 난 뒤의 인생은 분명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노동의 문제를 다 아는 것도 아니고, 우리에게 닥친 너무나도 다양한 노동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 적절하게 대응할지도 모른다. 여전히 기초 노동법 강좌를 들으러 다니는 실상이다. 산업선교회가 시작되던 때, 정부의 탄압을 받으며 활동하던 때, 도시산업선교회가 들어오면 공장이 ‘도산’한다며 미움을 사던 때, 그 이후의 시간들이 있다. 매 순간 노동의 문제는 위치와 내용을 달리하며 변한다. 하지만 노동을 하는 사람은 변함이 없다. 여전히 우리는 노동하며 살아야 한다.

교회에는 수많은 노동자가 있다. 두 렙돈을 겨우 바쳐내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으로 교회는 이루어진다. 하지만 교회는 우연히 돈을 줍듯이 그런 헌금들을 받으며, 노동에 대해서, 사람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 고통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입을 닫고 있다. 교회에는 회사 사장님도 있으니 말조심해야 한다면서. 그러는 사이에 오늘도 누군가는 처절한 현실을 겪어내며 살고 있다. 누군가는 절벽의 끝에서, 외면의 끝자락에서 떨어지고 있다.

# 안전함
영등포산업선교회에 자주 오시는 해고 노동자 한 분이 계신다. 10년이 넘도록 농성 천막을 오가다 보니 씻을 곳, 맘 편하게 잠시 머물 곳조차 없으신 분이다. 농성 천막 10년은 실로 어마어마한 짓눌림의 세월이다. 잠시 농성 천막에 누워 있던 적이 있는데,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너무 무섭게 들렸다. 내 머리 위로 발자국이 지나가면 나를 짓밟으러 오는 것만 같았다. 그런 소리를 10년 내내 듣고 살았을 것이다. 그분은 당신보다 만만치 않게 낡아빠진(30년 넘은) 영등포산업선교회 건물에 오신다. 샤워를 하시고 빨래를 하시고 식사도 가끔 하신다. 그러면서도 항상 미안해하시며, 뭐라도 도움이 되고자 물도 떠다 놓으시고 설거지도 해주신다. 하루는 그렇게 불편하게 쓰지 마시라고, 산업선교회는 당신 같은 분들의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그 말에 위로를 받으셨는지 볼 때마다 그 말씀을 계속하신다.

농성장에 주로 계시다 보니, 이것저것 도움이 필요한 일들이 생긴다. 그럴 때마다 나에게 종종 부탁하시는데 귀찮게 느껴질 때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툴툴대면서도 해드리고 나면, 마음 한편이 가벼워진다. 이분에게 이곳은 안전한 공간이다. 앞으로도 산업선교회가 해고된 사람들, 노동자의 권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언제고 올 수 있는 도피성 같은 곳, 고향 같은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나님이 천사의 모습을 하고 오셨다면 나에게는 그분의 모습으로 오셨음이 틀림없다. 나를 귀찮게 하면서 계속해서 내가 살아있게 하신다. 그 작은 마음 놓치지 않게, 한 사람 귀하게 여길 줄 알게 마음을 바꿔주신다.

하나님의 집에서 그렇게 당신과 나는 안전히 머물 수 있다.


송기훈
현재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일하고 있으며, 예수의 십자가를 우연히 졌던 구레네 사람 시몬처럼 자신도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르는 삶을 살고 있다.

송기훈 goscon@goscon.co.kr

<저작권자 © 복음과상황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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