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호 커버스토리]

Ⓒ복음과상황 정민호
Ⓒ복음과상황 정민호

캠퍼스 유학생 선교단체 ISF(International Student Fellowship, 국제학생회) 임혜진 고려대학교 간사는 2011년에 사역을 시작했다. 1997년 서울대학교에서 유학생과 가족, 교수, 연구원의 한국 생활을 지원하기 위해 시작된 ISF. 2011년에는 외교부 비영리 사단법인으로 등록된 바 있다. 임 간사 배우자는 해외 동포 조선족인 박영춘 한빛누리 민족화해사업팀장. 박 팀장은 유학생 시절 아내에게 “전도를 당했다”고 이야기했다. 커버스토리를 준비하면서, 캠퍼스 유학생 선교 방식에 대한 임 간사의 관점과 조선족 배우자와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가 궁금해 두 사람을 함께 만났다. 인터뷰는 1월 5일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용두동집 1층 동네책방에서 진행했다. ‘함께 살기’라는 가치로 모인 용두동집으로 이어지는 ‘일상’ 안에서의 선교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 서로를 소개해주실 수 있으세요?

박영춘: 혜진이는 ‘한국인인 듯 한국인이 아닌 사람’, 그 한마디가 생각났어요. 외국인들과 많이 만나는 일을 하고 있기도 하고, 외국인 친구들과 잘 맞는 것 같아요.

임혜진: 남편은 저를 크고 깊게 만들어준 사람이에요. 박영춘이 궁금했을 뿐인데, 잘 몰랐던 한·중·일 역사도 공부하게 됐죠. 외국인에게 열린 성향이더라도 한국에서 쭉 살아온 제가 가진 한계가 있을 텐데, 남편을 만나고 사람이 왜 자기 정체성을 알고 살아야 하는지 깨달았죠. 또, 나를 진짜 이해해주는 사람이기도 해요. 한국 사람이 가진 기준이 아니라 다른 각도로 나를 바라봐 주거든요.

- 제가 듣기로는, 박영춘 팀장님이 임혜진 간사님에게 전도를 ‘당하셨다’고…

혜진: 전 전도하지 않았어요!

영춘: 본인은 전도 안 했는데 제가 복음을 받아들였으면 전도를 ‘당한’ 거죠.(웃음) 아내는 캠퍼스 바깥, 한국 사회에서 처음 만난 한국인이었어요. 20년 전, 석사과정을 밟기 위해 중국에서 한국으로 왔을 때만 해도 비자 받기가 무척 어려웠고 고향에서 집을 판 돈으로 보증금을 마련했거든요. 월드컵이 열리던 2002년이었는데도, 장학금을 받기 위해 첫 학기는 캠퍼스에서 안 나가고 공부만 했죠. 다음 해가 돼서야 한국 사회를 구경하고 싶어졌고, 그 첫발이 경실련 후원을 받아 열린 한중 청년 포럼이었어요. 그때 같은 테이블 바로 옆에 앉은 사람이 아내입니다. 프로그램 끝나고 연락했더니 동갑이었고 친해지게 됐죠. 같이 서울 시내 나들이도 가고, 영화도 보고, 궁 투어랑 한강 유람선도 탔는데, 저희 고향 문화에선 데이트해야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거고, 친구 이상의 감정이 아니면 이렇게 잘해줄 수 없거든요. 나중에야 모든 외국인한테 잘해준다는 걸 알게 됐지만요. 그런데 혜진이가 일요일에는 교회 간다고 못 만난다는 거예요.

혜진: 한국 사람들이 웃지도 않고 차갑다고 오해를 많이 사는데, 전 친절한 그리스도인 한국인이 되자는 마음밖에는 없었어요. 제 친언니랑 같이 만난 적도 있었는데, 기독교인인 언니는 ‘영춘아, 인생의 목적이 뭐라고 생각하니?’ 같은 질문을 던졌죠. 전 우리 교회에서 영화도 보고 연극도 하니까 당시 만났던 모든 외국인 친구들에게 “일요일에 뭐해? 우리 교회 놀러 와!”라는 말을 하고 다녔고요.

영춘: 대학생 때까지만 해도, 교회 이미지가 유럽의 오래된 예배당이나 성당, 비 오는 날 번개 치는 밤에 뱀파이어가 나올 법한 곳이었어요. 중국은 사회주의국가라 교회에 대해 가르치지 않았고요. 그런데 혜진이는 일요일 교회에 가서 못 만나니까 교회가 궁금해지고, ‘가도 되냐?’ 물어보고 처음으로 갔던 거죠. 생각한 것처럼 이상하진 않았어요. 설교가 제가 듣기에도 곱씹을 만한 내용이었고요. 저도 한국에 왔으니까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이 많았죠. 그걸 넘어서는 이야기더라고요. 나는 누구인가,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중국에선 정체성 고민을 안 했고, 한국에서는 대기업 들어가는 게 꿈이었는데 교회에서 균열이 생기는 거죠. 내 인생 그렇게 가는 게 맞나.

Ⓒ복음과상황 정민호
Ⓒ복음과상황 정민호

- 조선족으로서, 그리고 조선족 남편의 배우자로 한국 사회를 살아가며 느낀 것은 무엇인가요?

혜진: 남편이 귀화하기 전 중국 국적일 때 혼인신고 과정에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어요. 결혼했는데도 한동안 동거인이었고, 신혼부부의 모든 혜택에서 배제되었죠. 사람들과 친해져서 남편이 중국 사람이라 말하면, 한족인지 조선족인지 믈어보는데요. 조선족이라 답하면 다른 어떤 설명도 없이 대화가 끝나요. 조선족을 향한 편견이 많다고 느꼈죠. 출신국에 따라 선호도가 너무 달라요. 경제 격차나 이념적 잣대로 사람을 봐요. 한국은 층층이 쌓인 편견과 잣대가 너무 많아요.

영춘: 이전에는 한국 사회가 여유도 없었고, 더욱이 사회주의 계열과 연결된 재중·재일 동포를 동포로 보지 못했죠. 1992년 중국과 한국이 수교하고 한국 기업이 중국에 진출하면서 중국어와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조선족이 매개 역할을 했어요. 경제적 유익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이었지만, 사기 치거나 당하고 신용을 안 지키는 등의 일이 언론을 타며 부정적 이미지가 부각되었죠. 제가 막 한국에 왔을 때 이미 조선족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가 있더라고요. 유학생보다 노동자가 많이 와있는 시점이었는데, 경제적 관계는 언제든 틀어질 수 있고 충돌도 훨씬 많이 생기잖아요. 민족 관점에서 봤다면 역사적 맥락, 화해 문제에 관심을 더 보였겠지만, 아니었고요.

최근 충청도 같은 경우 특별 비자를 주며 고려인을 불러들이고 있어요. 지방 공동화가 생겨 인력이 필요하니까요. 문제는 후속적인 다양한 법이나 조치가 뒷받침되지 못해 동포든 이주민이든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거죠. 정부도 이민청을 만들고 가사 노동자를 대량 도입하는 시범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했지만, 이들을 어떻게 케어하겠다는 정책이 없죠. 이주민과 유학생을 불러들이려는 노력은 있지만 관련 예산은 삭감되고 있고요.

- 작년 말 한신대학교 우즈베키스탄 유학생들이 ‘강제 출국’당한 일이 있었는데, 이 사태는 어떻게 보시나요?

혜진: 재정 증명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하라는 걸로 보였죠. 국적을 향한 편견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의문도 들었고요. 제가 만나는 유학생들은 장학금 지원을 받는 경우가 많고, 아르바이트하는 학생들은 많지 않아요. 공부하느라 바쁘게 지내서 이 사태를 모르는 유학생도 많아요. 이 사건을 놓고 이야기 나눌 기회가 없었지만, ‘환대’에 대해 많이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다른 캠퍼스 사역자들 이야기 들어보면 학교에 따라 학생들 처지가 정말 달라요. 많은 유학생이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더라고요. 바쁜 와중에 학업도 감당하고 비자를 유지하기 위해 여러 증명을 하며 사는 거죠. ‘나는 어떤 사람이다’ 존재 증명을 계속하는 일은 그 자체로 많이 지치거든요. 다양한 상황에 있는 유학생들을 공동체와 사회가 어떻게 환대할지 고민이 모아져야 한다고 봅니다.

영춘: 제가 대학 다닐 때는 중국 유학생들이 학비 보증금을 한 학기 등록금 수준으로 냈어요. 지금 중국 학생들은 안 내도 되거든요? 중국 경제 상황이 많이 올라가서 이젠 필요 없다는 거죠. 내국인 학생이 줄고 재정을 메꾸려니 유학생을 많이 받는데, 거기 맞춰서 어떻게 케어할지 고민이 부족한 것 같아요. 학생들이 이탈하지 않도록 지역사회나 기업과 매칭해서 아르바이트, 인턴 등을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면 좋을 텐데요. 아르바이트 시간이나 분야도 묶여있고, 통장 잔고가 부족하면 심지어 추방하죠. 일단 불러들여서 필요한 부분을 쉽게 채우지만, 문제가 터질까 싶으면 강제적으로 처리하는 부분이 아쉬워요. 외국인, 이주민이어서 쉽게 생각한다고 봐요.

Ⓒ복음과상황 정민호
Ⓒ복음과상황 정민호

- 혜진 간사님이 만난 유학생들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혜진: 미국 유학생이 어떤 수업에서 팀 프로젝트를 해야 하는데 아무도 같이하려 하지 않는 거예요. “나 한국말 되게 잘해, 너희들 불편한 거 없어”라고 말해도요. 저는 그게 한 개인의 나쁨이 아니라 사회적 분위기라고 봐요. 평소에 영어로 대화하는 건 좋지만 내 성적이 관여될 때는 손해 보기 싫어하죠. 결국 그 친구는 여러 일이 있어서 학교를 옮겼어요. 한 중국인 유학생은 과잠바를 입고 와야 하는 날 전달받지 못해서 혼자 못 입고 오고, 나중에 스스로 맞춰 입었다고 하더라고요. 듣고 있으면 눈물 떨어지는 이야기 많아요. 집주인에게 거듭 성추행당한 친구도 있었는데, 나중에 그걸 알게 돼서 법적 대응을 하고 있어요. 유학생들은 자기 주도적인 삶을 꾸려나가다 보니 혼자 해결하려는 경우가 많아, 어른으로서 안타깝죠.

영춘: 한국은 개인과 국가가 강하게 연결돼있는 것 같아요. 개인 정체성을 조금 더 생각해본다면 다양한 요소를 담아낼 수 있을 텐데, 이주민이나 유학생을 대할 때 기본적으로 국가의 태도나 언론 보도 내용을 많이 따라간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는 교회이자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으로 상황에 임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 캠퍼스 유학생 사역을 처음 시작하셨을 때와 지금, 캠퍼스 환경이 달라진 점이 있나요?

혜진: 유학생 사역을 향한 관심이 높아졌어요. ISF는 매 학기 ‘유학생 사역자 훈련학교’를 하거든요? 예전에는 평균 50명 정도가 지원했는데, 점점 늘더니 최근엔 100명 넘게 신청해서 접수 기간을 다 채우기도 전에 인원을 제한하게 됐죠. 유학생들 국적도 예전엔 중국이 1위였다면 지금은 베트남이에요. 180여 개국에서 온 많은 학생이 한국의 여러 캠퍼스에서 공부하고 있어요. 고려대 ISF만 보면, 중국 유학생이 많았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모든 대륙에서 온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 참여하고요. 중남미 유학생들도 많아졌죠. 석·박사과정이나 어학당 다니는 학생이 많았던 때와 달리 학부생 비율이 높아져서, 학부생, 석·박사 연구생, 연구교수, 어학당 등 다양한 유학생들이 참여해요. 종교를 가진 경우, 각 종교의 색채도 강해진 면이 새로운 점이죠. 사역을 시작한 2011년에 만난 학생들과는 아직도 연락하는데요. 지금 만나는 학생들과는 예전만큼 끈끈해지기가 조금 어려워요. ISF 친구들이 졸업 후 취업해서 한국에 남아있는 비율이 높아졌는데요. 유학생 출신 졸업생들을 위한 교회 공동체의 장기적인 섬김이 필요합니다.

- 유학생들과 어떤 활동을 하시나요?

혜진: 보통 한국 친구들과 한국어를 같이 배우고 한국 문화를 체험하자는 광고를 보고 한국어 교실 때문에 직접 찾아와요. 학교 또래 집단들은 영어로 대화하려 하지만, 우리는 선생님과 소그룹으로 만나 한국어를 사용하려 하거든요. 대학생끼리는 영어권에서 온 유학생을 좋아하는 분위기도 있지만, 여기 선생님들은 유학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와서 차별하지도 않고 술을 마시러 가지도 않아요. 카톡으로 서로 안부도 묻고 밥도 같이 먹으러 가요. 어떤 선생님은 책을 녹음해서 올려주기도 하죠. 학생들이 선생님 집에 초대받기도 하면서 한국 문화를 직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고, 다양한 나라에서 온 다른 친구들도 만날 수 있고요.

유학생 예배팀 멤버 중 에콰도르 학생의 졸업 축하와 엘살바도르 학생의 송별회. (이하 사진: 인터뷰이 제공)
유학생 예배팀 멤버 중 에콰도르 학생의 졸업 축하와 엘살바도르 학생의 송별회. (이하 사진: 인터뷰이 제공)
유학생 예배팀이 예배드리기 전 같이 음식을 만들어 먹는 모습
유학생 예배팀이 예배드리기 전 같이 음식을 만들어 먹는 모습

- 그렇게 관계 맺는 유학생들이 이곳이 선교단체인 것을 알면, 거부감을 갖지는 않나요?

혜진: ISF는 한국에 있는 유학생, 연구자, 교수를 나라·언어·문화·종교와 상관없이 섬기는 대한민국 외교부 등록 단체이기도 해서 신뢰를 하죠. 학생들의 종교를 보면, 힌두교·기독교·불교 등 세계 종교가 다 있어요. 종교가 없는 경우가 대다수지만 거부감이 없죠. 우리 원칙이 친해져서 관심 생길 때까지 전도를 안 하는 거거든요.

외부의 사역 참관자들이 궁금해서 방문하면 “제발 전도하지 마세요”라고 항상 이야기하죠. 처음 만난 유학생에게도 전도하시더라고요. 학생은 그 선생님이 이상한 말을 하고 갔다 그러고. 참관자들에게 왜 그랬냐고 물어보면, 너무 안타까워서 그랬대요. 우리는 안타깝지 않아서 가만있는 걸까요? 아껴서 안 하는데. 전도하지 마시라고 부탁드리죠. 어떤 사람이 전국 3대 맛집에서 만든 만두라면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줘봐요. 아무리 맛있는 만두여도 안 받잖아요. 인간적으로든 선생님으로서든 매력적인 통로가 될 때까지 기다리자는 게 ISF 정신이에요.

학기가 시작되는 3월·9월 환영 파티 때 우리를 소개하고, 학기가 끝나는 6월·9월 때 종강 파티 때는 하나님 사랑으로 섬긴 이야기를 전하죠. 누가 교회에 가고 싶다고 하면, 그때 지역교회로 연결해요. 관심을 보이는 이들을 교회로 연결하고, 지역 공동체를 섬기는 게 ISF 모토지요. 캠퍼스에선 한국어 수업이나 여러 활동으로 친구가 될 수 있지만 영적 성장이 이뤄질 수 없잖아요.

저희 교회가 고려대 근처에 있어서 용두동집을 중심으로 유학생 사역을 같이하는데, 10월부터 12월까지 유학생들을 교회 소그룹에 초대하고 파티도 했어요. 유학생들이 가장 좋아하고, 실질적 도움도 주는 일이 가정으로 초대하는 거예요. 학교나 한국어 교실 선생님 외에 한국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요. 코로나 초기에는 교회와 함께 유학생들을 위한 방역 키트를 비치해서 나눠주기도 했죠. 국내 유학생들을 섬기는 일뿐 아니라, 돌아가는 유학생들을 현지 선교사님들과 연결하는 사역도 해요. 국내외 협력으로 섬기는 셈이죠.

- 용두동집에서는 어떻게 살게 되셨어요?

혜진: 2016년 ISF 미국 지부와 캐나다의 협력 단체를 방문한 적이 있어요. 캐나다에 유학생들만의 집이 있더라고요. 한국에도 이런 공간이 있었으면 싶었는데, 2018년에 함께 살기에 관심을 가진 교회 멤버가 주도해서, 교회와 재단이 컨소시엄을 맺어 용두동집을 짓게 되었죠. 이전에 살던 작은 집에서는 상을 깔아놓고 유학생들을 초대해서 밥을 먹이곤 했는데요. 이곳은 2층 공유 주방에 20-30명씩 와도 되니 막 초대하고 그랬죠.

제가 외국인들을 데려오면 이 건물에 사는 다른 사람들도 와서 인사하죠. 다른 가정의 아이들은 이젠 외국인이 오면 ‘혜진이 이모 친구들’이라는 인식이 있어요. 아이들도 같이 밥 먹고 축구 경기도 보면서 서로의 팀을 응원하고요. 이웃 꼬마는 “나는 이모 때문에 우리나라가 많아요!”라는 거예요. 유학생들이 가깝게 느껴지니까 외국인에 대한 장벽이 없는 거죠. 환대의 가치들이 자연스럽게 다음 세대로 전수되고 있어서 감사해요.

계속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유학생들도 이곳을 신기해해요. 이웃과 함께하는 삶을 살고 싶어서 크리스천들이 모여 산다니까. 지나가면서 “여기 혜진이네 집이야!” 하고 간대요.(웃음) 우리 삶에서 만난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함께 살아간다는 게 감사하죠. 하나님이 안내해주시는 삶이 멀리 있지 않고, 그런 현장들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계속 알리고 싶어요. 앞으로도 이런 일들을 일상과 끊어지지 않게 연결하고 싶고요. 한편에선 나다움, 부부다움을 지키면서 삶과 사역 사이에 균형을 맞추며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용두동집
용두동집

- 사역과 일상의 거리가 가까운데, 지치거나 그만하고 싶을 때는 없으신가요?

영춘: 사실 혜진 사역에 덜 참여하고 싶어요.(웃음) 계속 불려 다녀서 제 일보다 더 많은 것 같아요. 아내는 즐거움을 함께하자는데, 제 일 하기에도 바쁘거든요. 좀 덜 불러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죠.

혜진: 저는 2019년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어요. 인간이 브레이크가 없으면 하나님이 제동을 건다고, 남편에게 엄청나게 혼났잖아요. 이사 오고 너무 신나서 사람들을 미친 듯이 초대하니까 손목 터널 증후군이 왔어요. 한쪽은 아예 수술해야 하고, 다른 쪽은 수술을 고려해봐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우리 집에 사람이 없던 일이 별로 없었어요. 심지어 주일에도. 둘 다 집에 없으면 비밀번호 알려주고 쉬다 가라 그랬죠. 그 일로 멈춰서서 돌아볼 때도 있어야 한다고 느꼈어요.

Ⓒ복음과상황 정민호
Ⓒ복음과상황 정민호

- 박영춘 팀장님은 벌써 20년 넘게 한국 생활을 하고 계신데요. ‘한국인 디아스포라’ 관점에서 해외 동포 문제, 남북관계 이슈를 다루는 일(강의, 기행, 멘토링 등)을 하시잖아요? 7년 전에 복상과 인터뷰를 하셨는데(2017년 9월호) 일과 관련해서 체감되는 한국 사회의 변화가 있나요? 한빛누리의 통일비전트립이 ‘평화기행’으로 이름을 바꾸고, 랜선기행·음식기행 등 프로그램을 다분화한 점이 눈에 띄더라고요.

영춘: 남북관계를 직접 다루는 분야가 많다 보니, 예전에는 한반도 평화에 종사하시는 분들도 왜 이런 방식으로 하죠? 물어보시고 낯설어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남북관계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어서 직접적으로 접근하기 힘들어요. 그래서인지 이런 접근 방식도 좋게 보고 동참하는 교회가 많아지고 있죠. 한쪽 진영 안에서가 아니라 디아스포라 입장에서, 경계에서 다양한 시각으로 한반도를 보는 유익이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 사회가 점점 더 양극화되고, 저도 한국 사회에 적응해가면서 순화해서 풀어가고 있어요. 옳고 그름만 따지면 싸우는 것밖에 안 되거든요. 한국 사회의 아픔과 트라우마를 들여다보고, 복음을 이해하면서 변화를 주게 된 측면이 있어요. 동의가 안 되어도 최대한 이해하면서 화해를 모색하는 길이 의미가 있겠다 싶어서요. 저도 때로는 좌절감을 느끼고 무기력하지만, 현실에 묻히지 않으려면 계속해서 전문성을 높여야 하고 한국 사회의 흐름도 살펴야 해요. 음식기행, 해외기행을 가는 이유도 그래서예요. 내부 시각으로 풀기엔 한계가 있고, 팩트체크는 대화 진전을 꾀하기 어려우니, 조금 에너지가 들더라도 무대를 옮겨 현장으로 가면 다르게 다가오는 부분이 있다고 봐요.

혜진: 우리는 ‘일상’이 키워드예요. 나이 먹고 연차가 쌓일수록 전문인이 돼야 하지만, 우리가 함께해야 하는 건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니까요. 지혜롭게 균형을 잡아가는 게 우리의 과제죠. 영춘이 유학생으로 왔다가 직장인으로서 이주해 살다가 정착하는 삶을 살았는데, 유학생 사역을 하는 제가 얻는 이점이 많아요. 유학생으로 산 적 없는 제가 못 보는 것들을 정서적 측면뿐 아니라 실질적 측면에서 많이 조언해 주거든요. 저는 반대로 영춘이 뭔가를 기획할 때 지식과 경험이 없는 평범한 사람의 눈높이로 평가해주고요.

영춘: 다 해주고 있다는 뜻이죠.(웃음) 저는 반대로 유학생들의 나라로 한번 가서 같은 활동을 해보라고 했죠. 홈그라운드에선 우리의 마음이 가난해지기 어려워요. 유학생 친구들의 온전한 모습을 그들의 고향에서 볼 수 있을 테니까요.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나요?

혜진: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을 때 고민했지만, 저희 이야기는 하나의 디딤돌이고 인터뷰를 통해 유학생과 민족 화해 사역이 전달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응했어요. 저희가 궁금하시면 연락 주세요. 따뜻한 차 한 잔 나누며 대화해요.

Ⓒ복음과상황 정민호&nbsp;<br>
Ⓒ복음과상황 정민호 

진행 김다혜 기자

저작권자 © 복음과상황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