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호 커버스토리]

인터뷰는 12월 21일 카페 언더우드에서 진행되었다. 이날은 카페 언더우드가 카페로 영업하는 마지막 날이었다. 담안유 목사 가 2024년부터 연세대학교 일반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하게 되어 카페 영업을 지속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날 이 후로 카페 언더우드는 예약제 카페 및 공유 공간으로 전환되었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인터뷰는 12월 21일 카페 언더우드에서 진행되었다. 이날은 카페 언더우드가 카페로 영업하는 마지막 날이었다. 담안유 목사 가 2024년부터 연세대학교 일반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하게 되어 카페 영업을 지속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날 이 후로 카페 언더우드는 예약제 카페 및 공유 공간으로 전환되었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담안유 목사는 한국에서 태어난 화교 3세다. 그는 자신을 소개할 때 근원적으로는 중국 사람, 태생적으로는 한국 사람, 국적상으로는 대만 사람이라고 말한다. 1980년대 초반에 태어나 35년째 서울 연희동 토박이로 살아왔음에도 복잡한 정체성을 갖게 된 그의 이야기는 할아버지로부터 시작된다. 그의 할아버지는 1945년 중국 산둥성에서 배를 타고 한국으로 이주해왔다. 그때 할아버지 국적은 중화민국이었다.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그전에 해외로 나온 사람들은 대만인이 되었다. 대만이 중화민국의 정통성을 이으면서 담 목사의 국적도 대만이 되었다.

대학생 시절 예수를 믿게 된 그는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소속 목사가 되었으나, ‘외국인’으로서 목회 활동에 여러 제한을 받았다. 그래서 2021년 4월 담 목사는 신앙 공동체 언더우드선교회를 설립했다. 이곳을 찾아오는 이들은 주로 중화권 유학생, 이주민이며 한중(韓中) 이중 언어 예배가 진행된다. 담안유 목사에게 한국에서 화교로 살아가는 일과 외국인 목회자로서 겪는 어려움, 교회가 이주민과 함께하기 위해 필요한 것에 관해 물었다.

- 어릴 때 할아버지를 자주 뵈었나요?

그럼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같이 살았어요. 아버지가 2016년에 먼저 돌아가셨고, 할아버지는 2018년에 돌아가셨죠.

- 고향 산둥에 관한 얘기도 많이 해주셨어요?

그렇게 많이 하시진 않았어요. 그래도 할아버지와 두 번 산둥에 다녀왔지요. 옛날에 할아버지가 살던 집도 가보고요. 보통 초가집 같은 경우 지붕에 볏단을 올리잖아요. 거기는 좀 특별한 게 바닷가와 가까이 있는 집이라서 그 부분이 해초로 되어있어요. 거기서 이틀을 잤어요.

- 중국에 처음 가보셨을 때는 언제였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요. 1990년대였죠. 인천에서 배를 타고 갔어요. 하룻밤이면 산둥반도에 있는 웨이하이라는 항구도시에 도착하거든요. 다음 날 아침에 육지가 보이는 거예요. 저는 별생각 없이 “외국이다”라고 소리를 냈죠. 아빠가 옆에서 “저기는 외국이 아니라 너의 본국이다”라고 하셨어요. 처음 보는 저곳이 제 본국이면 저는 그때까지 외국에만 살았던 거죠. 그다음 바다 건너서 가본 곳이 대만이었어요. 대만도 제게는 외국이 아니었죠. 제가 살아온 한국에서 보면 해외 입국인데, 국적으로 따지면 귀국이었어요. 아이러니했죠.

- 화교 1세, 2세, 3세는 각각 다른 정체성을 갖게 될 것 같아요.

저희 아버지도 한국에서 태어났어요. 2세와 3세 모두 태어날 때부터 화교였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본토에 대한 감정은 확연히 달라요. 2세는 그래도 어렸을 때 부모가 고향을 그리워한다거나 고향과 한국을 비교하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죠. 저는 할아버지에게 고향 이야기를 많이 못 들었어요. 그냥 “너는 중국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말아라” “한국 사람과 결혼하지 마라” 정도만 이야기했죠. 그렇다고 “우리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언제 갈 수 있을까” 같은 말은 한 번도 안 하셨어요.

- 그럼 중국어는 집에서 가족들과 있을 때 배우신 건가요?

그렇죠. 저는 어릴 때부터 산둥 말을 썼어요. 제가 산둥에 갔을 때, 거기 있는 친척들이 제게 왜 이렇게 말을 촌스럽게 하냐고 물었어요. 할아버지 사투리를 똑같이 배워서 썼던 거죠. 저는 할아버지가 1940년대에 하던 그대로 말했던 거예요.

- 어릴 때부터 한국에서 화교로 살면서 어떤 일들을 겪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중국어를 하면 ‘짱깨’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 학교는 어디로 다니셨어요?

서울 중구에 한성화교소학교라는 화교 학교가 있어요. 연희동에서 명동까지 매일 버스를 타고 다녔거든요. 버스에서 친구들이나 여동생과 중국어를 하면 주변 사람들이 ‘쟤들 뭐야’ 하는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죠. 중국 사람들 시끄럽다고 얘기하는 분도 있었고요. 당시 어른들이 초등학생인 제게 그런 말을 한 거예요.

동네에서 친구들과 놀다가도 다툼이 생기면 “너 중국 사람이잖아. 중국으로 돌아가” 같은 말을 듣기도 했어요. 그럴 땐 할아버지한테 가서 우리 왜 한국에 살고 있냐고 따지기도 했죠.

언더우드선교회는 주일 오후 5시에 신촌에 위치한 카페 언더우드에서 한중 이중 언어 예배로 모인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언더우드선교회는 주일 오후 5시에 신촌에 위치한 카페 언더우드에서 한중 이중 언어 예배로 모인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 목회를 하기로 결심한 건 언제부터였어요?

저는 대학교 1학년 때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거든요. 예수를 영접하고 2학년 때부터는 인생을 어떻게 설계하고 살아야 할지 고민이 많았죠. 대학을 졸업하면, 교사가 되는 게 원래 계획이었어요. 제가 대만 CCC 활동을 했었거든요. 그때 대만 CCC 수련회를 ‘생명 투자 세미나’ 같은 제목으로 했어요. 내 인생을 어디에 쓸 것인가 하는 질문이었는데, 곰곰이 생각했죠. 내 생명을 자본이라면 어떻게 투자하는 게 옳을까. 투자 개념으로 보면, 뭔가를 투입했을 때 오래 남아야 좋은 거잖아요. 내가 국어나 문학 같은 것을 가르치면 학생들이 그걸 평생 써먹을 수 있겠지만, 내가 복음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면 이건 일생이 아니라 영생으로 이어진다. 속으로 이런 판단을 했어요. 그때부터는 복음을 가르치면서 교사 일을 할 것인가, 교회에서 사역을 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했어요. 마음이 점점 교회 사역으로 기울었죠. 3학년 때 마음을 완전히 확정하고 헌신하기로 다짐했습니다. 갑자기 부르심을 받았다기보다는 계속 고민하면서 목회하기로 선택한 케이스예요.

- 이후 목사 되는 과정에서 큰 난관을 겪으셨다고요.

목사 안수 과정보다는, 그 이후가 더 어려웠던 것 같아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 소속 목사 안수는 노회에서 하거든요. 제가 외국인이다 보니, ‘타국 시민권자는 직원이 될 수 없다’(예장통합 헌법 제2부 제4장 제21조 ‘교회의 직원’)라는 교단 헌법이 제게 어려움이 되었죠. 저는 이 조항이 저 같은 외국인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한국에서 교회 생활을 하다가 외국 시민권을 받은 사람들을 겨냥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해요. 외국에 나가 공부하고, 영주권 받고, 시민권을 받은 분들이 돌아와서 목회하는 걸 제한하려 한 게 아닐까 싶어요. 어떤 분들은 외국 시민권이 있는 사람이 한국에서 사역하다가도 어려운 시기에 금방 국적지로 나갈 수 있으니까 그런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제가 그 얘기에 설득되지는 않았어요.

- 그럼 외국인은 아예 교단 소속 목사가 될 수 없는 건가요?

외국인노동자를 위한 선교사역자와 노회가 인정하는 특별 전문사역 부문(청소년 교육 등), 해외선교사 등을 예외로 두고 있죠. 최근에 조항이 하나 더 생겼는데요. 외국인도 (서리)집사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항존직인 안수집사, 장로, 권사는 될 수 없다는 말이죠. 제 추측으로는 어느 노회의 교회에 외국인이 많아지고 있는데, 이런 분들이 집사가 될 수 있냐, 항존직이 될 수 있냐는 질의가 나왔을 거예요. 외국인들도 (서리)집사까지는 할 수 있다고 권한을 열어준다는 의미로 결정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 외국 생활을 하다가 돌아오신 장로님, 권사님 중에도 외국 시민권자가 분명히 계실 거란 말이죠. 이분들은 이날부터 교회 안에서 불법이 되신 겁니다.(웃음)

ⓒ복음과상황 정민호
ⓒ복음과상황 정민호

- 목사님은 어떻게 안수를 받으셨어요?

저는 많은 분들의 조언을 듣고 소속 노회의 지도를 받으며 특수 목회를 하겠다는 소명을 갖고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었어요. 저는 서울동북노회에서 안수받았어요. 노회,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아 사역해야 하는데, 보통 새로운 교회에 부목사로 부임하죠. 저는 외국인 목사니까 어쨌든 어느 교회에서 특수 사역을 하고 있어야 가능한 일인데, 안수받고 나서 제 사역 범주가 제한된 거예요. 그래서 후배와 같이 신촌 지역에서 중화권 유학생·이주민 사역을 시작하면서 기존 교회에서 사임하여 무임목사(시무처가 없는 목사)가 되었어요. 무임목사로 3년이 지나면 목사직이 자동으로 사직 처리됩니다.

3년이 다 되어가던 때에 제 상황을 페이스북에 올렸거든요. 그 글을 본 안산제일교회 허요환 위임목사님께서 안산에 밥 한번 먹으러 오라고 하셨고, 찾아뵈니 당신께서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겠느냐 물어보셨어요. 그래서 제가 사역하는 신촌 지역의 노회를 통해 전도목사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전도목사는 경계를 넘어설 수 있다고 하시면서 당회 허락을 받아 저를 전도목사로 파송할 수 있는지 알아봐 주시겠다고 하셨어요. 엄청나게 감사한 일이죠. 허 목사님에게도, 저를 모르시던 교회 분들에게도요. 안산까지 교회 출석하라 말씀도 하지 않으셨고, 그저 신촌에서 사역 잘하라는 격려를 해주셨어요.

- 목사님은 그럼 일반 목회가 아니라 전도목사로만 활동할 수 있는 건가요?

외국인 목사인 저는 담임목사가 될 길이 없습니다. 그럼 총대도 될 수 없죠. 총대가 되지 못하면 총회를 갈 수 없어요. 교단 안에서 제 의견을 표현할 공간이 없는 겁니다. 지금도 어쨌든 예배 공동체로 꾸준히 모이는데, 교회라 할 수가 없어요. 노회 가입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교단 헌법에 따르면, 교회 개척은 노회 전도부를 통해서 하게 되어있어요. 하지만 그렇게 개척되는 곳은 거의 없어요. 보통은 목사가 성도들과 모여서 교회를 시작하고 노회에 가입하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언더우드선교회라는 이름을 쓰는 겁니다. 저희도 이 예배 공동체를 지역교회로 생각하는 건 아니니까요. 사역으로 보자면 특수 사역이기도 하죠. 이중직으로서 특수 사역이고, 제 사역 대상이 중화권 유학생이나 이주민들이니까요. 지금도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국인도 있고, 한국인인데 대만으로 귀화하신 분도 계시고, 대만에서 한국으로 귀화하신 분도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국적이나 민족 이런 걸로 서로를 구분하지 말고, 이중 언어 예배를 하기로 했죠.

중국인 예배라고 하면 중국인만 올 수 있고, 중국어 예배라고 하면 중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만 올 수 있는 거잖아요. 이중 언어 예배라고 하면, 중국어나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올 수 있는 모임이 됩니다. 그런데 이걸 교회라고 홍보할 수는 없어요. 홍보도 하지 않고 간판도 걸지 않고, 그냥 우리끼리 예배드리고 있는 거예요.

- 만약 노회에 가입하면 어떤 일이 생기게 되나요?

교회로서는 노회 가입이 안 돼요. 외국인이 설립한 외국인을 위한 교회라도 안 된다는 거예요. 교단 헌법위원회에서 그렇게 해석했어요. 이건 장로회신학대학교를 비롯한 교단 직영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정규 과정을 다 거쳐서 안수받고도 교회로 목회하려면 독립교단으로 가라는 말과 다르지 않죠. 우리 교단에서 이런 교회를 받아줄 수 없다고 한다면 이건 특정 교회를 배제하는 일입니다. 차별로 다가올 수밖에요. 교단 헌법이 바뀌거나, 헌법 해석부터 재해석될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러려면 총회에 가서 목소리를 내야 하는데, 저는 앞서 얘기했듯이 그럴 수도 없죠.

예배를 마치고 담소를 나누는 언더우드선교회 성도들. Ⓒ복음과상황 정민호
예배를 마치고 담소를 나누는 언더우드선교회 성도들. Ⓒ복음과상황 정민호

- 2년 넘게 언더우드선교회 모임을 이어오신 거죠?

네. 인원이 많지는 않아요. 지난주에는 몇 명만 와서 예배를 드렸어요. 저와 동역하던 서명보 목사님이 다른 교회로 청빙되어 가시면서 일가족 다섯 분이 떠나게 되었죠. 2021년 4월 4일 부활절에 모임을 시작했는데, 다시 한번 부활이 필요한 때입니다.

모임을 중단할까 고민하기도 했는데, 나오는 성도님들 중 두 분은 이 예배 모임이 필요한 상황이었어요. 목사는 성도들의 필요를 채워줘야 하잖아요. 그냥 예배만 드리자, 원래 이것저것 하지 않았으니까, 예배만 드리자는 마음으로 중단하지 않고 계속하고 있어요.

- 예배는 어떻게 진행되나요?

저희가 처음부터 얘기했던 건 ‘우리 교회가 선교적이다’ ‘우리의 예배는 예전적이다’라는 거예요. 예전 형식을 갖춰서 예배를 드려요. 제가 예배학을 전공했으니 이렇게 할 수 있었죠. 순서지를 보면 왼쪽에는 한국어, 오른쪽에는 중국어가 쓰여있어요. 순서마다 번갈아가며 이중 언어로 진행됩니다. 따로 통역하지는 않고요.

언더우드선교회의 주일예배 예문. Ⓒ복음과상황 정민호
언더우드선교회의 주일예배 예문. Ⓒ복음과상황 정민호

- 설교는 어떻게 하세요?

예배에 참여한 구성원에 따라 조금씩 달리하기도 해요. 지금 예배에 나오는 네 명 중 한 사람은 중국어를 모르는 한국 사람이에요. 그럼 청중들이 소리 내어 읽는 부분은 주로 한국어로 진행하죠.

지난번에는 대만에서 손님들이 오신 적이 있어요. 이분들이 한국어를 못 하셨죠. 청중과 주고받는 부분은 어쩔 수 없이 한국어로 했지만, 설교는 혼자 통역을 하면서 했어요. 한 번은 반주로 섬기던 신학생이 설교자였는데, 그땐 신학생이 설교하고 제가 통역했죠.

- ‘우리 교회는 선교적이다’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요.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와 관련 있는 질문이에요.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에 선교적 교회론이 많이 소개되기 시작했어요. 교회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느냐, 교회라는 이름을 대체할 단어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선교적 교회론은 ‘선교’라 이야기해요. 저는 그것을 기초로 도달하는 최종 목적지는 ‘예배’라고 생각해요. 교회는 내향적 공동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밖을 향하고 흩어져야 하죠. 세상에 관심을 두고, 세상을 섬겨야 합니다. 그것을 특정 시간에 특정 장소로 모이는 예배에 적용한다면, 예배 안의 포용성과 확장성과도 관련이 있어요.

작은 공동체인 우리 예배의 경우, 구성원이 될 수 있는 조건을 내/외국인으로 구분 짓지 않으려 했어요. 우리 공동체가 다른 공동체와 다른 점은 ‘이중 언어’라는 특징이죠. 누구나 예배할 수 있다. 대신 두 언어로 예배드린다. 이거죠. 예배 중에 중국어가 나오면 중국어를 잘하는 사람들은 편하겠죠. 예배에 참여하는 한국 사람은 중국어를 몰라도 기꺼이 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서로 좀 불편할 수 있지만, 서로를 위해 이 정도는 감수하는 거죠. 거창한 의미 부여를 할 정도는 아니죠. 사실 순서를 한국어와 중국어로 번갈아가면서 하는 것뿐이랍니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복음과상황 정민호

- 얼마 전 가슴 아픈 일이 있었습니다. 한신대학교에서 우즈베키스탄 어학 연수생 22명이 ‘강제 출국’당하는 사건이 일어난 건데요.

저는 그 일이 제 일 같았어요. 학생들이 한국인이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고, 영미권에서 온 유학생들이었다면 또 일어나지 않았을 법한 일이죠. 저는 이런 차별이 선진국이냐 그렇지 않냐는 차이에서 일어나는 것 같진 않아요. 어느 나라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인식이 더 중요하죠. 어느 정도 아는 나라인지, 모르는 나라인지에 따라 많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미국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이 잘 알잖아요. 우즈베키스탄에 무엇이 있는지는 보통 잘 모르잖아요. 모르는 나라에 대한 포비아가 있죠. 이슬람도 그렇고요. 특정 나라나 종교를 차별하는 게 아니라 잘 모르는 것에서 오는 포비아가 있다고 생각해요.

학생들을 출국 조치하는 건 학교에서 할 일이 아니잖아요. 그 사건에는 ‘거짓’도 전제되어있죠. 유학생들에게 “외국인 등록증을 수령하기 위해 출입국·외국인청에 가야 한다”면서 버스에 태우고는 공항으로 갔잖아요. 그렇게 할 권한도 없는 학교가 학생들에게 충분한 고지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동권을 제한하고 강제로 무언가를 하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재산권도 보호하지 못했어요. 학생들 물건은 기숙사에 그대로 남아 있었잖아요.

만약 다른 대학교였다면, 부끄러운 일이고 정말 별로라고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한신대학교잖아요. 민중신학 담론을 이끈 중요한 신학교이고, 억압당하는 민중과 함께해야 한다는 정신으로 학문하는 곳인데 말이죠. 물론 신학과가 아니라 국제교류원에서 일어난 일이지만요. 학교는 행정적 문제로 이런 일을 벌였겠지만, 출국 조치된 유학생들은 무엇을 느꼈을까요? 공포를 느끼지 않았을까요. 사설 경비 업체 직원들이 버스에 탑승해 유학생들 핸드폰을 걷었고요. 역지사지를 해봐야 하는 것 같아요. 다른 나라에 가있는 한국인 유학생들이 이런 일을 겪었다고 생각해보죠. 어쩌면 한신대 국제교류원는 외국인 학생들을 받을 준비가 안 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유학생과 이주민이 이 시대의 민중이라고 생각해요. 과거 1970-1980년대 노동자들이 민중이었다면, 지금은 자기 목소리를 스스로 낼 수 없는 유학생과 이주민들이 민중이죠. 국민이 아니라서 보호도 받지 못하고, 법적으로도 정치 참여를 하기 힘들어요. 사회적 발언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절대적 약자라는 뜻입니다. 유학생이나 이주노동자들은 어떤 일을 당해도 쉽게 이슈화되지 않습니다. 관심을 주지 않죠. ‘외국인들이 우리 일자리를 뺏어가니까 오면 안 된다’가 적극적 배제의 표현이라면, 무관심과 방관은 소극적 배제입니다.

- 이주민 200만 명 시대가 된 지 오래입니다. 이주민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다양한 변화가 필요한 상황이죠. 먼저 어떤 것들을 하면 좋을까요?

이주민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이주민이 처한 현실을 알아가야 해요. 한국에 오게 될 수밖에 없었던 다양한 이유가 있는데, 한국에서는 이들이 필요 없다고 계속 배제해온 것 같아요.

5·16 쿠데타 직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실권을 장악하고 외국인 토지 소유를 금지했고, 1970년에 ‘외국인 토지취득 및 관리에 관한 법’을 제정했어요. 외국인 토지 소유, 주택이나 부동산 소유에 제한을 두었죠. 그때 화교들이 많이 빠져나갔어요. 그때 내국인 이름을 빌려 다른 사람 이름으로 집을 사고 거주했던 사람들은 김영삼 정권 때 금융실명제가 시행되는 바람에 빌린 명의의 내국인에게 집을 내주게 된 사례가 많아요. 친구를 잃고 배신당한 거죠. 차명을 썼기에 법적으로는 명의를 가진 사람의 재산이 되었던 겁니다. 궁극적으로 금융실명제는 당연히 시행돼야 했지만 이주민들이 큰 손해를 입었죠. 차명으로 물건 산 사람이 무조건 잘못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제도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도 있었는데요.

국제화 시대가 되면서 이런 배제가 약화되었는데요. 2000년대 이후입니다. 한국의 인구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이주민 정책을 진지하게 논의하는 상황이죠. 과거 우리 사회는 이주민에 대한 필요가 별로 없었는데, 이제 이주해오는 사람들과 한국 사회의 필요가 맞아떨어지는 시기가 되었어요. 이제는 배제를 떠나서, ‘타자’를 환대하는 것을 넘어서 이주민들을 우리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야 할 때인 것 같아요.

물론 국민과 이주민의 차이를 아예 없애자는 말은 아니에요. 그런 차이도 겪지 않으려면 이 나라 국민이 되어야죠. 그럼 귀화하는 게 맞아요. 하지만 차별이 존재하는 건 문제죠. 공무원이 되거나 외무를 하는 건 외국인이 할 수 없다고 봐요. 국가를 위해서 일하고, 나라를 대표하는 일이니까요. 외국인이 배제될 수 있죠. 하지만 다른 영역에서는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어요.

‘다문화가 우리 사회를 풍성하게 한다’는 생각도 좋지만, 사실상 다민족국가가 돼가는 현실 자체를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요. 우리 사회 구성원 중에 이미 다양한 정체성을 갖고 있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인식 변화가 필요하죠. 환대를 넘어서 우리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야 해요. 환대는 손님에게 하는 것이잖아요? 가족끼리 환대한다는 말을 쓰는 건 어색하잖아요. 가족이 되려면 거리를 더 줄여야 하고요. 그러려면 잘 몰라서 생기는 공포, 포비아를 없애는 일이 먼저예요. 그다음엔 우리의 필요가 이주민들의 필요와 만날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하죠. 시혜가 아니에요. 서로 주고받을 수 있다는 거죠.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우리 교단이 200만 명이라는데, 대한민국 인구 중 5%가 외국인이란 말이에요. 그러면 교회 안에도 외국인들이 어느 정도 비율로 있다고 볼 수 있겠죠. 어떤 집단이든 그 집단 안에 5% 되는 사람들이 있다면 스스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해요. 우리는 이런 인식이 부족해요. 오히려 배제하면서 그룹을 만들어 그 안에서만 모이도록 하면 된다는 생각 같아요. 그리스도인들은 차별과 구별 없는 복음을 받은 사람들이잖아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구별이 없잖아요. 우리도 막힌 담을 허물고 경계를 넘어서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 사회와 이주민 사이의 거리보다 교회와 이주민 사이의 거리가 더 커 보입니다. 이주민 비율이 5%라고 하셨잖아요. 단순 계산으로 보면 교인이 200만 명이라면 5%는 10만 명인데, 그 정도 이주민 교인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맞아요. 우리 교인 중 한 분이 언더우드선교회에 와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자신의 다름이 이 공동체에 해가 되지 않을 것을 증명해야 하는 것처럼 자신을 검열해 왔다고요. 언더우드선교회에 오니 그런 걸 느끼지 않아서 좋다고요. 한국교회는 꽤나 단일 집단적인 공동체 같아요. 어느 교회에서 200명이 예배를 드리는데, 그중 10명 정도 외국인이 들어가 앉아있으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이 정도 낯선 사람들만 와도 교회는 어쩔 줄 모를 거예요. 교회가 교회라는 건물 안에 존재하고, 그 집단과 비슷한 사람들만 계속 받으니까 낯선 존재로부터 계속 거리가 생기고, 민감성이 떨어지게 되는 것 같아요.

외국인들에게는 외국어 예배가 따로 있는 게 더 편하고 좋을 수 있어요. 그러면 그 교회 한국인 성도들과 섞여서 일체감이나 공동체성, 가족 의식 같은 걸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이런 건 원래 있던 사람들이 고민하고 제공해야 할 부분입니다. 저는 목사인데도 외국인 입장에서 이런 걸 고민하고 있죠. 목사가 개척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 내가 교회를 개척해도 괜찮을까, 교회라는 이름을 써도 될까, 누가 뭐라고 하면 어떡하나, 이런 생각들이요. 아쉬운 일이죠.

교회가 지속해서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선교적이었기 때문이라 봐요. 경계를 계속 넘어 중심축이 바뀌면서 개신교가 이어졌다고 얘기하는데, 기독교 인구 구성만 봐도 이제 더 이상 서구 기독교가 아니라 남반구 기독교 혹은 비서구 기독교가 되어버린 지 오래죠. 집단적 단일성을 고수하려 했다면,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만의 기독교를 고집했다면 거기서 끝났을 거예요.

기독교에는 수용성과 확장성이 존재합니다. 교회는 앞으로 개방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어요. 대비하고 준비하면서 맞이할지, 그때 가서 반응할지 선택의 차이죠. 내가 의도를 갖고 운영을 해나가는 것과 갑자기 들어온 일을 하나씩 불 끄듯 처리하는 건 다른 일이죠. 우리 교단 교인들이 줄어들 거라 예상한다면, 인구 구성이 달라질 거라고 예상한다면, 지금부터라도 준비해야 합니다.

- 앞으로는 교회에서 이주민들을 더 많이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언해주실 얘기가 있을까요?

우리는 늘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살아왔거든요. ‘조금 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교회에서 가깝게 지내던 분들을 대하는 것과 이주민 교인들을 대하는 게 처음에는 다를 수밖에 없어요. 언젠가는 그 거리를 동일하게 만들어야죠.

평평한 길을 만들어갔으면 좋겠어요.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은 낮아지고 거친 땅은 평탄해지고 험한 곳은 평지가 되는 거죠. 누구는 항상 돕는 자, 누구는 늘 도움을 받는 자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 사이를 어떻게 하면 평평하게, 동등하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고 노력해갔으면 좋겠습니다.

진행 정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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